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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뜨겁지 않은, 그래서 안심이 되는 사랑

황수현 입력 2015. 08. 04. 20:54 수정 2015. 08. 04.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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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혁 연애소설집 '가짜 팔로 하는 포옹'

어떤 여성학자들에 따르면 "성별은 인류가 만든 위계와 불평등 중 가장 오래된 제도"다. 성별이 인위적 제도라는 주장의 증거는 생각보다 많은 곳에서 발견된다. 꼭 맞물리도록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뭐 하나 들어맞는 게 없는 남녀의 몸과 마음이 그렇다.

'가짜 팔로 하는 포옹'(문학동네)은 김중혁 작가의 네 번째 소설집이다. 표지에 써놓은 연애소설이란 말은 일종의 교란이다. 여덟 편의 단편을 통틀어 우리가 익히 알고 기대하는 연애의 모습은 등장하지 않는다. '튀어나온' 남자와 '들어간' 여자는 서로의 안에서 갈증을 해결하는 데 실패하고 각자의 구덩이에서 몸부림 친다. 그 광경은 슬프다기보단 기묘하고, 우울하기보단 알 수 없는 경쾌함이 있다.

"작품별 평균 리와인드는 8회이고, 평균 스킵은 15회입니다. 평균 일시정지는 4회이고, 평균 재시청률은 1.5회입니다. 작년에는 진심으로 흥분하는 것 같은 배우 2위에 올랐고…"

'상황과 비율'에서 포르노 제작자 차양준은 여배우 송미에게 촬영 재개를 설득하기 위해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필사적으로 읊조린다. 정액으로 범벅된 얼굴을 클로즈업하기 좋아하는 감독과 틀어져 중도하차를 선언한 송미는 풍선을 터뜨리는 것으로 자위를 대신하는 여자다. '펑'하는 소리에 흥분하는 여자의 주파수를 찾아내 맞추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이지만, 위로의 말도 튼실한 몸도 해내지 못한 이 일을 데이터가 해낸다. "마지막으로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데요. 정지화면 캡처 비율입니다. 얼굴과 상체, 상체와 하체, 전신 캡처의 경우를 통계로 내는데, 송미씨의 경우 4대 2 대 2입니다. 전신보다 얼굴의 비율이 높게 나오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랑에 소용되는 언어와 인성이 바닥을 보일 때 그 자리를 숫자로 대신하는 작가의 위악엔 웃지 않을 수 없다. '숫자'란 단어의 중립적 온도는 제목의 '가짜 팔'의 그것과 비슷하다. 뜨겁지 않은, 그래서 안심이 되는.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한 '요요'에도 숫자가 등장한다. 부모의 이혼과 친구들의 따돌림으로 스스로 '관계의 파괴자'라 여기게 된 고등학생 차선재는 외삼촌이 선물한 손목시계 속 작은 세계에 빠져든다. 시계를 해체하고 조립하는 데 능숙해지면 시간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으리란 착각. 시간을 움직여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는 상상.

그러나 대학에 와서 만난 첫사랑이 한날 종적을 감추고 그는 원형판을 회전하는 시계가 아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형태의 시계를 디자인한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는 한때의 믿음은 '시간은 흘러갈 뿐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굳어진다. 한참 시간이 흘러 중년이 된 차선재는 거짓말처럼 첫사랑과 조우하고, 이미 멀어졌다고 믿은 과거의 시간이 시침과 분침처럼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만나는 광경을 목도한다. 영원을 향해 직선으로 흐르지만 결국 다시 돌아오는 '요요의 시간'. 그는 중얼거린다. "나쁘지 않아"

물론 나쁘지 않지만 그렇다고 좋지도 않다. 불꽃처럼 시작해 영원으로 이어지는 사랑이 허상이란 건 익히 아는 사실이지만, 언어 대신 숫자라니.. 쉰 다섯살의 재회라니. 그러나 가짜 팔로 진지하게 건네는 이 포옹은, 진짜 팔을 갖지 못한 자들에겐 제법 진지한 대안이자 구원이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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