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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목숨 걸고 재판'한 판사 한기택

김태훈 기자 입력 2015. 07. 22. 20:50 수정 2015. 07. 22.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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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택 판사님. 올해도 어김없이 휴가철이 찾아왔습니다. 전국 법원이 27일부터 휴정에 들어간다니 서울 서초동 법원 청사도 당분간 한적하겠군요.

서초동은 판사님의 발자취가 많이 남아 있는 곳들 중 하나이죠. 2005년 7월24일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에서 가족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던 판사님이 급성 심장마비로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에 가장 큰 슬픔이 밀려든 곳도 서초동이었습니다. 아직 마흔여섯의 한창 나이인 데다 열다섯 살 막내아들을 두고 눈을 감았으니 지인들의 슬픔이 오죽했을까요.

저는 판사님과 만난 적은 없습니다. 법조팀 막내기자이던 2003년 8월 한 차례 전화통화로 대화한 것이 전부입니다. 당시 판사님은 서울행정법원 부장판사로 근무하며 대법원 법관인사제도개선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었죠. 위원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보라는 선배 지시에 무턱대고 판사님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취재에 응하지 않겠다”거나 “확인해 줄 수 없다”는 차가운 대답을 예상했는데 뜻밖에도 판사님은 위원회가 처한 상황을 소상히 들려줬죠. “회의가 무기한 연기돼 인사제도 개선이 차질을 빚고 있다”는 판사님의 걱정에 근거해 ‘대법원 사법개혁 의지 퇴색’이란 기사를 썼습니다. 가식이 느껴지지 않는, 맑고 진지한 판사님의 음성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합니다.

김태훈 사회부 기자
판사님이 1988년 6월 사법부 민주화를 갈망하는 소장법관 400여명의 성명 발표를 주도한 것은 훨씬 나중에 알았습니다. 우리 현대사에 ‘제2차 사법파동’으로 기록된 사건이죠. 성명 발표 직후 당시의 대법원장이 자진사퇴하면서 사법개혁의 ‘물꼬’가 트였습니다.

2005년 2월 대전고법 부장판사로 승진한 판사님은 오랜만에 서초동을 떠났죠. 많은 이들이 “축하한다”고 인사했으나 정작 판사님 마음은 평온치 못했나 봅니다. 법관이 일반 정부부처 공무원처럼 승진제도의 틀에 갇혀 아등바등할수록 독립적이고 양심적인 판결에서 점점 멀어진다는 것이 판사님의 지론이었죠. 2006년 1주기 기일에 맞춰 출간된 추모집 ‘판사 한기택’에 승진 직후 판사님의 심경을 담은 글이 실려 있더군요.

“저는 판사로서 고등부장이 되어 보자고 결심한 적은 결단코 없었습니다. … 내가 뭐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순간 진정한 판사로서의 삶이 시작될 것으로 믿습니다. 내가 목숨 걸고 악착같이 붙들어야 할 것은 ‘그 무엇’이 아니라, 법정에 있고 기록에 있는 다른 무엇이라 생각합니다.” 판사님이 동료와 후배 법관들 사이에서 왜 ‘목숨 걸고 재판하는 판사’로 불렸는지 짐작이 갑니다.

판사님의 작은딸도 인터뷰에서 “집에서 꼼꼼히 기록 보시던 모습이 많이 생각난다”며 “아버지 덕분에 집이 절간 같았다”고 회상했더군요. 어쩌면 목숨 걸고 악착같이 재판하는 판사님을 안쓰럽게 여긴 하늘이 판사님에게 휴가를 준 건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부디 천상에서는 법정도, 기록도 다 잊고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김태훈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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