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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교수 382명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성명 발표[전문 포함]

이동휘 기자 입력 2015. 10. 28.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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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교수 382명이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반대하는 성명을 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우려하는 서울대 교수모임' 소속 교수 12명은 28일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에서 ‘다른 생각을 억누르는 나라에는 미래가 없습니다’라는 제목의 성명을 통해 "정부·여당은 근거 없고 무모하며 시대에 역행하는 위험한 역사 교과서 국정화 결정을 취소하고 교과서 제작 자율성을 보장하라"고 주장했다.

이 성명서에는 이태진·정옥자 전 국사편찬위원장, 김용덕 동북아역사재단 초대 이사장 등 10명의 명예교수를 포함한 서울대 교수 382명이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우리는 학자이자 교육자의 본분을 지키려는 충정에서 정부·여당이 국정화 교과서 결정을 철회하고 분열과 대립이 아닌 대화와 통합의 길을 택할 것을 간곡한 마음으로 촉구한다”고 밝혔다.

이어 “특정한 정치적 필요에 따라 선택된 단일한 해석을 ’올바른’ 교과서 하나에 담아 국민의 생각을 획일화하는 시도가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는 제국 일본의 군국주의나 북한을 비롯한 일당 체제 국가의 전체주의에서 이미 확인된 역사적 교훈”이라고 덧붙였다.

교수들은 마지막으로 “우리의 입장은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걱정하며 역사 앞에 책임 있는 자세를 지녀야 할 학자 및 지식인으로서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도리”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서울대 교수 382명이 낸 성명 전문(全文).

지난 10월12일 정부는 학계·교육계가 줄지어 반대하고 국민적 우려가 커져감에도 불구하고 역사교과서 국정화 결정을 공표했습니다.

우리는 학자이자 교육자의 본분을 지키려는 충정에서 정부·여당이 이 백해무익한 결정을 철회하고 분열과 대립이 아닌 대화와 통합의 길을 택할 것을 간곡한 마음으로 촉구합니다.

이미 지난 9월2일 본교 역사전공 교수들은 황우여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에게 직접 전달한 의견서에서, 국정화는 헌법정신에 위배되고 대한민국의 위상과 부합하지 않을 뿐더러 학생들의 창의적인 사고력을 위축시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걸림돌이 될 것을 우려하면서 교과서 제작의 자율성을 허용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 후 전공 분야를 막론하고 많은 학자와 교사, 학생, 시민들이 국정화를 반대하는 입장을 연이어 표명하고 있으며, 다수의 언론도 반대하는 입장의 논설을 게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여당은 국정화를 강행함으로써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정부·여당은 처음에는 용어표기의 불일치와 해석의 차이를 들어 검정 교과서를 문제 삼았습니다.

그러나 국정화 반대여론이 거세지자 정부의 검정을 통과해 일선 학교에 보급된 교과서가 종북 좌편향이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를 내세우기 시작했습니다.

현행의 역사 교과서가 주체사상을 아무 비판 없이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검정을 통과한 어떤 교과서에도 그런 혐의는 찾을 수 없습니다.

만약 검정 교과서가 정말 주체사상을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면 집필자들은 말할 것도 없이 이를 검정하고 승인한 국사편찬위원장과 교육부 장관부터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셈이 됩니다. 이는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권 여당이 길거리 현수막까지 내건 일은 지나칩니다.

이러한 전후 사정으로 미루어 볼 때, 국정화 강행의 본질은 교과서 서술의 문제도 아니고 역사학과 역사교육의 문제도 아니며, 집권층 일각의 정치적 고려가 앞선 무리수일 뿐입니다.

특정한 정치적 필요에 따라 선택된 단일한 해석을 '올바른' 교과서 하나에 담아 국민의 생각을 획일화하는 시도가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초래하며 그 폐해가 얼마나 깊고 멀리 가는지는 제국 일본의 군국주의나 북한을 비롯한 일당 체제 국가의 전체주의에서 이미 확인된 역사적 교훈입니다.

이 교훈은 우리나라 교과서 발행의 역사에도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검정제로 발행되던 한국의 역사 교과서는 1974년 유신체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국정제로 전환되었지만, 그것으로 떠받치고자 했던 체제는 불과 5년 만에 붕괴했습니다.

그 후에도 국정제를 이어가던 군사정권이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시민들의 저항에 의해 마침내 물러간 후 문민화, 민주화, 자유화는 시대정신이 되었습니다.

1992년 헌법재판소가 교과서 발행제도는 국정제보다 검인정제, 검인정제보다 자유발행제가 헌법정신에 더 부합한다는 판결을 내놓았으며, 이에 따라 1995년 정부는 장기적으로 자유발행제를 지향하는 개혁방안을 결정하여 시행에 들어갔습니다.

이런 기조에서 국사 교과서를 검정제로 환원한 것은 당연한 조치였습니다.

2013년 UN의 문화적 권리에 대한 특별보고서도 우리나라의 이러한 교육개혁 방향이 세계적 추세와 인권 및 문화적 권리에 부합함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현 정부와 여당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고 있습니다. 최근 몇 해 동안 정부가 검정 교과서에 대해 대폭적인 수정을 강제하는 것을 지켜보며 우리는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제는 헌법적 가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노골적인 훼손이 임박했다는 우려마저 금할 수 없습니다.

국가와 사회의 미래는 학생들의 '생각하는 힘'에서 나옵니다. 역사는 단순히 사실 나열의 창고가 아니며, 다양한 관점이 서로 어울리고 부딪히면서 깊은 성찰의 의미를 배우고 경험할 수 있는 장입니다.

만일 이대로 국정제를 시행한다면 역사 교육은 의미를 잃게 될 뿐 아니라 학문과 교육이 정치의 희생양이 되어 헌법이 보장한 자율성, 전문성, 중립성을 침해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정부·여당이 근거 없고 무모하며 시대에 역행하는 위험한 역사 교과서 국정화 결정을 취소하고 교과서 제작의 자율성을 보장할 것을 요구합니다.

학문과 교육의 문제가 이런 방식으로 현실 정치에 휘말려서는 곤란합니다.

우리의 요구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걱정하며 역사 앞에 책임 있는 자세를 지녀야 할 학자, 그리고 지식인으로서 양심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도리임을 밝힙니다.

2015년 10월 28일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우려하는 서울대학교 교수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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