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특별기획-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 (36)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박태균 | 서울대 교수·국사학 2015. 12. 8.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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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 "동북아 균형자 역할"..보수진영 "한·미동맹 훼손"

한국군의 전시작전통제권을 둘러싼 논란은 2005년 2월25일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 2주년 국정연설과 함께 시작됐다. 2008년까지 주한미군 1만2500명의 단계적 철수에 대비해 2010년쯤 전시작전통제권을 주한미군으로부터 환수받는다는 계획을 천명한 것이다.

노 대통령은 ‘자주군대’의 면모를 갖추고 동북아 안정의 균형추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 1994년 평시작전통제권을 돌려받은 데 이어 전시작전권도 환수하겠다고 발표했다.

노 대통령의 이런 발언에는 세 가지 배경이 깔려 있었다. 첫째로, 주한미군의 지속적인 감축이었다. 당시 미국의 부시 행정부는 군사전력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집중하면서 주한미군 감축을 추진하고 있었다. 둘째로, 이 과정에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요구한 것이다. 한반도 이외의 지역에서 분쟁이 발생할 경우 주한미군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전략이었다. 셋째로, 노 대통령 스스로의 국정 철학이었다. 즉,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평등한 관계로 재편하겠다는 것이었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발표 직후 논란이 됐던 것은 ‘균형자’로서의 역할에 대한 노 대통령의 구상이었다. ‘균형자’ 구상은 중국과 미·일동맹 사이의 갈등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정책이면서 주한미군이 동북아시아 지역의 분쟁에 휘말릴 경우 한국군이 자동적으로 개입하는 사태를 방지하고, 강대국 간의 갈등을 중재하겠다는 것이었다.

2006년 9월7일 당시 버웰 벨 주한미군사령관(가운데)이 21세기동북아 미래포럼에 참석해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에 대한 미군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같은 해 8월10일 전직 국방장관들이 서울 송파구 대한민국재향군인회관에 모여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있는 장면. 경향신문 자료사진

■보수진영 비판받은 ‘균형자론’

‘균형자론’은 보수 야당뿐만 아니라 시민사회로부터도 비판을 받았다. 미·일동맹과 미국의 동북아 전략이 변경이 없는 한 제3의 입지를 형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미 이라크에 한국군을 파병한 만큼 한·미동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입장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참여정부가 2005년 9월 부시 행정부에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위한 공식 협상을 제안하면서 사회적 논란은 제2라운드에 접어들었다. 미군의 철수를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닌 ‘우리 군은 우리가 지휘하고, 미군은 미국이 지휘하는, 일방적 명령체계가 아닌 상호협조 체제’를 추구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미국 정부가 이런 요청을 받아들여 같은 해 10월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 처음으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위한 협의가 시작됐다. 한·미 국방장관은 협의회를 통해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와 관련된 협의를 ‘적절히 가속’시키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부시 행정부에서 가급적 이른 시기에 전시작전통제권을 한국군에게 넘겨주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한국 정부는 2010년에서 2012년 무렵 환수를 추진했던 데 비해 미국 정부는 그 이전에도 이양할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2011년이 되어서야 작전통제권 환수를 위한 여건이 마련될 것으로 전망했던 한국 정부는 미국의 역제안에 오히려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로드맵에 가장 먼저 반대 입장을 표명한 것은 역대 국방장관들이었다. 이들은 단독으로 전시작전통제권을 행사하려면 한국군의 전력이 갖추어져야 하는데, 그러한 능력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환수가 이루어지면 한국군의 작전 능력에 문제가 생길 수 있고, 한·미연합사의 해체로 주한미군이 철수할 수도 있다고 반발했다.

한국 정부는 곧바로 2012년을 환수 시기로 한다고 발표했지만, 부시 행정부가 그보다 3년이나 빠른 2009년에 작전통제권을 이양하겠다고 하면서 논란은 가속화됐다. 한국의 단독 방위능력 여부도 문제가 됐지만, 더 중요한 점은 한·미 간에 이견이 발생했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양국 정부 사이에서 용어의 사용을 둘러싼 대립이 나타나기도 했다. 즉, ‘환수’로 쓰느냐, 아니면 ‘이양’ 또는 ‘독자행사’로 쓰는가가 문제가 된 것이다.

재향군인회 등 보수단체들은 거리로 나섰고, 보수 야당은 참여정부가 한·미동맹을 훼손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국가안보 비상상황’으로 규정했다. 진보 세력은 미국이 ‘신속기동군’으로의 재편을 위해 작전통제권의 반환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의 정책에 경고를 하는 의미로 반환 시기를 앞당기려 한다고 진단했다.

전직 군 원로들은 “노 대통령의 안보의식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군 통수권자인 노 대통령을 비판했다. 정부는 작전통제권 환수가 미국의 세계전략에 따른 것이지, 한국 정부의 독단적 주장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북한의 갑작스러운 붕괴에 대비하기 위해 작전통제권 환수가 필요하다는 여당 소속 국회 국방위원장의 발언은 또 다른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미 군사전략에 제대로 대처 못해

2007년 2월25일 SCM에서 주한미군을 2008년 이후 추가 감축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그해 6월 말 이행계획에 대한 한국군과 미군 사이에 합의가 이뤄지면서 사회적 논란은 수그러들었다. 미국은 1960년대부터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이양하는 문제를 고려해 왔다. 주한미군이 일정 수준 이하로 감축될 경우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행사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닉슨 독트린 직후인 1971년 주한미군 1개 사단이 감축되면서 작전통제권의 이양뿐만 아니라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의 수석대표를 한국군 장성에게 맡기는 방안이 논의되기도 했다.

1990년을 전후해 탈냉전과 한국 사회의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해외주둔 미군 재배치(GPR·Ground Posture Review)가 시작됐다. 1994년 한국군의 평시작전통제권이 이양됐고,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가 한국군 장성으로 교체됐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 정부는 다시 한 번 GPR를 통해 주한미군의 감축 및 신속기동군으로서의 전환을 추진했다. 주한미군의 규모와 역할 변화는 2000년대 중반 한국군에 전시작전통제권 이양을 추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성할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의 요구보다 빠른 2009년 전시작전통제권을 이양하겠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는 정치적으로 판단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안보적 관점에서 미국의 대외 군사전략 변화에 따라 국가적 차원에서 고민하고 다뤄야 할 문제였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를 이루지 못해 참여정부의 임기가 끝난 이후 모든 계획은 백지화되었고, 미국뿐만 아니라 일본의 대외 군사전략이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유엔군사령부 ‘어제와 오늘’전시작전통제권 이양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면서 미국 정부는 유엔군사령부의 역할을 변화시켜, 유사시 주한미군이 유엔군사령부의 지휘 아래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아울러 작전통제권이 이양되더라도 유엔군사령부를 통해 작전통제권의 일부를 행사하는 방안까지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럴 경우 환수가 이루어지더라도 실질적인 환수가 아니라는 견해가 나오기도 했다.

유엔군사령부는 1978년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이 새로 조직된 한·미연합사령부로 이양되면서 그 역할과 규모가 대폭 축소됐다. 유엔군사령부의 해체는 1972년 미국과 중국이 관계 개선을 하면서 중국이 요청했던 사항 중 하나였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유엔통일부흥위원단을 해체하는 대신 유엔군사령부는 축소 운영하기로 했다.

유엔군사령부 해체는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한 이슈가 될 수 있었다. 첫째로, 한국의 안보를 국제사회가 지켜보고 있다는 억지력이 감소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두 번째 측면으로 유엔군사령부 해체는 곧 정전협정의 수정 또는 대체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었다. 1953년에 조인된 정전협정에서 남한 측은 유엔군사령관이 대표로 사인을 했기 때문에 유엔군사령부가 해체되면 정전협정이 다시 조인되어야 했다. 이는 유엔군사령부가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으며, 만약 정전협정이 영구적인 평화협정으로 대체된다면 유엔군사령부의 역할 및 존치 여부도 재고돼야 한다.

물론 유엔군사령부가 존재함으로 인해 유엔이 한반도의 안보 문제에 제3자로서 개입하지 못하는 역설적인 사실 역시 고려되어야 한다.

<박태균 | 서울대 교수·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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