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한국사회] 두려워해야 하는 일 / 김희경

입력 2015. 8. 24. 19:00 수정 2015. 8. 24.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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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오늘의 결정은, 결정을 내리는 어른들보다 나에게 더 큰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8년 전 발리 기후변화회의에 참석했던 15살 소녀의 말이다. 어떤 사안이든 아이들과 관련된 일을 다룰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그 일을 결정한 성인보다 더 큰 영향을 받게 될 아이들의 의견을 듣는 것임을 잊지 않으려고 책상 옆에 붙여두었다.

재난이 발생할 때 구호단체 역할의 최우선순위는 긴급한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인데, 내가 일하는 단체가 빠뜨릴 수 없는 또 하나의 과제는 재난을 겪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다. 시리아와 남수단의 분쟁 때도, 태풍 하이옌이 덮친 필리핀, 대지진이 일어난 네팔에서도 우리 스태프들은 쑥대밭이 된 마을을 돌며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고서를 썼다.

아이들에게 뭐가 필요한지 빤히 짐작할 수 있지 않으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불필요해 보일지도 모르는 이 과정을 생략하지 않는 이유는, 아이들이 재난에 가장 취약한 존재인데도 정작 그들의 필요와 시각은 간과되어 왔기 때문이다.

보통의 인도적 지원 활동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리지만 아이들에게는 집, 밥만큼이나 긴급한 교육의 중요성이 그 한 예다. 남수단의 12살 소녀는 "일찍 결혼하라는 강요를 받지 않아도 되는 학교가 집보다 안전하다"고 말했다. 남수단 보르 지역의 한 학생은 교복을 "안전복"이라고 불렀다. 학생인 줄을 모두가 알아보므로 납치와 강제징집의 위험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난상황의 아이들에게 교육은 그냥 '공부'가 아닌 거다.

아이들은 재난의 최대 피해자이지만 무력한 희생자만은 아니다. 성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문제를 짚어내고 해결방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필리핀에서 태풍 하이옌이 덮친 지 6주 뒤에 가진 모임에서 아이들은 구호활동가들에게 구호품에 집수리 도구를 넣고, 옷의 사이즈를 분류해서 배분하고, 구호물품을 나눠줄 때 어른과 아이의 줄을 분리하는 게 좋겠다고 제안하는 등 지원의 적절성을 파악하는 능력과 눈썰미를 보여주었다. 네팔에선 대지진 이후 "부자와 노숙자가 똑같이 천막에서 살고" "엄마가 이웃과 싸움을 멈추고 서로 돕기 시작하는" 상황이 기쁘다는 아이들도 있었다. 리베카 솔닛이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서술한 대로 평소의 질서가 모두 파괴되는 대재난 속에서 때로 공동체적 감각이 피어나고 비극과 동시에 관대함이 표출되는 '재난 유토피아'적 상황을 아이들도 체감하는 것이다.

하지만 2010년 아이티 대지진 이후 5년간 우리 단체가 거의 모든 재난지역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펴낸 숱한 보고서 중 함께 겪는 고통을 통해 아이들이 성장하는 상황, 슬픔 속에서도 희미한 기쁨이나마 발견하는 경험을 단 한 줄도 발견하지 못한 상황이 분쟁이다. 증오의 폭력에 의해 가족과 지역사회 전체가 뿌리뽑히는 경험을 한 시리아, 남수단, 가자지구 등 분쟁지역 아이들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공포에 떨면서 하루하루가 무섭다고 호소한다. 고통의 등가비교는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아이들에겐 분쟁 상황에서 받는 고통만큼 지독하고 긴 형벌도 없다.

전쟁의 위협이 어른거리던 최근 며칠, 내가 체감한 위험도는 크지 않았지만 오가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분쟁지역 아이들의 비명이 간간이 떠올랐다. 서두에 인용한 말마따나 전쟁은 그 시작을 결정하는 성인보다 속수무책으로 혼란과 공포를 감당해야 하는 아이들의 평생에 더 큰 영향을 끼친다. 지상파 뉴스 앵커가 전쟁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했다지만 전쟁은 두려워해야 하는 일이다. 현실화하지 않더라도 불안한 기운부터가 아이들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공포 가운데 하나다. 분쟁지역 아이들의 공포를 절대로 이 땅에서 목격하고 싶지 않다.

김희경 세이브더칠드런 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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