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정 칼럼] "세밀하게 계획된 편파적 경향"

선우정 논설위원 2015. 10. 14.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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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미국을 위해 피 한 방울 안 흘렸다 미국은 그런 일본을 지속적으로 편애했다 한국이 미국에 중요하다면 그 가치만큼 대우해 달라

1975년 위성을 우주로 올린 나라는 미국과 소련밖에 없었다. 그때 일본이 '기쿠 2호'라는 위성을 우주에 올렸다. 일본의 선박 엔진 기술자들이 로켓 엔진 개발을 시작한 게 겨우 6~7년 전 일이다. 이런 일본이 어떻게 위성을 올렸을까. 미국 덕분이다. 두 나라는 1969년 우주개발에 협력한다는 협정을 맺었다. 말이 '협력'이지 실제론 설계에서 소프트웨어까지 미국이 기술을 제공했다. 이때 배운 기술로 일본은 자체 로켓을 쏘아 올렸다. 지금 일본은 러시아·미국 다음으로 많은 위성 발사 실적을 축적했다. 우주 강국이자 미사일 강국이다.

당시 재정난에 빠진 미·소는 '로켓 판매로 투자비를 회수할 수 없을까' 주판알을 튕기고 있었다. 하지만 미사일 기술로 직결되는 특성 때문에 로켓 기술은 돈만으론 팔 수 없다. 한국이 나로호 개발 때 미국에 퇴짜 맞고 러시아 로켓을 2000억원에 사다 쓴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미국은 유럽 우방을 제치고 일본에 기술을 줬다. 왜 일본을 택했을까.

몇 년 전 일본 로켓 개발을 주도한 고다이 도미후미 박사를 만났을 때 이유를 물었다. 그는 "일본 스스로 로켓을 개발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기술이 있으니 미국이 먼저 다가왔다는 것이다. 나로호 발사 실패로 고심하던 때였다. 기분 상했다. 정말 기술력이 전부였을까. 기술력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늘 푸대접을 받는가. 틀린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완전히 맞는 소리도 아닐 것이다. 얼마 전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 고문을 지낸 로버트 올리버가 쓴 책을 읽다가 이 대통령의 편지 한 구절이 마음에 들어왔다. '군수품조차 한국보다 일본에서 조달하기 위한 계속적이고 세밀하게 계획된 편파적 경향이 큰 문제입니다.' 한국 물건을 놔두고 한국군이 사용하는 물품까지 일본에서 들여오는 미국의 행태를 비판한 것이다. 단순히 '일제(日製) 선호 풍조'를 지적한 게 아니다. 일본의 부흥을 위해 미국이 한국의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는 구조적인 문제를 건드린 것이다.

이 대통령의 이런 판단은 학자들에 의해 사실로 입증되고 있다. 미국이 일본을 '아시아의 동반자'로 확고히 선택한 건 1950년대 초반이었다. 일본의 전략적 가치를 생각하면 시비 걸 일은 아니다. 문제는 한국이 미국의 원조 자금으로 한국 물자 대신 일본 물자를 사도록 한 것이다. 이 대통령에게 이런 전략은 한국 경제를 껍데기로 만들어 일본에 종속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대통령은 '반일(反日)'을 무기로 미국과 격하게 대립했다. 고(故) 김일영 전 성균관대 교수는 이 대통령의 반일 정책을 '미국의 일본 중심 정책 구도에 대한 한국의 대응 논리'라고 적극적으로 해석한다.

일본의 전투기 개발 과정도 로켓과 똑같은 길을 걷고 있다. 일본은 2차대전 당시 세계 최고의 전투기를 만들었다. 이 기술의 싹을 자른 것이 승전국 미국이다. 그런 미국이 1987년 일본이 국산 전투기 개발 계획을 수립하자 공동 개발을 제의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독자적 레이더 기술을 접목시켜 'AESA 레이더 공대공 모드'도 개발했다. 미국의 이전 거부로 요즘 한국에서 문제가 되는 네 가지 전투기 기술 중 하나다. F-35 도입에서도 일본은 한국보다 유리한 위치에 서 있다. 일본은 라이선스 생산을 통해 이전받은 F-35 기술을 기반으로 독자 스텔스 전투기를 개발한다는 계획이다. 로켓이 그랬듯 일본은 이번에도 성공할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 성공한다면 우리도 성공해야 한다.

한국은 먼저 기술력이 모자란 자신을 탓해야 한다. 일본처럼 기술이 있다면 미국이 앞장서 손을 내밀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니 한국은 불만을 말할 자격이 없다'는 논리는 수긍할 수 없다. 한국도 일본과 같은 미국의 동맹국이다. 한국은 일본 못지않은 전략적 가치를 가졌고 미국을 위해 정글에서 피도 흘렸다. 일본을 부흥시키기 위한 소비자 역할도 감내했다. 미국이 바라던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도 큰 반발 없이 용인했다. 미국이 이전을 거부한 네 가지 기술은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일본에 제공한 수많은 기술에 비하면 그렇게 엄청난 것도 아니다.

이승만·박정희 두 대통령이 위대한 것은 미국의 정책을 한국의 국익에 맞게 돌리는 데 모든 수단을 활용했다는 점이다. 실력이 없으면 설득하고, 설득이 통하지 않으면 사정하고, 사정이 통하지 않으면 '북진(北進)'과 '자주 국방' 카드로 과감하게 판을 흔들었다. 물론 지금 한·미 관계는 그렇게 살벌한 시기가 아니다. 하지만 반드시 KF-X(한국형 전투기) 개발 사업을 완결한다는 의지를 미국에 보여주고 우리의 전략적 가치에 걸맞은 대우를 요구해야 한다. '중국 경사론'이나 해명하는 식으론 미국을 움직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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