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방송이 판 벌이고 여론이 밀어주고 대학이 가담한 '천재소년 프로젝트' 최선이었습니까?

박은하 기자 2015. 12. 4.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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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서울 대치동의 ㄱ영재학원. 6~8살 아이들이 부지런히 문제를 풀고 있었다. 숫자퍼즐을 푸는 문제, 도형을 변형해 새로운 도형을 만드는 문제 등 시·도교육청 부설 영재교육원의 역대 기출문제들이었다. “저번 시험에는 떨어졌지만 다음번에는 반드시 붙으려고요. 영재교육원 다음에는 영재학교에 갈 거예요.” 학생들은 문제풀이에 열중했다. 영재교육원에 들어오기 전 12만원가량 내고 실시한 학원 자체 영재테스트를 통과한 아이들이다. 옆 강의실 올림피아드(경시대회)반에서는 중학·고교 수학문제까지 푸는 초등생들도 보였다.

2015년 현재 영재교육기관은 전국에 2538곳이 있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영재학교 7개, 과학고 20개 외에도, 시·도교육청에서 운영하는 영재교육기관 260개, 대학에서 운영하는 기관만 82개이다. 나머지는 각급 학교에서 운영하는 영재학급이다. 2002년 영재교육진흥종합계획이 마련된 뒤 400여개 수준이던 교육기관이 6배나 늘었다. 영재교육을 받는 학생은 11만53명으로 전체 학생의 약 1.8%에 불과하다. 하지만 영재교육기관의 각종 테스트에는 정원의 10배가 몰리고, 대치동에서는 과목당 100만~200만원을 호가하는 영재사교육이 성행한다. “재능이 있으면 부모로서 밀어줘야 하잖아요. 잘하면 송유근처럼 될 수도 있고.” 아이를 영재교육원에 넣는 데 성공한 학부모 ㄴ씨의 말이다. 송유근의 논문 표절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너무 가혹하잖아요. 나라의 인재가 될 아이인데. 틀림없이 잘 이겨낼 거예요.”

송유근군이 특별히 제작된 인하대 합격통지서를 받고 환하게 웃고 있다. 송군은 8살이던 2005년 ‘21세기 글로벌 리더 전형’ 수시모집으로 인하대 자연과학계열에 합격했다.

천재에 대한 동경은 항상 있어왔지만 영재교육 열풍은 10년 전 무렵부터 불기 시작했다. 2004년 만 6세에 최연소 정보처리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초등학교를 ‘6학년’부터 시작한 송유근군이 열풍의 한복판에 있었다. KBS <인간극장>에 출연해 화제몰이를 한 송군은 이듬해부터 각종 ‘최연소’ 진학 기록을 갈아치웠다. 대학 부설 영재교육원에 다니며 검정고시로 최연소 중·고교 과정을 마치고 인하대 자연과학부에 최연소 수시합격했다. 송군의 부모는 검정고시 응시가능 연령을 만 12세로 제한한 교육청 규정을 바꾸기 위해 헌법소원까지 냈었다. ‘천재 유근이가 훌륭한 과학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사회가 나서야 한다’는 여론이 불었다. 송군의 최연소 경신 행진은 계속됐다. 대학을 중퇴하고 만 12세이던 2009년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 천문우주과학과 석·박사통합과정에 입학했다. 박석재 한국천문연구원 연구위원이 지도교수였다. 최연소 ‘박사학위’를 눈앞에 두는 듯했다. 그러다 표절 파문에 막혔다. 물론 1년 안에 학위 논문을 쓰기만 하면 ‘최연소’ 기록은 남는다. 송군은 최근 CBS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학위에 연연하지 않는다. 국민이 준 박사학위에 감사한다”면서도 조만간 논문을 쓸 계획이라고 밝혔다.

2009년 12살이던 송유근군의 대학원 입학 소식을 전하는 기사.

송군에 대한 학계의 우려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익명을 요구한 해외 천문연구기관 연구원 ㄷ씨는 “송유근이 언론에 조명될 때부터 불안했다”고 말했다. “계산을 잘하는 것과 자연과학의 실제 원리를 이해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송군이 뛰어난 것은 맞지만 곧바로 대학에 가야만 하는 상황이었는지는 의문이었다”고 말했다.

우려를 불식하듯 송군의 성장과정과 학문적 관심사는 낱낱이 중계됐다. 그럴수록 학계와 과학 커뮤니티의 우려도 커졌다. 언론 인터뷰를 보면 송군은 인하대 재학 시절 우주형성 원리인 초끈·빅뱅이론에 관심을 가졌고, 이듬해 자퇴한 뒤 학점은행을 통해 컴퓨터공학 분야로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서울시립대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물리학과 컴퓨터공학을 접목한 양자컴퓨팅 연구에 흥미를 보였다. 지난해에는 위상수학 분야로 논문을 써서 졸업자격시험을 통과했다. 학위 논문은 전혀 다른 분야인 <일반상대성 이론의 천체물리학적 적용>이었다. 박사급 연구자 ㄹ씨는 “대학원 과정에서 완전히 다른 영역으로 관심분야가 바뀌는 경우는 드물다. 다양한 분야에 관심 있다는 것은 학문적 호기심이 뛰어나다는 것으로 긍정적이지만, 박사과정은 한 분야를 잡고 독립된 연구자로 기능할 수 있는지 가늠하는 첫걸음이다. 기초를 쌓기 위해 학부과정이 존재하는데 너무 일찍 대학원에 온 것 아닌가 걱정된다”고 말했다. ‘하이브레인’, ‘브릭’ 등 과학기술인 커뮤니티에서는 송군이 심심찮게 화제가 됐다.

송유근군이 지난 4월 출연한 SBS 방송프로그램

대학원대학교 체제인 UST의 구조도 도마에 올랐다. UST는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유일한 대학으로 한국천문연구원 등 25개 국책연구소가 연합해 대학원만 두고 있다. 송군이 UST를 선택한 것은 학부 교육과정을 거치지 않고 관심분야 연구에 바로 뛰어들 수 있다는 이점에서였다. 송군은 “초끈이론·빅뱅이론 등을 연구하고 싶은데 대학에서는 커리큘럼에 매여 자유롭게 연구할 수 없다”며 자퇴했다. UST는 특성상 국책연구 수행과제에 집중돼 있어 송군처럼 학부과정에서 기초부터 익혀야 할 학생으로서는 부적합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 점을 의식한 듯 UST는 송군의 입학과 동시에 ‘송유근 프로젝트’를 발족했다. UST의 공식 실적 보고서는 ‘송군이 박석재 교수에게 천체물리학을, 충남대 박병윤 교수에게 원자핵을, 이화여대 조용승 교수에게 위상수학을, 공군사관학교 최재동 교수에게 미분기하학을 사사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송군은 지난 7년간 다른 석·박사 과정 연구자들과 달리 학술발표나 학술지 논문 게재 등 연구내용을 검증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송군을 과도한 관심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 때문이었다. 이번 박사학위 논문에 관심이 집중된 이유이기도 하다.

김웅용 현 신한대 교수가 5살 때 일본 방송프로그램에 출연해 미적분 문제를 풀고 있다. 김 교수는 신동으로 주목받았지만 어린 시절이 괴로웠다고 토로하며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송군의 표절 파문은 방송이 판을 벌이고 여론이 밀어주고 대학이 가담한 ‘천재소년 프로젝트’가 과연 필요했는지 되묻는다. UST는 저널 게재가 취소되고 나서야 지난달 25일 “책임을 통감한다”며 공식 사과했다. 하지만 송군이 7년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는지 의문은 계속 남는다. 연구자 ㅁ씨는 “송군이 라디오 인터뷰에서 ‘자신의 논문 인터넷 다운로드 횟수가 2200건이었다’며 ‘자부심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논문의 가치는 동료 학자들의 인용 횟수 등으로 결정되지 대중의 관심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다. 지나치게 폐쇄적인 환경에 있었고 언론의 관심을 의식하는 것 같다”며 “언론과 대학 등에 큰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2006년 황우석 사태 이후 9년이 지났지만 한국의 연구윤리 수준은 여전히 도마에 오르고 있다. 우종학 서울대 물리학부 교수는 송군의 논문 표절논란이 한창일 무렵 페이스북에 공개적으로 표절가능성을 시사했다가 인터넷 공격에 시달렸다. 각종 최연소 기록을 중계하던 언론은 논문 표절 건을 적극적으로 보도하지 않거나 “어린 과학꿈나무에게 기회를 주자”는 칼럼을 내보내기도 했다. 대치동 영재학원 부모들의 여론도 송군에 대해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UST는 2015년 천문우주 인재양성사업계획안에서 “국가적인 과학영재를 길러내는데 기여하고, 과학기술의 위상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는 것을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과학기술을 대하는 한국 사회의 시각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대목이다.

송군은 다음달이면 만 19세가 된다. 보통의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갈 나이이고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나이다. 송군에 대해 언급한 연구자들은 “재능이 있어도 언론이 감싸고 칭찬만 받는 환경에서는 독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독은 송군에게서 그치지 않는다. 1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행학습을 해서라도 영재교육을 받고 싶어하는 아이들과 부모들의 마음에도 스며 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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