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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前 대통령 서거] 민주화 투쟁 발자취, 한국 정치史가 되다

임성수 기자 입력 2015. 11. 22.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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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신념과 카리스마.. YS의 인생역정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83년 ‘23일간의 단식투쟁’ 중 병원으로 옮겨져 환자복을 입은 채 병상에 누워 있다. 김 전 대통령은 광주민주화운동 3주기였던 그해 5월 18일 전두환 군사정권에 민주화를 위한 5개항을 요구하며 단식에 돌입했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집권여당 사무총장을 시켜 단식 철회를 요구하자 “나를 시체로 만든 뒤 해외로 부치면 된다”고 말했다. 이 단식을 계기로 지리멸렬하던 민주화 세력이 총집결했다고 김 전 대통령은 생전에 회고했다. 국민일보DB

타고난 정치인이었다. 삶 자체가 파란만장한 한국 정치사였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최연소 국회의원, 민주화운동 투사, ‘문민’ 대통령 등 굵직한 정치이력을 거치며 대한민국 현대사의 고비마다 커다란 발자국을 남겼다. 승부수를 던지는 과단성, 목표 지향적이고 결단력 있는 성격, 강력한 신념과 카리스마를 가진 정치인이었다. 즐겨 쓴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는 휘호처럼 민주화를 위한 큰 길을 걸었다. 대통령 취임 이후엔 영욕이 극적으로 교차했다. YS가 남긴 빛과 그림자는 뚜렷했다.

◇여당 청년 정치인에서 야당 대표 투사로=YS는 1927년 12월 20일 경남 거제도에서 아버지 김홍조씨와 어머니 박부연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장목소학교, 통영중(이후 경남중으로 전학) 경남고와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중학교 시절 책상머리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써 붙여 놓았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6·25전쟁으로 혼란스럽던 시절 YS는 전도유망한 청년 정치인이었다. 1951년 장택상 당시 국회부의장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한 뒤 1954년 3대 국회에서 자유당 후보로 당선됐다. 그가 세운 최연소 국회의원 기록(만 25세)은 아직 깨지지 않았다.

하지만 여당 소속은 잠깐이었다. 그는 이승만정권이 54년 11월 ‘사사오입’ 개헌으로 대통령 중임 제한을 없애자 입당 7개월여 만에 자유당을 탈당해 야당인 민주당에 합류한다. 61년 5·16쿠데타 이후 군정참여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했다.

YS는 9선 국회의원을 역임하는 동안 최연소 원내총무(38세), 최다선 원내총무(5회), 최연소 총재(45세) 등 화려한 기록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는 국민들에겐 ‘선명 야당’을 내건 민주화 투사였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꼿꼿이 맞서면서 명성이 높아졌다. 1969년 박정희정권의 3선 개헌에 반대하던 중 상도동 자택 인근에서 괴한들로부터 초산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1971년 ‘40대 기수론’으로 야당 대선 후보에 도전했다. 라이벌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패했지만 “김대중씨의 승리는 곧 나의 승리”라며 경선 결과에 승복했다. 1974년 전당대회에서 최연소 야당(신민당) 총재에 당선되는 등 정치적 위상을 높여갔다.

헌정 사상 최초의 의원직 제명은 ‘투사’였던 그의 면모를 보여주는 대표적 이력이다. YS는 1979년 10월 4일 여당이 ‘김영삼 의원 징계안’을 10분 만에 기습 처리하면서 의원직을 상실했다. YH사건과 뉴욕타임스 인터뷰가 발단이 됐다. YS는 79년 8월 가발 업체 YH무역의 여공들이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하자 “마지막으로 우리 신민당사를 찾아준 것을 눈물겹게 생각한다”며 이들을 보호했다. YS는 이 사건으로 법원으로부터 신민당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을 받게 된다. 그는 또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민중혁명으로 이란 팔레비 왕정 체제가 무너진 것을 언급하며 한국은 이런 전철을 밟지 말라고 경고했다.

YS는 의원직을 박탈당하자 “나는 오늘 죽어도 영원히 살 것” “나를 제명하면 박정희는 죽는다”고 말했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유명한 발언도 이때 회자됐다.

그의 말대로 ‘김영삼 제명’은 박정희정권 몰락의 서곡이 됐다. YS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마산에서 제명에 반발하며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인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박정희정권은 결국 부마항쟁 대응책을 놓고 내부 충돌을 벌였고, 이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당한 10·26사건으로 끝이 났다.

YS는 전두환 신군부 아래에서도 민주화 투쟁을 이어갔다. 그는 1980년 5월 17일 가택연금을 당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1981년 5월 연금에서 해제되자 민주산악회를 만들었고 1983년에는 5월 18일부터 민주인사 석방 등을 요구하면서 23일간 단식 투쟁을 벌였다. 전두환정권의 단식 중단과 출국 권유에는 “나를 시체로 만든 뒤 해외로 부치면 된다”며 거절하는 강단을 보여줬다.

YS는 이후 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 신한민주당 창당 등을 통해 야권을 이끌었다. 신민당은 85년 12대 총선에서 제1야당을 차지했다. 이를 기세 삼아 1987년 6월항쟁을 주도했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그해 대선에서 당시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와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군인 출신의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다.

◇3당 합당으로 여당 대표, 결국 대통령까지=“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 ‘제2야당’으로 전락한 통일민주당을 이끌던 YS는 1990년 1월 민주정의당·신민주공화당과의 3당 합당을 전격 선언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구국의 결단’이라는 명분으로 투쟁 대상이던 군부세력과 손을 잡았다. 야당 대표가 하루아침에 여당 공동대표가 됐다. 3당 합당은 호남 고립과 영남 패권주의 강화, 지역갈등 격화, 민주세력 분열 등의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YS는 여당 내부에서도 권력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합당 이후 내각제 개헌 합의각서가 공개되자 자신에 대한 ‘음해’라며 당무를 거부하고 마산으로 내려갔고, 결국 노태우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내각제 포기 약속을 받아냈다.

그는 민자당 내에서 소수파였지만 다수파인 민정계의 박철언, 박태준 의원 등과 권력 쟁탈전에서 승리하며 1992년 여당 대통령 후보 자리를 거머쥐었다. 92년 대선에서 숙적인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돼 ‘문민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대통령 김영삼’은 ‘민주화 투사 김영삼’만큼 국민적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YS는 퇴임 이후에도 이따금 정치적 활동을 이어갔다.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 지지 선언을 했다.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뿐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을 원색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건강이 악화되면서 정치적 발언은 거의 하지 않았다. 이후 투병 생활을 이어가다 22일 새벽, 영면했다. ‘정치인 김영삼’이 눈을 감으면서 한국 정치사의 한 페이지도 넘어갔다.

임성수 기자 joyls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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