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희의 '힐링의 미술관'] 인상파 화가는 왜 모델과 결혼했을까?..요조숙녀? NO 내조의 여왕 OK
당신은 집안에서 반대하는 결혼을 했는가? 혹은 가문에서 반쯤은 점지해준 사람과 결혼했는가? 예술가들의 결혼 풍토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가?
르네상스 시대 유명 미술가들은 독신이 많았지만, 19세기 전반까지는 화가들도 대략 비슷한 가문끼리 혼인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그러다 19세기 후반에 오면, 확실히 결혼전선에 이상이 생긴다. 19세기 예술가들은 대개 부르주아 계급 출신으로 댄디거나 보헤미안에 속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들 중 많은 이가 부모가 원치 않는 결혼을 했다. 아주 신분이 낮은 여자와 결혼한 게 공통점이다.
특히 르누아르, 모네, 세잔 등 인상파 화가들은 모델과 결혼하는 일이 잦았다.
사실주의 화가 밀레는 첫 아내와 일찍 사별하고 빈농의 딸로 가정부였던 여성과 결혼했다. 인상주의자의 대부였던 피사로는 어머니의 하녀와 결혼했다. 보나르는 길거리에서 모델로 캐스팅한, 장례용 조화를 만드는 마르트라는 여자와 평생 동거하다 만난 지 32년 만에 결혼했다. 그뿐 아니라 학벌과 가문을 두루 갖춘 상류 부르주아 출신 화가 그룹인 영국의 라파엘전 소속 윌리엄 모리스도 마부의 딸이었던 제인과 결혼했다. 같은 멤버인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는 모자 가게 점원 엘리자베스 시달을 배우자로 선택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는 사회경제적, 문화적 지각변동이 극심했던 시대였다. 그만큼 관습적인 결혼이 적극적으로 파기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들은 세잔 부친이 사망한 해인 1886년에 17년 동안의 동거 생활을 청산하고 결혼한다. 사랑은 이미 식은 지 오래됐지만, 그들은 좋은 친구로 살려고 노력했다. 결혼하고도 오르탕스와 한집에서 살진 않았지만 세잔은 그녀를 모델로 25점이나 되는 초상화를 그렸다. 그렇지만 세잔은 아내에게 유산을 물려주지 않았다. 그녀 또한 세잔의 임종 때 곁에 없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르누아르와 모네, 로댕처럼 서민 계층의 화가들도 부모가 모델과 무용수, 그리고 노동자 계급과의 결혼을 반대했다는 것이다.
특히 모델과의 결혼은 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지방 식료품상 아들이었던 모네는 25세 때 직업모델 출신인 18세의 카미유 동시외와 결혼했다. 사랑에 빠진 그들은 함께 살기 시작했는데, 1867년 카미유가 큰아들 장을 임신했음에도 모네 가족은 두 사람의 결혼을 적극 반대했다. 카미유가 모네의 아내가 될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는 게 이유였다. 무엇보다 직업모델 출신이라는 것이 폄하의 결정적 사유였다. 1876년이 돼서야 미뤘던 결혼식을 올리지만 그로부터 얼마 안 된 1879년에 그녀는 두 번째 아들을 낳은 후 고작 32세 나이에 자궁암으로 죽는다. 이후 모네는 자신의 컬렉터의 부인이었던 여인과 두 번째 결혼을 한다.
19세기 화가가 추구하는 여성상의 대표적인 전형, 그리고 화가와 모델의 결합의 긍정적 사례는 아마 르누아르와 그의 아내인 알린 샤리고가 아닐까. 가난한 재단사의 아들이었지만 사랑이 가득했던 부모 아래서 정감 어린 가정교육을 받은 르누아르는 재봉사 출신 알린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부르고뉴 지방 포도 재배 농가의 딸인 그녀는 가족을 버린 아버지를 원망하며 파리로 상경한 어머니와 생계를 위해 몽마르트르에서 삯바느질을 했다. 두 사람은 르누아르의 아틀리에 맞은편에 있는 간이식당에서 처음 만났다. 아마 르누아르가 그녀를 모델로 점찍었던 것 같다. 알린은 르누아르가 찾던 이상적인 모델, 즉 풍만한 가슴과 말벌 같은 허리, 투명한 피부를 가진 매력적인 처녀였다.
알린은 르누아르를 알게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바느질을 그만두고 ‘나부상’ 등의 그림 모델이 됐다. 허영심도 없고 사투리도 굳이 감추지 않는 소박하고 진지한 심성의 소유자였던 알린과 르누아르는 법률상 1890년에 결혼했다. 르누아르 49세, 알린은 31세였다. 그들이 동거한 지 10년쯤 되는 해였던 것 같다.
늦은 결혼은 집안의 반대보다는 그림 그리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벅차다고 생각한 르누아르 때문이었다. 애초부터 알린은 결혼식을 포기하고, 자신의 현실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으며, 바느질을 하면서 화가를 도왔다. 그뿐인가. 그녀는 죽기 직전 자신이 죽은 후 늙은 남편을 위해 누드모델 해줄 이를 섭외까지 해놓고 갔다. 이처럼 알린은 죽을 때까지 남편이 기분 좋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을 천직으로 알고 살았다.
살아서도 그랬다. 남편 취향대로 집 안을 가꾼 것은 물론, 나이 들면서 점점 유명해져가는 남편의 끊임없는 손님 접대 역시 그녀 몫이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자신의 취향을 포기한 것도 아니다. 알린은 술과 음식을 좋아했고, 춤과 피아노를 잘 쳤으며, 수영과 낚시와 노 젓기를 좋아했다. 아픈 남편을 위해 당구대를 만들어주기도 했고, 남편을 상대하다 실력이 일취월장해 출전하는 시합마다 우승을 거머쥐기도 했다. 이런 아내 덕분에 르누아르는 예술가 중 가장 성공적인 자녀(유명 영화감독인 장 르누아르)를 둔 모범적인 가장이 됐다.
한 가지 더! 사실 19세기 낭만주의 이후부터 예술은 기존 이데올로기의 전복과 저항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당대 젊은 예술가들은 기성세대인 부모에 대한 거부감을 그런 식으로 표출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결혼 유예와 은폐는 소심하고 나약한 예술가들이 부모를 거역하면서 동시에 거역하지 않는 나름대로의 자구책이었을 것이다. 여전히 그들의 부모는 경제력으로 화가들을 유혹하고 압박했을 테니까.
이래저래 화가는 자기보다 강한 여자가 필요했다. 그에게 그녀는 더 이상 비천한 존재가 아니라 지난한 삶을 굳건하게 만들어주는 활기와 생명력의 상징이었을 수도.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837호 (2015.12.16~12.2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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