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소변의 추억

한국일보 2015. 8. 11.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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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학 신입생이었고, 세상은 시끄러웠다. DJ가 미국 망명으로부터 돌아와 첫 연설회를 연다고 했을 때, 그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는 높았다. 우리와 함께 군사독재를 갈아 마셔 줄 정치지도자에 대한 열망, 먼 곳으로부터 강림한 자의 아우라,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와 접전을 벌일 때 보여주었던 화려한 연설 능력에 대한 전설. 그래서 사람들은 연설회장인 흥사단으로 모여들었다. 지금은 여당의 정치지망생이 된 고등학교 동기, 그리고 사람 많은 곳을 즐기지 않던 나도 그날 흥사단 건물에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연설회장에 들어가지 못했다. 사람이 깔려 죽을듯한 그 아수라장.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몰려왔기 때문에 두어 시간 전에 미리 와 있던 사람들 말고는 연설장소로 전혀 접근할 수 없었다. 그 틈바구니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사람들 속에서 신음한지 한참 만에, 나는 입장을 포기했다.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고, 소변을 보기 위해 건물 초입의 화장실에 들어갔다.

故 김대중(가운데) 전대통령이 미국 망명에서 돌아온 직후인 1985년 10월 12일 동교동에서 김영삼(오른쪽) 전대통령, 이민우 전 신민당 총재와 회동을 갖고 기념촬영한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기름이 끓는 것 같은 연설장 주변과는 달리, 화장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구타가 끝난 연병장 구석처럼 고요하였다. 일을 보려는데 문이 끼익 열리고 누군가 홀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DJ였다. 오, 그는 생각보다 정말 작은 사람이었다. 나는 특별한 인사 같은 것을 할 염두가 없었고, DJ 역시 약간의 미소만 띠었을 뿐이었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말없이 오줌을 누었다. 내가 다니던 시절의 고교생들은, 나란히 오줌을 눌 때면 누구 물건이 더 큰가 힐끔거리기도 하고, 누구의 오줌발이 더 높이 치솟나 경쟁하기도 하였지만, DJ와 나는 모두 점잖은 사람들이었기에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침묵 속에 용변을 끝낸 두 사람은 각기 자기 갈 길을 갔다.

흥사단의 화장실을 빠져 나온 나는 학생이라는 이름의 미세먼지로 긴 시간을 살아갔다. 이미 인생을 제법 허송했으나 끈기 있게 계속 허송했고, 다음 세대의 지분을 끌어 쓰고 있는 줄도 모르는 채 결국 다가온 중장년을 향하여 번지점프를 했다. 한편, 흥사단 화장실에서 용변을 마친 DJ 역시 정치인으로서 긴 시간을 살아갔다. 그는 흥사단에서의 귀국 연설 이후 민주화를 향한 사람들의 열정을 조직하는 데 성공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는 1987년 대선에서 단일화에 실패했다. 그리고 1992년 대선 개표가 끝난 뒤 정계은퇴를 발표하던 그의 우울한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것은 어쩌면 당시 발표대로 정치역정의 끝일 수도 있었겠지만, DJ는 예상했던 것보다 정치인으로 훨씬 더 오랜 시간을 살았다. 마치 유배지처럼 보이던 영국에서 돌아온 그는 결국 원하던 대통령이 되었고, 나중에는 노벨평화상도 받았다. 매년 연례행사처럼 노벨문학상을 수상 여부를 두고 이 땅의 사람들이 벌이는 법석을 감안하면, 그 수상은 아마도 정치 역정의 화려한 정점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그 이후로도 또 긴 시간을 정치인으로서 살았다. 결국 자살로 마감한 후임 대통령의 장례식장. 그 뙤약볕 아래서 미망인의 손을 잡고 오열하였고, 끝내 그가 이 땅의 더 밝은 정치적 미래를 보지 못한 채로 망명보다 더 먼 길을 떠난 지, 이제 다가오는 화요일로 6주기다.

이는 곧 DJ가 한국정치사의 시간 속에서 민주주의의 쟁취라는 내러티브 안에 가두어지지 않는, 생각보다 긴 정치 역정을 누렸음을 의미한다. 그가 가장 큰 현실 권력을 쥐고 있었을 때는, IMF 구제 금융을 계기로, 민주화 이후의 새로운 사회상이 태동하던 시기였다. 즉 그가 실제로 정권을 잡았을 때, 그는 원하든 원치 않든 IMF 이후의 한국사회라는 새로운 비전을 제기하고 건설해야 하는 첫 주자였던 것이다. 마치 오늘날 그리스가 그러하듯이. 이것은 곧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DJ에 대한 해석이 아직 미완(未完)이라는 뜻이다. 민주화 이후에 무엇이 와야 하는지, 민주화란 더 깊은 그 어떤 흐름의 일부였는지, 그는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생각했던 것일까.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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