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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기획 - 7대 폐습 이젠 결별하자]독재 정권의 '국가=나' 집단세뇌.. 개인·노동·인권은 뒷전이었다

심진용·김지원·배장현 기자 입력 2015. 08. 19. 22:34 수정 2015. 08. 24.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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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넘어서야 할 '국가주의'월드컵·김연아에 열광도 잠시.. 젊은 세대에겐 '희망 못주는 나라'

▲ 춘원 이광수 ‘국가 힘’ 주창

‘조국 근대화’ 명분 삼은

박정희 정권이 본격 추진

‘일제 모델’ 국가주의 강제

▲ 선수와 나라를 동일시

응원으로 애국주의 표출

세월호·메르스에 ‘헬조선’

뿌리 깊은 국가주의 균열

지난 3일 일본에 머물던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취재진 앞에 허리를 숙인 신 회장은 “롯데는 일본 기업인가”라는 질문에 “롯데는 한국 기업”이라고 답했다. 그의 한국어 발음은 어눌했다. 일본어는 한마디도 섞지 않았지만 억양에서 드러나는 일본어 색깔은 지울 수 없었다.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무슨 한국 기업 운운하냐”는 반응이 돌아왔다. 사람들은 롯데그룹의 난마처럼 얽힌 제왕적 지배구조, 전근대적 혈족 승계보다 오너가 어느 나라 말을 사용하는지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2012년 9월, 가수 싸이는 ‘강남스타일’로 돌풍을 일으킨 뒤 미국 뉴욕 록펠러센터 광장에서 NBC방송의 <투데이쇼>에 출연했다. 진행자가 “한국에서는 ‘강남스타일’의 인기를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다. 싸이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면서 유창한 영어로 양해를 구하고는 한국말로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방송을 지켜본 한국 국민은 열광했다. 한국 언론은 “싸이가 뉴욕도 점령했다”고 보도했다. ‘싸이=국가=국민=나’라는 등식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다.

■ 히틀러를 예찬한 춘원 이광수

한국의 국가주의 기원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춘원 이광수(사진)가 그 기초를 닦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나라 잃은 울분을 삼키던 그의 붓은 ‘국가의 힘’에 집착했다. 1910년 쓴 논설 ‘나(余)의 자각한 인생’에선 “국가의 생명과 나의 생명과는 그 운명을 같이하는 줄을 깨달았노라”고 했고, 1932년 장편소설 <흙>에선 주인공의 입을 빌려 “차라리 이태리의 파시스트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히틀러를 예찬하고 <나의 투쟁>을 번역했다.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반공국가’는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는 성역이 됐다. 이승만 정부에서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을 맡았던 이범석은 1949년 한 연설에서 “오늘의 조선은 나치스 같은 정치체제가 아니면 도저히 구해낼 길이 없다”고 했다. 초대 문교부 장관 안호상은 “우리나라 같은 데 있어서는 개인주의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전체를 멸망시킬 것”이기 때문에 “개인주의 교육은 절대로 배척”해야 한다고 했다. 이승만 정권이 1949년 발족한 학도호국단은 “히틀러 유겐트와 같다”는 비난을 들었다.

재건체조로…1962년 시골의 한 운동장에서 어린이들이 국가주의 관철의 일환인 재건체조를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박정희 ‘국가주의 프로젝트’ 작동

국가주의가 뚜렷한 방향타를 잡고 전진하기 시작한 건 박정희 정권 들어서다. 국가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고 구성원 모두가 국가의 힘을 키우는 데 매진해야 한다는 이광수의 생각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뒤 부활한다. 박정희의 친필 메모 ‘나의 소년 시절’에는 이광수의 정신적 영향이 묻어 있다. 그는 이 글에서 “보통학교 시절에는 일본인 교육으로 일본 역사에 나오는 위인들을 좋아했고, 5학년 때는 춘원이 쓴 책을 읽고 이순신을 숭배하게 되었다”고 했다.

박정희는 ‘조국 근대화’를 내세우며 국가주의를 밀어붙였다. “잘살기 위해 스스로의 자유를 제한하자” “부질없는 유언비어는 국가안보를 해친다”는 문구가 거리를 장식했다. 베트남 파병 군인과 기술자, 파독 광부와 간호사는 ‘산업전사’로 불렸다. 기지촌 성매매 여성은 달러를 벌어들이는 애국자로 호명됐다. “여러분은 애국자입니다. 용기와 긍지를 갖고 달러 획득에 기여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저는 여러분과 같은 숨은 애국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미국 군인들이 우리나라를 도우려고 왔으니 그 앞에서 옷도 단정히 입고 그 저속하고 쌍스러운 말은 좀 쓰지 마세요.” 여성운동가 김연자씨는 1970년대 기지촌 여성을 대상으로 한 교양강좌의 풍경을 이렇게 회고했다.

민족의식으로 무장해 근대화를 추진하자는 박정희의 메시지는 당대 지식인들까지 사로잡았다. 소설가 김승옥은 박정희와 윤보선이 맞붙은 1963년의 제5대 대통령 선거를 회고하며 “나는 박정희에게 투표했다. 민주적 세력들이 어쩐지 미국 원조물자나 가지고 나눠먹고 사는 똘마니구나 싶은 느낌밖에 안 들었다”면서 “그 사람들보다는 차라리 촌티 나는 박정희의 민족주의가 낫겠다, 그래서 나는 정말 박정희한테 표를 찍었다”고 고백했다.

웅변대회로…1985년 9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제4회 사회정화운동 웅변대회가 열리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열등감에서 자부심으로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시절 일본 제국주의의 총력전 체제를 경험했고, 효과적으로 국가주의를 관철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일제 교육칙어를 차용한 국민교육헌장이나 황국신민서사에서 따온 ‘국기에 대한 맹세’가 대표적인 사례다. 만주국 시절 일제가 열성적으로 행했던 추도식과 위령제, 충혼탑 광장 건설은 박정희 정권 때 그대로 반복됐다. 1960~1970년대 이어졌던 반공대회와 멸공대회, 재건체조, 표어 짓기, 웅변대회 등도 만주국 시절의 경험을 모델로 했다.

1966년 6월22일 충남 당진군에 산다는 한 신문 독자의 투고를 보자. 그는 “우리나라는 반공을 국시로 하는 나라이므로 어디를 가나 반공방첩 표어와 플래카드를 흔히 볼 수 있다”면서 “열성 띤 반공활동이므로 국민 누구나 잘못된 행위라고 말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썼다. 이어 “그러나 어떤 것은 국민계몽 표어로는 어딘지 잘못된 것같이 느끼게 하는 것이 있다”며 “ ‘간첩 신고하면 20만원 상금 탄다’라고 하는데 국민으로서 간첩을 발견, 신고하는 것은 국가에 대한 충성 및 애국 및 의무의 하나이고 상금은 보상에 불과하다”고 했다.

“우리 마을에는 어제부터 전기가 들어왔습니다. 정부에서 전기 없는 마을에 전기를 보내주기 위해 힘쓰고 있기 때문에 우리 마을에도 전깃불을 켤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는 밝은 전깃불 밑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어 무척 기뻤습니다. 그리고 나라에 대하여 한층 더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9년 국민학교(초등학교) 3학년 도덕 교과서의 한 대목이다.

1972년 유신 이후 박정희는 한층 강력하게 국가주의 드라이브를 걸었다. 역사문제연구소 이상록 연구원은 “유신을 기점으로 박정희가 내세우는 역사관 자체가 달라졌다”고 했다. 유신 이전 박정희는 <우리 민족이 나갈 길> 등의 책에서 한국의 역사를 “집어던져야 할 역사, 사대와 당파와 굴욕의 역사”로 정의했다. 그러나 경제개발 계획이 성공하고 유신체제가 들어선 이후 박정희는 “숱한 수난과 국난을 극복한 역사”로 재정의했다. 국가주의는 열등감이 아닌 자부심을 밑자락에 깐 새로운 형태로 진화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나붙은 포스터.

■ ‘아! 대한민국’과 상계동 판잣집

1980년 군사독재 2기인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국가주의적 정조는 이어졌다. “하늘엔 조각구름 떠 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 있고,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 1983년, 정수라의 노래 ‘아! 대한민국’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이듬해 TV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5주 연속 1위를 차지했고, 음반은 40만장 이상 팔려나갔다. 자신감 넘치던 당대 한국의 분위기가 이 노래 가사에 담겼다. 3저(저유가·저금리·저달러) 호재로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란 말이 나오고,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까지 성공적으로 치러내면서 이런 분위기는 더 강화됐다.

반대편에선 관제 국가주의 캠페인에 대한 비판이 거셌다.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서울 상계동 등의 판잣집들은 도시 미관을 해친다며 철거되고 서민들은 변두리로 밀려났다. 사람들은 ‘누구를 위한 국가인가’라고 물었다. 그러나 정권에 대항하는 이들조차 국가주의의 자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정권 비판에 앞장선 학생들은 스스로를 ‘애국학생’ ‘구국학생’이라 칭했고, 운동권 내부의 관계는 위계적이었다.

전두환 정권에 저항하다 고려대 총장 자리에서 쫓겨난 김준엽은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재확인하면서 선진국 문턱에 서게 된 문화민족으로서의 자신감을 만끽하면서 온 겨레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며 “전두환씨가 이룩한 공로는 물가안정과 올림픽의 유치일 것이다. 독재자로서 많은 죄도 있지만 공로도 있었다는 것을 나는 솔직하게 인정한다”고 했다. 당시 야당 지도자 김영삼은 학생들에게 서울올림픽 기간 중에는 시위를 자제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임지현 서강대 교수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군사정권에 대항해 민주화운동을 한다는 사람들도 자신들이 맞서 싸우고 있는 국가조직이 타당하냐고는 한번도 물어보지 않았다”며 “우리가 권력을 장악하고 정권을 차지하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고 지적했다.

누구를 위한…올림픽을 앞둔 1986년 서울 상계동에서 판자촌 철거작업이 진행되자 주민들이 항의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스포츠 애국주의 영웅들

1993년 김영삼 정권 출범 이후 불어닥친 세계화 열풍도 국가주의의 맥락에서 소비됐다. 1990년대 중반부터 해외에서 활약하는 스포츠 선수들에게 열광하는 현상도 두드러졌다.

1998년 외환위기로 큰 고통을 겪던 국민들 사이에선 “박찬호·박세리를 보며 희망을 얻었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박찬호·박세리는 한 사람의 스포츠 선수가 아니라 나라 전체와 동일시됐고, 나라는 다시 국민 개개인과 동일시됐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은 스포츠 애국주의의 정점을 이뤘다. ‘대한민국’ 국호가 응원 구호로 사용되고, ‘강력했던 고대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치우천왕’ 가면이 등장하기도 했다.

박찬호·박세리의 자리는 김연아와 박태환 등이 이어받았다. 2014년 소치올림픽 기간에 한 LPG 업체는 “너는 김연아가 아니다. 너는 1명의 대한민국이다”라는 문구의 방송광고를 내보냈다. 이 광고는 ‘지나치게 국가주의적’이란 여론의 질타에 중단됐다.

지난 3월 프로농구 창원 LG 소속의 외국인 선수 데이본 제퍼슨은 팀에서 퇴출당했다. 제퍼슨은 4강 플레이오프 1차전에 앞서 진행된 국민의례에서 애국가가 나오는데도 집중하지 않고 몸을 풀었다. 이에 비난 여론이 고조됐다. 제퍼슨은 사과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 문화든 어떠한 문화든 무시한 게 아니다”라며 “애국가가 울려퍼질 때 통증을 느껴 스트레칭을 했다”고 해명했지만 다음날 퇴출을 통보받았다.

박찬호·김연아·제퍼슨(왼쪽부터)

■ ‘제퍼슨 파동’과 1980년대

‘제퍼슨 파동’은 1980년대 ‘애국주의’ 풍경의 기시감을 느끼게 한다. 1987년 신문에 실린 칼럼의 한 대목을 읽어보자. “음악회장에서 연주가 시작되기 전 관례에 따라 장내에 애국가가 울리자… 옆자리 손님들이 일어서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기에… 기립을 권했으나 아무 대꾸가 없어… 재차 독촉을 했다. 그때야 ‘종교적 관계로 기립할 수가 없습니다’ 하는 말에 얼른 납득이 가지 않아… 국가와 겨레의 상징인 애국가를 부인하고 국가를 부정하는 종교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하고 쏘아붙이다 마침 연주가 시작되어 참고 말았다.”

1987년 어느 음악회장에서 벌어진 에피소드와 2015년 외국인 농구선수의 퇴출 사태는 맥락이 유사하다. 신문 칼럼을 쓴 이가 국가의 절대성을 종교가 부인한다고 느껴 불쾌했다는 것처럼, 2015년 한국인들은 외국인 농구선수가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훼손했다며 분노했다.

한국 사회에서 외국인에 대한 공격과 비난을 목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외국인에 대한 비판은 “한국에 왔으면 한국식으로 살아야지”를 주된 논리로 삼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원 교수는 “2000년대 중반부터 다문화가족 정책이란 게 본격적으로 나타났지만 그 속에 깔려 있는 것은 순혈주의에 바탕을 둔 국가주의”라고 지적했다. 종교·문화 등에 따른 차이를 인정해야 하는데 일방적인 ‘동화주의의 논리’라는 것이다.

월드컵에…2002년 6월 한·일월드컵 한국과 터키가 맞붙은 3·4위전을 응원하기 위해 붉은색 옷을 맞춰 입은 시민들이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몰려들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공존·다양성·사상의 블랙홀

한국은 이주노동자 등 다른 국적, 다른 인종 인구와 공존할 수밖에 없는 사회가 됐다.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국가주의의 논리로는 공동체의 통합도, 진정한 공존도 이루기 어렵다. ‘국익’을 최우선으로 삼고 ‘부국강병’으로 귀결되는 국가주의는 ‘사상의 블랙홀’이다. 국가 이익이 최우선이라는 구호 아래 여성·노동·환경·평화·인권 등 다른 이슈는 부차적인 것이 되고 만다.

2002년 한 편의 에로비디오가 논란의 중심에 자리했다. <태극기를 꽂으며>라는 제목의 비디오는 미군 장갑차에 치여 여중생이 사망한 사건에 항의하는 촛불시위를 접하고 울분을 느낀 한국 청년이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을 위해 당시 부시 미국 대통령의 부인 로라 부시 여사와 주한미군 사령관 부인을 성노예로 만든다는 게 줄거리다. 비디오가 출시되자 영상물등급위원회(영등위)는 “외교관계와 개인 명예를 훼손할 소지가 크다”며 등급 보류 처분했다. 한 누리꾼은 영등위 결정을 비판하며 “한국인의 자존심을 짓밟은 <007: 어나더데이> 같은 영화도 멀쩡하게 개봉되는 판에 에로영화 하나 갖고 그럴 수 있느냐”는 글을 올렸다. 여성에 대한 폭력적 시선을 문제 삼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영등위는 외교관계, 곧 국익을 이야기했고 대중은 민족 자존심을 강조했다. 국익과 민족의 다툼에 여성이나 인권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2002년 7월 광주 망월동묘지는 국립 5·18 묘지로 ‘승격’됐다. 국가에 의해 죽임당하고 고통을 겪은 이들의 가족조차 마지막 순간 국가의 권위를 요구했다. 김원 교수는 “광주항쟁은 신군부에 맞서 시민군 내지 대중이 저항한 것인데 이것조차 대한민국 정통성의 연장선상에서 해석되고 있다”고 말했다. 국가가 광주항쟁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 자체는 의미있는 일이지만, 국가의 절대성에 대한 최소한의 의문도 제대로 공론화되지 못했다.

한류에…가수 싸이가 2013년 1월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 앞에서 열린 새해맞이 행사에서 유명 래퍼 MC해머와 공연하고 있다. | 연합뉴스

■ 지워야 할 ‘우리 안의 국가주의’

최근 들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헬조선’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취업 문제 등으로 갈수록 살기 어려워지는 한국의 현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같은 시기 광복 70주년을 맞아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있는 고층 빌딩마다 대형 태극기가 걸렸다. 오너의 국가 정체성 논란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롯데그룹도 ‘태극기 마케팅’에 앞장섰다. 헬조선을 들먹이며 한숨 쉬는 젊은 세대도 메이저리그 한국인 선수들의 활약상에 열광한다. ‘우리 안의 국가주의’는 이렇게 뿌리 깊다.

게다가 국가주의적 수사는 분쟁 혹은 준분쟁 상태에 있는 이웃 국가와 맥놀이하며 증폭되는 경향이 있다. 2012년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역대 대통령 중 처음으로 독도를 방문하면서 일본의 반한 감정에 불을 지른 것처럼 최근 일본 아베 정권의 극우화는 한국의 민족주의적 감성을 또다시 자극하고 있다.

역사문제연구소 이상록 연구원은 “세월호 침몰 사고나 메르스 사태처럼 나라가 개인을 책임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목격되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주의의 생명력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연구 대상”이라고 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균열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난 4월 세월호 추모집회에서 20대 남성이 태극기를 불태웠다.

이진경 수유너머N 연구원은 “권위에 저항한다는 힙합 가수가 태극기를 몸에 휘감고 무대 위에서 랩을 하던 때가 있었다. 불과 몇 년 전 일”이라며 “태극기를 불태운 것은 그사이 한국 사회가 얼마나 변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말했다. 이 연구원은 “‘헬조선’이라는 말이 나돌 만큼 한국 사회의 현실은 절망적”이라면서 “국가에 대한 실망이 광범위하게 퍼지면서 국가주의를 넘어서는 토대가 마련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반대의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때로 절망은 파시즘의 양분이 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그랬다. 지친 독일 국민들은 나치의 선전과 선동에 쉽게 허물어졌다. 억압된 증오와 공격성은 유태인과 집시 등 약자들에게로 향했다. 이 연구원은 “한국에서 당시 독일의 상황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국가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은 국제적 연대와 함께 열린 시민 교육을 강조한다. 지당하지만 지나치게 추상적인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국가권력의 실체 자체를 의문시할 필요가 있다”는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의 시각은 참고할 만하다. 그는 “학교에서, 직장에서 개인이 당하는 억압은 국가가 아니라 같은 공간에서 대면하는 교사, 선배, 힘센 친구 혹은 상사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후지이 연구실장은 “박정희 시대에 학생들이 국민교육헌장을 외워야 했던 직접적인 이유는 저 멀리 청와대의 대통령이 아니라 같은 교실 내 교사가 외우지 않으면 체벌했기 때문에 외워야 했다”고 했다. 국가주의라는 거대담론을 말하기 전에 일상에서 마주치는 권력의 문제부터 직시하라는 지적이다.

▲ 도움 주신 분들김원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손호철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이상록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이준식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이진경 수유너머N 연구원, 임지현 서강대 사학과 교수, 전우용 한양대 동아시아문제연구소 교수,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정희진 여성학자,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 참고문헌경향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매일경제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역사비평, 2007 / 김원,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 기억, 사건 그리고 정치>, 현실문화연구, 2011 / 후지이 다케시,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족청계의 형성과 몰락을 통해본 해방8년사>, 역사비평, 2012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인물과사상, 2006~2009 / 박노자·허동현, <길들이기와 편가르기를 넘어>, 푸른역사, 2009 / 권혁범, <국민으로부터의 탈퇴>, 삼인, 2004 / 김연자, <아메리카 타운 왕언니 죽기 오분 전까지 악을 쓰다>, 삼인, 2005 / 우석훈, <촌놈들의 제국주의>, 개마고원, 2008 / 서중석, ‘이승만정부 초기의 일민주의’, 1997 / 이하나, ‘1950~60년대 반공주의 담론과 감성 정치’, 2012 / 후지이 다케시, ‘제1공화국의 지배 이데올로기: 반공주의와 그 변용들’, 2008 / 오제연, ‘1960년대 전반 지식인들의 민족주의 모색’, 2011 / 이상록, ‘1970년대 소비억제정책과 소비문화의 일상정치학’, 2013 / 고정갑희, ‘갓길로 밀려난 존재들의 목소리는 어떻게 가능한가? 대한민국 국가주의와 남성주의’, 2003

<심진용·김지원·배장현 기자 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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