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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 취소당하고 현수막 찢기고..몸살 앓는 대학 내 성소수자들

김상범 기자 입력 2015. 11. 21.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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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숭실대 성소수자 동아리 SSU LGBT(LGBT)는 학교측으로부터 “10일 열리는 행사(인권영화제)를 허가할 수 없다”는 통고를 받았다. 학내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이 영화제에서 LGBT는 김조광수 감독·김승환 부부의 결혼생활을 다룬 <마이 페어 웨딩>을 상영하기로 돼 있었는데, 학교 측이 ‘설립 이념인 기독교 정신’을 들어 행사를 불허한 것이다. LGBT측은 “학교가 성소수자 학생들의 정체성을 존중하기는 커녕 일부 보수 기독교세력의 압력에 굴복한 것”이라고 항의했다.

2000년대를 전후해 대학 내 성소수자 담론이 활발하게 논의되면서, 학내 성소수자 동아리들이 하나둘 생겨나 현재 전국적으로 서른 곳이 넘는 대학에 모임이 개설돼 활동중이다. 하지만 아직도 상당 수의 성소수자 모임들이 동아리 인준·행사 허가 권한을 지닌 학교 측과의 마찰과 동료 학생들의 ‘혐오 표현’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자유로운 담론장’으로서의 대학 기능이 축소돼 학생들의 성적 정체성과 자치활동이 위협받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대학교에 걸린 성소수자 모임 회원모집 현수막

숭실대처럼 학내 규정과 동아리 성격이 어긋나 갈등을 겪는 사례가 빈번하다. 고려대학교 성소수자 동아리 ‘사람과 사람’도 지난 4월 퀴어영화제 진행을 위해 학생처에 대강당 사용 신청을 냈으나 학생처는 혐오세력의 항의와 학내 여론존중을 이유로 들어 대관을 거절했다. 사람과 사람은 이후 여섯 차례 학생처와 면담을 한 끝에 ‘온라인 홍보를 하지 않는 조건’에서 대관 승인을 받았다.

학교 측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대다수다. 아스토 대학생성소수자모임연대(QUV) 의장은 “학교에서는 동아리 인원들의 신상정보가 담긴 명단을 제출하도록 요구하고 있는데, 성소수자 동아리의 경우 아웃팅(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성적 지향이 드러나게 되는 것) 문제와 직결돼 있어 이를 제출하는 것이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때문에 동아리 형태로 정식 인준을 받은 경우는 서울대, 연세대 등 전국 5개 학교에 불과하며 나머지 모임들은 비공식적 모임으로 학교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에서 지난 10일 발표한 ‘성적지향·성별정체성에 따른 차별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대학 등 성인교육시설에서 차별을 받았다고 응답한 164명 중, 절반에 가까운 80명이 성소수자 관련 모임과 행사를 방해당하거나 게시물을 훼손당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피해 학생들이 교수나 학교 당국에 문제를 제기해도 대개 회피하거나 방치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행사 승인 담당 직원이 행사 내용이나 학생의 정체성, 영화 내용 등을 노골적으로 물었다”, “일부 교수의 경우 수업시간에 이런 사건을 희화화하는 등 학교 내 분위기에 영향을 준다”는 진술도 나왔다.

전국 32개 대학 성소수자 모임들의 연대체인 QUV.

이들을 향한 일부 동료 학생들의 ‘혐오 표현’도 심각하다. 부산대 성소수자 동아리 Queer In PNU(QIP)는 지난 2월 말 성소수자 신입생을 환영한다는 현수막을 학내에 게시했다. 하지만 개강 이후 현수막이 누군가에 의해 고의적으로 훼손됐고, 이에 QIP가 ‘성소수자의 표현물을 훼손하지 말아달라’는 대자보를 추가로 게시하자 이것마저도 절반으로 찢겨 바닥에 버려졌다.

성소수자들을 향한 학내 익명게시판의 ‘헤이트스피치’도 공공연하게 올라오고 있다. 지난 9월 대구의 한 국립대 온라인 커뮤니티엔 “XX, 살다살다 퀴어 동아리도 생긴거냐, 미친거 아니냐”는 글이 올라와 논란을 빚었다. 아예 학내 성소수자 모임을 ‘저격’하기 위한 사회관계망서비스(SNS)도 개설됐다. 지난해 9월 동아방송대 성소수자 동아리인 ‘디마이너(Diminor)’의 안티 SNS 페이지인 ‘다이(die)마이너’엔 “조용히 살아라 더러운 놈들아, 너네가 붙였던 전단지 찢고 없애느라 힘들었다. 참고로 붙인놈 얼굴도 봐 뒀다”는 글이 올라왔다. 심지어 “디마이너 회원이 속한 학과를 말하겠다”며 ‘OO학과 몇명, XX학과 몇명’등 아웃팅에 가까운 글도 게시됐다. ‘디마이너’의 한 회원은 “같은 학교 학생들이 이럴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며 “충격적이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몰라 당황했다”고 말했다.

정치적인 담론장으로서의 대학 기능이 축소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현희 SOGI법정책연구회 상임연구원은 “1990년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성소수자 담론이 학생사회의 여러가지 대안 운동 중 하나로 자리잡았지만 지금은 학내 정치적 담론 자체가 빈곤한 상황”이라며 “학교 측도 성소수자 학생들에 대해 명확히 취해야 할 입장을 정하지 않고 있어 일부 보수세력의 조직적인 항의를 두려워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 연구원은 “사회적으로 혐오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서 대학이라고 사회의 여론과 뚜렷한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상범 기자 ksb123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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