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한 사건 18번 재판서 전패 기록 「고백 그리고 고발」
대기업·전관·대형로펌 장벽 부딪치며 절감한 사법 현실
(서울=연합뉴스) 방현덕 기자 = 공고를 나왔다. 용접공으로 일하다 늦깎이 대학생이 됐다. 사법시험도 합격했다. 남 부러울 게 없었다.
2005년 5월 A씨의 사건만 맡지 않았어도 안천식(49·사법연수원 34기) 변호사의 인생은 평탄했을지 모른다. 굳이 한 사건을 두고 10년간 오랜 법정싸움을 하지 않아도 됐었을지 모른다.
A씨는 경기도 김포의 한 마을의 부친 땅을 한 대기업 건설사에 뺏길 위기에 놓여 있었다. 시가 수십억원 짜리 땅이었다.
건설사는 아버지가 생전에 썼다는 매매계약서를 내밀었다. 그런데 계약서의 글씨는 아버지의 필체가 아니었다. 도장도 평소 쓰던 게 아닌 막도장이 찍혀 있었다.
계약서의 부친 계좌번호 역시 계약시점에는 해지된 계좌였다. 건설사는 개발이 추진되던 마을의 다른 주민을 상대로도 이런 수상한 계약서를 만들었다.
정황상 아버지가 동의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이에 안 변호사는 당연히 승소를 예상했다. 그런데 결과는 패소였다. 재판부는 증인인 건설사 직원 말만을 신뢰했다.
받아들일 수 없어 항소했다. 재판을 거듭하며 허위 계약서임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하나하나 나왔다. 하지만 결과는 또 패소. 상고했지만 심리 불속행 기각이었다.
재심과 관련 소송까지 10년 동안 한 사건을 놓고 민사소송 18건을 치렀다. 그러나 법원은 모두 건설사의 손을 들어줬다. 안 변호사의 주장은 법정에서 번번이 막혔다. 18전 18패.
왜 그랬을까. 건설사는 늘 대형 법무법인을 썼다.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가 배경도 연줄도 없는 '막 변호사'(연수원 수료 후 바로 개업한 변호사)인 안 변호사를 상대했다.
사건이 대법원에 가면 넉 달 전 대법원 재판연구원을 했던 전관 변호사가 건설사를 대리했다. 인천지방법원에서는 1년 전 그 법원 단독판사였던 변호사가 나왔다.
어렵게 구한 증인은 건설사 측의 회유를 받은 듯 법정에서 말을 바꿨다. 마을 주민은 '거대 기업을 상대로 어떻게 싸우겠느냐'며 도와달라는 요청을 거부했다.
계약서가 무효라는 단순한 사실을 증명하려던 안 변호사는 이런 과정을 겪으며 일반 국민은 물론 변호사인 자신에게도 사법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안 변호사는 "평범한 변호사인 저로서는 아무리 증거를 제출하고 주장을 해도 이들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이 제가 경험한 엄연한 사법 현실"이라며 전관예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현실을 탄식했다.
이길 수 없는 소송이 지나간 자리엔 '폐허'만 남았다. A씨 부친의 땅에 세들어 살던 세입자는 집을 철거하라는 건설사의 법적 요구에 농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육군사관학교 출신 전직 장교였던 A씨도 병을 얻어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졌다. 땅 역시 뺏겼다. 안 변호사도 무력감에 한때 변호사업을 정리했다.
그는 지난해 7월 마지막 소송이 대법원에서 기각되자 그간 악전고투의 과정을 「고백 그리고 고발」(도서출판 옹두리)이란 책에 담았다. 법정 밖에서 이어지는 변론인 셈이다.
안 변호사는 "왜 설득이 안 되는 이런 재판과 판결을 강요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국민의 사법 불신은 단지 법에 대한 무지 때문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banghd@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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