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 친일기업 두산, 창업주 박승직은 위안부 모집 단체 참여

문형구 기자 입력 2015. 10. 10. 09:23 수정 2015. 10. 14.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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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박승직 도와주라”… 제정축하회 발기인으로 참여, “지원병 제도는 내선일체의 구현”

[미디어오늘 문형구 기자]

신동빈-신동주 형제간 경영권 분쟁으로 롯데그룹의 역사가 속속들이 드러나며 친일기업 논란에 휩싸였지만, 한국의 원조 친일기업은 두산그룹이다. 친일인명사전과 여러 독립운동사 자료엔 두산 그룹 창업주 박승직과 관련한 내용들이 나온다.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저격으로 사망했을 때, 창업주 박승직은 이등박문을 추도하는 ‘국민대추도회’의 발기인(총 41명) 및 위원(총 100명)으로 참여했다. 이 국민대추도회는 한성부민회가 주최하고 각 단체가 연합하여 추진한 것으로, 한성부민회는 1907년 10월 일본 황태자의 ‘한국시찰’을 환영하는 반관반민(半官半民)의 비상설단체인 ‘대일본(제국)황태자봉영한성부민회’를 모체로 조직되었고 이듬해 유길준이 주도해 한성부민회로 재조직되었다고 기록돼 있다.(이용창,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참조). 

박승직의 친일행적은 일제 치하 내내 계속되었는데 1919엔 박영효, 최진 등이 만든 친일단체인 조선경제회 이사로 참여하였고 1922년엔 조선실업구락부 발기인으로 참여해 평의회 임원 등을 지냈다. 조선실업구락부는 1920년 유력 경제인들이 친목도모와 일선융화(日鮮融和)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였다. 박승직은 또한 1924년 4월 반일운동 배척과 일선융화를 표방하던 친일단체 동민회(同民會)의 평의원에 선임되었다고 친일인명사전은 기록하고 있다. 

1938년 1월 1일 신년을 맞이해 매일신보가 마련한 ‘조선인의 진로와 각오’라는 주제의 좌담회에서 박승직은 “중일전쟁의 책임은 전적으로 중국에 있음을 강조하는 한편 조선인들이 보여준 거국일치의 ‘애국정신’에 찬사를 보냈다. 이어 조선통치에 있어 조선총독부의 시정(施政)이 적절하므로 개선이 전혀 필요없음을 강조했다”고 되어 있다. 

 
 
▲ 1936년 연지동 자택에서 매헌 박승직 가족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자유경제원 갤러리
 

박승직은 같은 해 2월 조선지원병 제도 제정축하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박승직은 매일신보에 지원병 제도 실시를 축하하는 담화를 통해 ‘지원병 제도 실시는 내선일체의 구현이며, 조선인도 제국 신민으로서 의무와 권리를 갖추게 되었다’며 환영했다. 

친일인명사전은 박승직이 같은 해 8월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평의원에 선임되었고, 국민정신 총동원 경성부연맹 상담역을 맡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은 1938년 총동부의 종용 하에 동아일보 김성수, 조선일보 방응모, 이화여대의 김활란 등이 결성한 전시동원 선전조직으로 이듬해에 공표된 국민징용령에 맞춰 조선인 강제징용과 위안부 모집 등에 앞장섰다. 박승직은 이 조직이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확대개편된 뒤인 1940년 10월에도 평의원을 맡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1941년 12월엔 경성부 총력과를 직접 방문해 해군 국방헌금으로 1만원을 헌납했고 1943년에도 두차례에 걸쳐 방공감시대 위문금과 국방헌금을 헌납했다. 

박승직, 공산주의 운동을 지원?

이미 1900년대 초반 박승직은 이미 조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업인 중 하나였음을 여러 기록에 의해 알 수 있다. 박승직은 1900년 성진 감리서 주사, 1906년엔 중추원 의관(정3품)에 승서되었으며 1905년엔  경성상업회의소 발기인이자 의원으로 참여하였다.  

박승직은 그래서 일제의 국권침탈이 진행 중이던 시기에 일본 상인들과의 경쟁관계에 있었던 것도 사실인 듯 하다. 김동운의 ‘박승직 상점’ 등에 따르면 1906년 일본의 대형 방적회사들(大阪, 三重, 岡山)이 결성한 미에이조합(三榮組合)에 맞서서 박승직 등 조선인 포목상 88명이 창신사라는 합명회사를 설립, 일본 후지(富士)가스방적회사의 제품을 수입했으나 이는 잘 되지 않았다. 1907년 창신사를 탈퇴하고 공익사(共益社)라는 합명회사로 방향을 전환하던 즈음은, 박승직이 매판상인으로 확고하게 방향을 잡은 시기로 볼 수 있다. 공익사는 이후 일본 대기업인 이토추상사의 만주진출을 위한 토대가 되는데, 공익사 설립 즈음 통감 이토히로부미는 제일은행 일본인 지점장에게 ‘박승직을 도와주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역사학자 윤해동은 ‘근대역사학의 황혼’이라는 저서에서 흥미로운 일화를 소개한다. 2000년대 들어 친일인명사전이 편찬될 당시 원경이라는 스님(본명 박병삼)이 박승직이 자신의 부친인 박헌영의 공산주의 운동을 은밀하게 지원했으며, 이에 박승직을 친일인명사전에 게재하지 말아달라고 청원했다는 것이다. 이 증언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는 박승직이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식을 가지고서 식민지의 공산주의운동에 자금 지원을 한 것”이라기보다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진 박승직의 ‘미래를 위한 투자’였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박승직의 가계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은 이인기다. 박승직의 딸 박영희와 결혼한 이인기의 부친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이우정(1880~1956)이며, 이인기 그 자신도 친일인명사전 등재 인물이다. 

박승직의 사위 이인기, 친일 후 국민교육헌장 제정에 앞장

 
 
▲ 왼쪽은 1934년 당시 2층으로 증축해 새로 단장한 박승직 상점의 1층 소매부 모습. 오른쪽은 조선은행 재직시절 박두병 두산 그룹 회장. 사진=자유경제원 갤러리
 

친일인명사전에 의하면 이인기는 1939년 교직을 그만두고 만주국 젠다오성(간도:間島) 민생청 시학관으로 들어갔으며, 1940년 11월 건국신묘창건기념장을 하사받았다. 1941년엔 황도사상 전파 등을 목적으로 하는 친일단체인 흥아청년구락부에 참여하였고 1942년엔 젠다오성 민생청 민생과장과 노무과장을, 1943년엔 안둥성 이사관을 맡았다. 일제 패망 후엔 서울대 상과대학 학장, 1969년엔 숙명여대 총장, 1974년엔 영남대 총장 등을 지냈다. 그는 1968년 서울대 대학원 원장 재직 당시 서울대 철학과 박종홍 교수와 함께 국민교육헌장 제정을 주도했다. 박정희 정권의 국민교육헌장이 메이지유신 당시 일본 천황의 ‘교육칙어’를 본 따 만든 것임은 잘 알려져있다. 

박영희의 부친 박승직이 일제로부터 촉망받는 기업이었고, 이인기의 부친 이우정이 다이쇼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1915년)과 쇼와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1928년) 등을 하사받은 판사였다는 점에서 이들 두 가문의 결합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두산의 2세대 경영 시기에 이인기와의 혼맥은 두산그룹 성장에 비옥한 토양을 제공한 것으로 추측된다.   

2세대 박두병(1910~1973) 회장이 경영에 참여한 것은 1940년대다. 박두병은 1932년~6년 조선은행에서 일하며 장기영(경제기획원 장관 역임), 구용서(한국은행 총재 역임), 백두진(국회의장 역임), 김영찬(상공부 장관 역임)등과 교분을 맺고 1941년에 박두병은 소화기린맥주(훗날 동양맥주) 대리점을 개설한다. 1945년 미군정청으로부터 소화기린맥주 관리지배인으로 임명받은 박두병은 1948년 동양맥주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했는데, OB라는 상표를 사용하기 시작한 게 이 때다. 박승직 회장의 사망(1950년) 후인 1952년 박두병은 동양맥주 민간불하에서 단독 응찰해 대지 1만8천여평과 57건의 건물, 주식 5만9540주 등을 인수한다. 

박두병 회장과 이후 3세 경영(박용곤, 박용성, 박용현, 박용만)에서 두산은 순조롭게 발전했다. 1948년 두산상회(두산산업의 전신) 설립과 동양맥주 불하에 이어 1960년 동산토건 설립, 1961년 풍국화학공업 인수(한국맥아공업), 1963년 대관농산 설립, 1967년 윤한공업 설립, 1969년 한국병유리(농어촌개발공사, 한국유리공업, 동양맥주 3자 합작) 설립 등 동양맥주는 수직 계열화를 진전시켜 나갔다. 동시에 1955년 금감융단 인수, 1956년 청량음료사업 진출, 1960년 합동통신, 1966년 한양식품, 1973년 한양투자금융, 1974년 한국OAK주식회사(미국의 OAK와 합작) 설립 등 사업도 다각화했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인 두산은 창업 100주년을 맞은 1996년(김동운에 의하면 실제 박승직 상점은 1882년에 시작되었으며 따라서 1996년은 창업 114주년이다) 이후 대규모 사업구조 개편에 나섰다. 외환위기 당시 매물로 나온 우량기업들을 저가에 인수하며 두산은 기존 주력기업들을 처분하고 자본재 산업을 중심으로 그룹체계를 전환한다. 2000년 한국중공업(두산중공업) 인수를 위해 두산은 그동안 그룹의 주력이자 상징이었던 OB맥주를 벨기에 인터브루에 매각하기도 했다. 2001년엔 두산테크팩과 아이케이엔터프라이즈를 흡수 합병했고, 2002년엔 대한주류, 2005년 대우종합기계(두산인프라코어), 2007년  중국 연대유화기계, 잉거솔랜드의 콤팩트 이큅먼트(Compact Equipment), 2008년엔 건설중장비업체인 노르웨이 목시(Moxy)사를 인수했다. 2008년엔 중앙대학교를 인수해 박용성이 이사장을 맡는다. 

형제의 난 끝에 박용오 전 회장 자살

 
 
 
 

이렇듯 순탄한 발전과 변화에 대한 적응 능력을 보여 온 두산그룹은 2009년 박두병 전 회장의 둘째 아들이었던 박용오 전 회장이 ‘형제의 난’ 끝에 자살하는 비극을 맞는다. 박두병 회장이 사망 이후 두산은 3세대간 형제 공동경영이 이뤄졌는데, 장남 박용곤이 1981년부터, 박용오가 1998년부터 두산그룹 회장직을 수행한다. 그러나 박용성이 2005년 그룹 회장직을 이어받을 당시 박용오는 이에 반발하며 그룹사의 1,700억대 비자금 조성 건을 폭로했다. 검찰 수사 결과로는 10년간 326억원의 비자금을 횡령한 것으로 나타난다. 

박용오는 ㈜두산의 대표이사직에서 해임되는 등 두산그룹 가문에서 완전히 밀려나 성지건설을 인수하였으나 이후 경영난과 차남 박중원이 주가조작으로 실형을 선고받는 등의 스트레스 속에서 2009년 11월 자살했다. 

중앙대 인수과정과 관련해 박용성 전 회장 역시 검찰 수사대상에 올라있다. 청와대 박범훈 교육문화수석이 교육부에 압력을 넣어 중앙대 통합(2011~2년 본교와 안성캠퍼스) 관련 특혜를 주도록 했고, 박용성 회장이 이를 위해 박 전 수석에게 로비를 벌인 혐의를 받고있다. 

[관련기사: ‘형제의 난’ 치르고 4세 승계, 안정적 지배구조 확보]

(10월12일 오후 4시. 제목 수정.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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