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의 전지현 같은 여성 독립운동가 1900명 넘는다

김재용 2015. 8. 6. 14:0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오마이뉴스 김재용 기자]

최근에 개봉돼 화제를 모으고 있는 영화 <암살>. 이 영화 제작진은 몇 년 전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의 심옥주 소장을 찾아온 적이 있다. 여성 독립운동가 모델을 찾았으면 하는데 자료가 너무 없어,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세계사도 그렇지만, 우리나라 역사는 남성 위주의 역사관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여성들의 기록을 남기는 데에는 소홀했다. 많은 기록이 남진 않았지만,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여성의 역할은 매우 컸던 것으로 심 소장은 평가한다.

이제 우리나라 역사에서 여성의 자리를 온당하게 찾아줄 필요가 있다. 여성독립운동사가 재조명되어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그 여정은 결코 쉽지 않다. 심 소장도 그 힘든 길을 걸어가고 있는 연구가 중의 한 명이다. 지난 3일, 심 소장과 전화 인터뷰를 진행했다.

TV서 우연히 본 여성 독립운동가, 인생 바꿔놔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의 심옥주 소장
ⓒ 심옥주
한국정치사를 전공하고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던 심 소장. 그는 백범 김구 선생에 매료되어 다년간 선생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개인 신상에 변화가 생겼고, 전환점이 필요했다. 이후 그는 고시원에 틀어박혀 한의사 공부를 시작했다. 한의사가 되어 사회에 봉사하며 살고 싶었다.

"공부에 너무 매진하다가 손가락 세 개에 마비 증상이 왔어요. 그래서 공부를 진행하기가 어려워 고시원을 나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죠. 그날 TV에 윤희순 의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 이야기를 보고 무언의 감흥을 받아 부산에서 곧장 의사가 살았던 강원도로 달려갔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윤희순 의사의 존재를 접하게 된 그는 그 후 2년간 강원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윤 의사와 관련된 기록을 찾았고, <윤희순의 민족운동에 관한 연구>라는 주제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심 소장은 윤희순 의사 논문을 계기로 여성독립운동가들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의 활동을 말리는 이들도 있었고 의아한 눈빛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쉬운 길을 두고 왜 손수 어려운 길로 가느냐는 것이었다. 역사 연구에서 사료도 없고 발굴되지 않은 인물을 찾아 연구하는 것은 꽤 어려운 길이기 때문이다.

"정치사를 전공한 저도 그게 힘든 길이라는 걸 알았어요. 하지만 저도 두 아이의 엄마잖아요. 한국 어머니들의 삶의 여정을 살피는 차원에서 큰 의미가 있지 않나 싶었어요. 이처럼 이른 시일 내에 우리나라에서 여성의 지위가 이 정도까지라도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일까? 그 부분에 대해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전해주고 싶었어요."

그뿐만 아니다. 그는 한국 정치사의 근현대 부분을 전공했기에 독립운동의 정신이 의병 정신에서 파생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의병 분야에 윤희순 의사 같은 '여성 의병장'이 있었다는 건 대단한 의미라고 생각했다.

역사가 남성의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뜻하니까. 그렇게 시작된 여성독립운동가 연구는 올해로 10년이 되었다.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는 여성 독립운동가연구의 시발점이 된 곳이고, 여성 독립운동가를 알려면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곳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여성독립운동사'를 연구하던 분들은 성신여대의 박용옥 교수님 등이 계십니다. 기존의 '여성 독립운동 연구자'들은 인물의 행적과 삶의 여정을 추적, 발굴하고 있었어요. 저도 그분들 연구의 토대가 된 부분을 바탕으로 연구하고 있고, 또 그분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물론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사상적인 부분을 함께 연구하는 곳은 본 연구소가 처음일 것입니다."

1900여 명의 여성 독립운동가, 알려진 것은 유관순 열사뿐

 여성 독립운동가들
ⓒ 여성독립운동연구소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개인적으로 고민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연구과정에 어려움이 컸다. 과연 해낼 수 있느냐고 사람들이 묻기를 반복했다. 역사 연구를 지원하는 재단들에 연구하겠다고 올리면 '이 분야는 연구가 될 수 없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많았다. 기초사료도 워낙 없고, 기존의 연구 성과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학계에서는 극과 극으로 우리 연구소의 활동을 평가합니다. 너무 힘들어서 별다른 성과를 내기 어렵다고 말하는 쪽도 있지만, 다른 쪽에서는 굉장히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평가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연구를 하면 할수록 기분이 짜릿하답니다."

현재(2015년) 정부에서 여성독립운동가로 인정한 유공자는 248명이다. 심 소장에 따르면, 인정은 못 받았지만 자료를 통해 간단하게라도 활동 기록이 남아 있는 유공자가 1900여 명 정도 된다.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유공자만 해도 248명인데, 대중적으로 알려진 인물은 유관순 열사가 거의 유일한 셈이다. 심 소장은 그 이유에 대해 "첫째는 사료 부족이고 둘째는 여성유공자를 발굴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고, 셋째는 별반 돈이 안 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여성 독립운동가는 '수동적 역할' 머무르지 않아

▲ 영화 '암살' 스틸컷 여성독립운동가들이 단지 조력자 역할에 머물렀으리라는 기존의 예상은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
ⓒ 쇼박스
심 소장을 '여성 독립운동 연구'의 길로 들어서게 한 윤희순 의사. 부끄럽게도 우리는 잘 모른다. 심 소장에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윤희순 의사(1860~1935)는 경기도 파주 출신으로 16세에 고흥 유씨 집안의 유제원과 결혼하면서 강원도 춘천으로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친정과 시댁은 모두 대대로 유학자 집안이었지요.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무사에 의해 시해당한 '을미사변' 후 시아버지인 유홍석이 의병을 일으키면서 집안이 의병 투쟁에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

윤희순 의사는 적극적으로 의병을 돕기 위해 '안사람 의병가'를 지어 여성들의 독립운동을 독려했다. '안사람 의병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무리 왜놈들이 강성한들 우리들도 뭉치면 왜놈 잡기 쉬울세라/아무리 여자인들 나라 사랑 모를쏘냐/ 아무리 남녀가 유별한들 나라 없이 소용 있나/ 우리도 나가 의병 하러 나가보세의병대를 도와주세/ 금수에게 붙잡히면 왜놈 통치 받들쏘냐/우리 의병 도와주세/ 우리나라 성공하면 우리나라 만세로다/우리 안사람 만만세로다."

한편 시아버지 유홍석은 을미의병이 해산한 후, 잠시 의병 활동은 멈추었다가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 후 본격적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이에 의사는 시아버지를 돕기 위해 지역 여성 30여 명으로 구성된 여성의병을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으고 화약과 탄약도 만들어 지원했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가족이 모두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 투쟁을 계속했다.

시아버지와 남편이 먼저 중국으로 떠나고 의사는 가산을 정리하여 떠나려 했는데, 마침 일본 경찰이 들이닥쳐 시아버지 유홍석의 행방을 물었다. 의사가 모른다고 하자 어린 아들을 매질했다. 의사는 "자식을 죽이고 내가 죽을지언정 말할 수 없다"며 끝내 거절한 일화로 유명하다. 보통의 어머니라면 감당하기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후 시아버지가 있는 중국 환인현으로 이주하여 논을 개발하여 벼농사를 짓고 군자금을 모집했다.

그리고 항일 인재를 양성하는 학교인 노학당(勞學堂)을 창설하여 교장으로 취임해 교육 운동과 군자금 모금 운동을 계속했다. 두 아들은 독립운동단체에 가입시켰다.

"윤희순 의사는 79세로 사망할 때까지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쳤습니다. 집안의 시아버지, 남편, 아들도 독립운동을 했고, 손자분이 얼마 전에 작고한 광복회 강원도지부장이었어요. 집안의 4대가 독립운동의 맥을 이어오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분입니다. 이 부분을 연구하면서 여성 독립운동가가 과연 조력자에 불과했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단지 수동적인 역할에 머물렀으리라는 기존의 추측은 실제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이죠."

1920년 8월 당시 34살 임신한 몸으로 평남도청에 폭탄을 던진 안경신 의사, 미국과 조선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하고, 2.8독립 선언에 참가했던 김마리아 선생도 적극적인 독립운동가였다. 특히 김마리아 선생은 고문하던 일제 검사가 탄복할 정도로 의지가 강했다. '김마리아 같은 여성이 열 명만 있었어도 한국은 독립이 되었을 것'이라는 안창호 선생의 말로 그의 항일정신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전반적인 여정을 살펴보면 곳곳에 여성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수동적인 역할에 머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적지 않습니다. 하와이에서 고된 노동에 종사하면서도 독립자금을 상해 임시정부로 보냈던 많은 여성들, 많은 여성단체들이 그동안 제대로 조명이 안 되었습니다."

심 소장은 "독립운동사는 남녀의 경계를 넘은 전반적인 역사였음을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증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마지막까지 강조했다.
○ 편집ㅣ박정훈 기자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매거진 피플안전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이 기사를 응원하는 방법!
☞ 자발적 유료 구독 [10만인클럽]

모바일로 즐기는 오마이뉴스!
☞ 모바일 앱 [아이폰] [안드로이드]
☞ 공식 SNS [페이스북] [트위터]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