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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진상규명, 나 하나 가둔다고 흔들릴 싸움 아니다"

구혜영 기자 입력 2015. 07. 24. 22:16 수정 2015. 07. 25.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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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1주년 집회 주도' 혐의 구속된 박래군 소장 유치장 인터뷰

▲ 1988년 동생 분신 계기… ‘민가협’ 시작으로 30년 가까이 인권운동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용산 진압 규탄·희망버스 등 영역 넓혀 “다음달 세월호 참사 500일, 아무것도 못하고 구속돼 마음 무거워”

박래군 ‘인권중심 사람’ 소장(54)이 구속됐다. 지난 4월 세월호 참사 1주년 집회를 주도한 혐의다. 지금까지 열두 번째, 2000년 이후에만 네 번째 구속이다. 2006년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확장 저지(두 차례 구속), 2010년 용산 철거민 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 활동 이후 다시 세상과 격리됐다. 지독한 인생이다. 박 소장은 구속될 때마다 “감옥은 최고의 정치대학”이라 했지만 군사독재시절도 아닌데 몸과 마음이 묶인단 건 야멸찬 일이다.

박 소장은 평생 동생(고 박래전)을 보냈던 27년 전 여름을 비껴가지 못했다. 약자들의 고통이 도대체 나아지지 않았다. 평택 대추리 주민들이 그렇고, 용산참사 유가족들이 그렇고, 세월호 참사 가족들이 그랬다. 특히 이번 구속은 박 소장의 가슴을 더욱 짓누른다. 그가 겪었듯 세월호 참사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비극이다. 진실은 여전히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다. 부인 정종숙씨는 “팽목항을 다녀오면 마음이 아파서 종일 말 한마디 못했다”고 전했다. 그는 4·16연대 상임운영위원이란 이름으로 지난 1년 동안 세월호 가족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구치소 송치 전날(21일) 그를 서울 종로경찰서 유치장 면회실에서 만났다. 면회실 내부는 불투명한 유리막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와 세상의 거리만큼이나 뿌옇다. 유리막 앞에 놓인 전화기로 ‘면회 인터뷰’가 진행됐다.

■ “날 구속한다고 흔들릴 싸움이 아니다”

- 수척해 보인다. 몸은 괜찮나.

“견딜 만하다. 구속된 뒤 오랜만에 잠도 자고 쉬면서 책도 많이 볼 수 있어서 좋다.”

박 소장은 세월호특별법 시행령을 폐기하고 다시 논의할 것을 촉구하는 단식투쟁으로 몸무게가 7㎏이나 빠졌다. 최근 수면무호흡증으로 고생 중이다. 잠잘 때 3~4시간 정도 양압기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같이 면회 온 박 소장의 지인들은 양압기 세정제를 영치품으로 넣어줬다.

- 구속을 예상했나. 2000년 이후 평택 대추리, 용산참사에 이어 4번째 구속이다.

“(구속을) 예상했다. 물론 구속 사유가 될까 싶은 생각은 들었지만. 도주할 우려도 없고 압수수색도 했기 때문에 증거인멸 시도도 없었다. 황교안 국무총리 취임 이후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탄압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다. 매 정권마다 구속됐지만 잡혀가고 조사받고 갇혀 지내는 일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래도 위축되지 않겠다. 잘 지내고 나오겠다.”

- 이번 구속은 힘겹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마음이 무거워서 그렇다. 구속 전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도 무력화되고 있고 지원금도 나오지 않는다. 이번 구속이 4·16연대를 흔들기 위한 시도라는 걸 국민들이 다 알지 않겠나.”

- 다음달 세월호 참사 500일을 맞는다. 현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나.

“싸우는 과정에서 성과보다 슬픔과 아픔에 빠진 가족들이 조금이라도 회복되길 바랐다. 그런데 사실상 아무것도 못하고 싸움만 해왔다. 오히려 꼬이고 있다는 답답함이 크다. 이번 주말 팽목항에서 유가족들과 다시 한 번 진상규명 촉구를 위해 모이기로 했고 다음달 참사 500일을 맞아 세월호 문제를 잊으면 안된다는 범국민운동도 계획하고 있었다. 나 하나 구속된다고 흔들릴 싸움이 아니다.”

구치소 송치 전날인 지난 21일 서울 종로경찰서 면회실에서 전화로 인터뷰 중인 박래군씨.

박 소장 면회 인터뷰 직후 세월호 특조위 이석태 위원장의 기자회견 소식이 들려왔다. 특별법 진상규명의 핵심 직위인 행정지원실장, 기획행정담당관, 조사1과장 파견을 정부에 요청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특조위 활동 정상화를 위한 결심이었다. 하지만 세월호 유가족들은 특조위 결정을 ‘중대한 후퇴’라고 지적하며 유감을 밝혔다.

면회 인터뷰는 중간중간 끊겼다. 그는 지인들과 일일이 통화하며 채 마무리하지 못한 일을 의논했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못지않게 공들였던 일은 인권활동가를 위한 기금 마련 운동이었다. 그는 “나는 그나마 가족과 주변의 지원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주변 현실은 그렇지 않다. 경제적 문제로 인권활동가들이 운동을 포기하는 게 슬프고 힘들다. 인권활동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봐라. 얼마나 더 험악해지겠나”라며 격려를 부탁했다.

- 소원인 ‘잘 팔리는’ 연애소설은 언제쯤이면 쓸 수 있을까(박 소장은 연세대 1학년 당시 쓴 소설 ‘땅강아지’로 선배들을 제치고 학내 문학상을 수상한 유망한 문학도였다).

“(웃으며) 아무래도 환갑은 넘어야 할 것 같다. 아직은 할 일이 너무 많다.”

고 이한열씨 어머니 배은심 여사가 전화기를 넘겨받았다. 배 여사는 “아들아, 절대 기죽지 마라. 감옥 안에서 경찰들 좀 가르쳐라. 어떻게 사는 게 옳은 일인지 가르쳐주고 나오거라”고 위로했다.

면회 시간은 30분을 넘기지 못했다. 건강 잘 챙기라는 인사를 끝으로 그는 다시 유치장에 갇혔다. 함세웅 신부(73)는 쉽사리 면회실을 떠나지 못했다. 함 신부는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이후 사회가 마비됐다. (박 소장 구속 같은) 물리적인 고통도 고통이지만 모든 것을 돈으로 지배하려는 고통도 겪어야 하니 말이다. 정부가 세월호 참사도 손해배상으로 해결하려 들지 않나”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부정부패나 국정원 해킹 사건 같은 불의한 일을 외면하는 현상도 심해졌다”며 “이럴 때일수록 깨어 있는 역사의식과 시민의식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 박래군이 걸어온 길

우리 사회는 오랜 군사독재를 겪었다. 저항도 오로지 ‘반독재’ 아니면 주류로 대접받지 못했다. 인권운동은 주변부 취급을 받았다. 양심수가 아닌 일반 시민들의 인권은 쟁점화하기가 쉽지 않았다. ‘인권운동가 박래군’은 30년 가까이 재소자, 비정규직, 장애인 등으로 인권 영역을 넓혀온 인물이다. 강기훈 무죄석방 촉구,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확장 반대, 용산 철거민 살인진압 규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등 한국 인권운동사엔 그의 이름이 빠지지 않는다. 1988년 동생 고 박래전씨가 분신한 이후 인권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듬해 민주화실천유가족협의회 사무국장을 거쳐 1994년부터 2012년까지 인권운동사랑방에서 활동했다. 지금은 2013년 설립된 민간인권센터 ‘인권중심 사람’에서 소장을 맡고 있다.

2003년 의문사진상규명위 조사3국장 시절엔 제발로 의문사위를 뛰쳐나왔다. 당시 동료였던 고상만씨는 “의문사위 국장 한 달 월급이 인권활동가 1년치 월급보다 많았다. 달콤한 유혹에 젖을까 무섭다며 그만두더니 다시 거리의 인권운동가를 택했다”고 말했다. 2009년 용산참사 건으로 수배됐을 땐 순천향병원 장례식장과 명동성당 영안실에서 1년여간 버텼다. 에바다 재단 비리 싸움 때는 재단 측이 던진 인분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그의 학창시절 친구인 노항래 은빛기획 대표는 “스무 살 시절 칼날 같은 뜻을 벼리던 그는 해마다 풍성하게 익어가는데 세상은 여전히 40년 전 논리로 그의 손을 뿌리치고 있다”며 그의 구속을 비판했다.

27년 전 6월, 형은 온몸이 숯덩이가 된 동생의 주검 앞에서 이를 악물었다. ‘창자가 이어진 형, 동생’이라 할 정도로 우애 깊은 형제였다. 어두운 시대, 최루탄이 난무하는 거리를 손잡고 함께 뛰던 동지이기도 했다. 그런 동생이 제 몸에 불을 붙였다. 그해 5월 샛노란 참외가 고향 산밭에서 익어가던 무렵, 먼 산을 바라보던 동생 눈빛은 둘 데 없이 흔들렸다. 1987년 민주진영의 대선 패배 후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이 정치권 타협으로 흐지부지될 것 같다는 걱정과 함께…. 형은 꿈에도 몰랐다. 그게 마지막 고향길이라는 걸. 한 달 뒤 동생은 학교(숭실대) 옥상에서 “광주는 살아있다 군사파쇼 타도하자”는 구호와 함께 불길 속에 타들어갔다. 병원 중환자실, 쉼없이 요동치던 심전계 녹색 그래프가 멈춰섰다. 붕대에 꽁꽁 싸인 동생은 그토록 따르던 형 이름을 불러보지도 못한 채 눈을 감았다. 형은 마석 모란공원 전태일 열사 옆에 동생을 묻고 “그래 네 몫까지 내가 할게. 독하게 맘먹고 싸울게”라고 약속했다. 울지 않았다. 형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그렇게 30년 가까이 약자의 친구, 인권운동가로 살아왔다.

<구혜영 기자 kooh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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