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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 가치 모르는 한국문화 죽었다" .. 호산방 32년 만에 폐업

정재숙 입력 2015. 09. 11. 01:21 수정 2015. 09. 11.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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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 대표 종로 고서점 간판 내려"옛날엔 집문서 잡히고 사갔는데 지금은 전공자료 보고도 욕심 안내"'삼례 책마을' 조성 새 희망 꿈꿔
고서점 ‘호산방’의 정신을 지켜온 박대헌 대표는 서울 종로 3가 창덕궁 건너편에 내걸었던 7번째 간판을 11일 자진해 내린다. 그는 “고서의 가치를 모르고 대접하지 않는 시대에 문화는 죽었다”고 선언했다.

텅 비어가는 사무실 한 쪽에서 고서(古書)를 포장하던 박대헌(62) ‘호산방’ 대표는 “책을 염하는 중”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1983년 서울 장안평 고미술상가에 고서점 ‘호산방(壺山房)’을 낸 지 32년 만에 자진 폐업해야 하는 씁쓸함에 목이 멘다. 고서점계에서 안목 있고 실력 좋기로 손꼽히던 호산방이 11일 서울 종로 창덕궁 앞 가게 문을 닫는다. 정가표가 붙은 도서목록 을 발행하고 온라인 서점을 앞장서 열며 고서점계의 혁신을 이끌던 호산방이 사라진다는 소식에 북디자이너 정병규, 이기웅 열화당 대표 등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장안평 시절을 거쳐 서울 광화문, 강원도 영월, 서울 프레스센터, 파주 출판도시, 서울 경운동을 거쳐 종로에 7번째 터를 잡았던 고서점의 명가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일본이나 중국에는 큰 도시마다 고서점 거리가 날로 번창하고 문화의 중심지가 됩니다. 한국은 어떤가요. 고서점의 전통이 빛나던 서울 인사동은 싸구려 공예품 가게와 음식점 천지가 됐어요. 고서를 제대로 대접하지 않는 한국 문화는 죽었다고 나는 감히 선언합니다.”

 박대헌씨는 일찌감치 고등학교 시절부터 고서의 세계에 빠져 평생 책에 둘러싸여 살고 싶은 꿈을 고서점 주인으로 실현했다. 고서 수집에 인생을 걸었던 그가 피땀 어린 삶의 터전을 접는 이유는 무엇일까.

 “10여 년 전만 해도 대학 교수들이나 연구자들이 월급을 털어 고서를 샀어요. 지금은 제 전공 분야에 중요한 자료를 보고도 욕심을 안 내요. 옛날에는 집문서를 잡히고도 원하는 책은 꼭 손에 넣으려고 경쟁을 했는데.”

 박 대표는 고서의 정의를 “50년이나 100년 뒤에도 고서점에서 팔리는 책”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 서점에 나가봐라, 100년 뒤에 살아남을 책이 과연 몇 권이나 되는가”라고 되물었다. 일본에서는 훌륭한 고서점을 대학에 맞먹는 연구의 보고라고 평가한다는 얘기 끝에 그는 “우리나라에 과연 그만한 자격을 갖춘 고서점이 있는지 한숨부터 나온다”고 했다.

 그는 최근 경매에 나온 다산 정약용의 ‘하피첩’을 예로 들었다. “1810년 다산이 유배지로 부인이 보내준 치마폭에 쓴 그 아름다운 글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 빛을 발하며 200여 년을 유전해 새 주인을 찾고 있다. 이것이 고서의 힘이다. ‘하피첩’이 이제는 개인 손이 아닌 국민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 고서의 공공성이라고 믿는다. 뜻있는 이들이 모금운동을 벌여서라도 실학박물관이나 공공박물관에 들어갔으면 하고 빌고 있다.”

 2013년부터 전북 완주 삼례읍에 조성된 책마을에 자문을 해주며 새 희망을 쏟아 붓고 있는 그는 “삼례 책마을이 언젠가는 완주군민을 먹여 살릴 거라는 생각으로 일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세대에는 빛을 보기 어렵겠지만 젊은이들, 어린 세대에게 고서를 중심으로 한 책의 힘이 지역문화의 빛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글·사진=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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