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감에 떠는 세월호..자식 잃고 되레 미안하단 부모들"

CBS노컷뉴스 이진욱 기자 입력 2016. 1. 17.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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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기억법 <하> ] '나쁜 나라' 김진열 감독 "청년세대 공감에 큰 희망"
304명의 소중한 삶이 속절없이 스러져갔습니다. 거대한 배가 가라앉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무엇도 할 수 없었습니다. 엄청난 대가를 치른 뒤에야 '우리는 누구인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한 답으로 다가올 한국 사회는 어떠한 모습으로 서 있을까요. 그 길 위에서 '세월호'를 기록하고 기억하려는 간절한 목소리를 전합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상> 정신분석학자 맹정현 교수 "치유의 출발점은 애도"
<하> '나쁜 나라' 김진열 감독 "청년세대 공감에 큰 희망"
세월호 참사 1주기인 지난해 4월 16일 경기도 안산 화랑유원지에 마련된 세월호 희생자 정부 합동분향소에서 안산 단원고 학생들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사진=박종민 기자/노컷뉴스)
세월호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나쁜 나라'는 지난달 3일 개봉 이래 누적관객수 2만 명을 넘기며, 한국 사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이 영화를 위해 참사 뒤 1년여 동안 유가족들 곁에서 동고동락한 김진열(44) 감독은 "기록의 중요성을 피부로 느끼고 계신 유가족들의 모습이 놀라웠다"고 전했다.

"기성 매체들의 왜곡된 보도 행태 때문이었죠. 그래서 자신들을 오롯이 기록해 줄 수 있는 카메라의 필요성을 느끼고 계셨어요. 가족분들은 '우리가 기록으로 남긴 영상을 10~20년 지나 누군가 볼 것'이라고 믿고 계세요. 자신들의 행동이 기록을 통해 후대에서 평가를 받을 것이라는 믿음이죠."

최근 서울 자양동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만난 김 감독은 유족들에게서 자신의 언니, 오빠의 모습을 봤다고 강조했다. 유족들 역시 우리네 평범한 이웃으로 다가왔기에 "그분들을 더욱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가족분들의 살아오신 이야기를 기록했어요. 어린 시절 어떻게 자랐고, 어떤 과정을 통해 안산까지 오게 됐는지를 본인들의 입으로 들으면서 제 언니, 오빠의 삶과 정말 똑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비슷할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죠."

그는 "'인터뷰를 하겠다'고 단단히 마음먹고 유가족에게 다가갔다가도 첫 질문에서 눈물이 터지곤 했다"고 회상했다. 세월호 참사를 대하는 국가에 대해서는 "피해 가족들과의 약속을 이 정도로 철저하게 외면할 줄은, 없는 존재로 취급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국가는 참사 당시에도, 참사 뒤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고 질타했다.

"감정적으로 힘들었죠. 그런 과정이 계속 됐어요. 유가족들은 누군가 옆에 다가왔을 때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같이 갔으면 한다'는 부탁을 건넵니다. 나중에 본인들만 남게 될 것이라는 고립감이 큰 것이죠. 본인들이 자식을 잃었음에도 유가족들은 청소년들을 만날 때마다 항상 '미한하다'는 말을 하세요. 세월호에 대한 관심이 퇴색해 가는 현실에서 그분들에 대한 지지가 절실합니다."

▶ 영화 '나쁜 나라'를 간단히 소개하면.

= 평범했던 부모들이 세월호 참사로 자녀를 잃은 뒤, 다음 세대는 보다 안전한 사회에서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특별법 제정을 위해 싸워 온 기록을 담고 있다.

▶ 세월호 참사 당시 심경을 이야기해 줄 수 있나.

= 집에 있었다. 그날 아침 언니로부터 "뉴스를 보라"는 전화를 받았다. TV를 켜니 배가 침몰했다는 소식과 함께 '전원구조'라는 자막이 떠 있었다. 10~15분 정도 상황을 지켜보니 아이들이 모포를 덮고 이동하는 장면이 나오더라. 그래서 TV를 끄고 다른 일을 봤다. 그날 밤에 뉴스를 보면서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믿어지지 않았다. 모니터 안에서 배가 침몰하고 있었다. 그걸 집에서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 비현실적이었다.

개인적으로 5, 6년 전부터 영화제작 워크숍을 위해 안산을 출입해 왔다. 단원고가 안산 고잔동에 있는데, 그곳에서 시민, 청소년,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영화 제작 관련 수업을 한 것이다. 안산과는 그렇게 인연이 있었다. 안산에 가면 번화가인 고잔역, 중앙역을 주로 다녔는데, 그곳에서 학생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참사로 목숨을 잃은 단원고 학생들이 거리에서 마주쳤을 아이들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세월호 참사를 다룬 다큐 영화 '나쁜 나라'를 연출한 김진열 감독. 참사 뒤 카메라를 들고 유가족들을 곁에서 지켜봐 온 그는 "국가가 피해 가족들을 이 정도로 철저하게 외면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꼬집었다. (사진=시네마달 제공)
▶ 참사 이후를 영상으로 기록하는 작업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됐는지.

= 안산의 시민단체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를 만들어 기록을 했으면 한다는 것이었는데, 현재 416기억저장소의 모체다. 당시 전문가는 물론 일반 시민·학생까지 사진, 영상을 찍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누구든 함께하는 단위로 꾸려졌다. 처음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라는 마음이었다. 참사 뒤 한 달쯤 지났을 때 제안을 받았는데, 독립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는 제가 접근하기에는 너무 큰 사건이었고, 시기도 빠르지 않나라는 고민이 컸다.

기록으로 남길 엄두도 나지 않았다. 워낙 많은 매체의 카메라들이 안산, 진도 등에서 피해자 옆에 자리를 잡고 있어 '차별점이 있을까'라는 의구심도 들었다. 참사 뒤 1, 2년은 지나야 독립 다큐멘터리 진영에서 접촉이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함께할 전문가가 없다"는 말이 들려 왔다. 저와 비슷한 생각에 독립다큐멘터리 진영에서도 선뜻 나서지 않았던 것이다.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작업해 보자'는 마음으로 참여했다. '참사 피해자는 물론 일반 시민들이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는 기록을 남기자'는 바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부담도 조금은 덜어지더라.

▶ 얼마나 오래, 자주 기록했나.

= 시민기록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처음 카메라를 들고 가족분들께 다가간 때가 지난 2014년 5월 말, 세월호 참사 직후였다. 그 전에 한 달가량 세월호 가족대책위로부터 동의를 얻는 절차를 밟았다. 그 뒤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한 그해 11월까지 매일 가족 곁에 머물렀다.

▶ 가족대책위의 동의를 얻는 데 어려움은 없었는지.

= 오히려 그분들이 기록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셨다. 시민기록위원회 패찰을 차고 다녔는데, 거부감 없이 대해 주셨다. 경계심을 가지셨던 분들도 주변에서 "우리를 기록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면 이내 받아들이시더라. 물론 어떤 분들은 카메라가 다가가면 자리를 뜨셨다. 기록단이 어느 범위까지 동행하면서 찍을지는 가족위원회 총회를 통해 결정됐다. 기존 매체에 대한 유가족의 불신은 상당하다. 참사 직후 이들 매체의 왜곡된 보도 행태 탓이다. 그래서 자신들을 오롯이 기록해 줄 수 있는 카메라의 필요성을 느끼고 계셨다. 가족분들은 "우리가 기록으로 남긴 영상을 10~20년 지나 누군가 볼 것"이라고 믿으신다. 기록의 중요성을 피부로 느끼고 계신 그분들의 모습이 놀라웠다.

▶ 유가족들 곁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으면서 어떤 마음이었나.

= 카메라를 드는 건 두 번째 문제였다. 처음에는 그분들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얼굴을 마주볼 수 있을지조차 자신이 없었다. 당시 저는 대형참사 현장을 기록한 적이 없었다. 아이를 잃은 부모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초반에는 카메라를 손에 쥐고만 다녔다. 들고 찍지는 않았다. 그렇게 가족들 얼굴을 익혔다. 2014년 6월에는 가족분들이 진도체육관에 계셨기에 자연스레 함께 생활할 수 있었다.

그러다 한 달 뒤 세월호 특별법 재정으로 상황이 옮겨가 유가족들이 안산으로 올라오셨다. 가족분들이 당시 버스로 전국을 다니실 때 제가 동행했는데, 버스 안에서는 처음 2, 3일을 제외하고는 촬영을 할 수 없었다. 전국으로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을 받으러 다니시는 분들에게 버스 안은 그나마 개인시간을 가질 수 있는 사적인 공간이었다. 그곳에서는 카메라를 들 수 없더라. 나중에 편집 과정에서 선배가 "왜 버스 안에서 이미지컷을 안 찍었냐"고 하길래 "직접 가서 찍어보라"고 면박을 줬다.

무리 안에서 저로 인해 불편함을 느끼시지는 않을까 조심스러웠기에 초반에는 행동에 제약이 많았다. 기본적으로 유가족들 입장에서 저는 외부인이니까. 하지만 익숙해지기 위한 시간을 보낸 뒤로는 그것이 기우였다는 걸 알았다.

영화 '나쁜 나라' 스틸컷(사진=시네마달 제공)
▶ 유가족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무엇인가.

= "왜 아이들을 구하지 않았는지 알고 싶다"는 말이었다. 당시를 떠올려 보면 부모님들도 서로 얼굴을 익힌 시간이 얼마 안 됐다. 저녁에 숙소에 들어오면 3, 4명씩 잠자리에 드는데, 항상 아이들 이야기를 하시면서 울다가 잠이 드셨다. 옆에서 지켜보던 저로서는 아이를 잃은 부모들이 애도의 시간조차 갖지 못한 채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을 받으러 전국을 다녀야만 하는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슬픔과 분노가 포함된 복합적인 감정이 일더라. 가족분들은 오죽했을까.

▶ 곁에 머물면서 그분들의 아픔에 크게 공감했을 법하다.

= '왜 이런 참사가 일어나야만 했는지 알고 싶다'는 마음은 한결같았다. 제 경우 아이들을 직접적으로 알지는 못했지만, 그 부모님들을 통해 아이의 얼굴을 보게 되는 경험을 했다. '저 분은 누구 엄마, 누구 아버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부모님과 그 아이의 얼굴이 매치 되는 과정이었다. 부모님들의 외모, 성격을 접하면서 그 아이들을 이름만으로 떠올리는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형상화가 된 셈이다. 그래서 저는 현재 희생된 아이들과도 인연을 맺어온 듯한 느낌이 강하다.

▶ '공동체로 묶여가는 과정이었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무방할까.

= 저는 처음에 카메라를 들고 기록하는 사람으로서 그분들 곁에 있었다. 2014년 11월 특별법이 제정된 뒤 가족분들이 안산으로 다시 오셨다. 그때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분향소를 찾아 가족들이 아이들 사진을 든 영상을 찍었다. 그 전까지는 저에 대한 호칭이 "작가님" "PD님" 등 각각 달랐는데, 분향소에서 작업을 하면서는 "선생님"으로 바뀌었다. 제가 지닌 것을 가족들과 나누는 과정에서 가족분들과의 관계가 더 높은 단계로 넘어간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호칭이 변한 것에서도 '우리에게 도움을 주려 애쓰는 사람'이라고 보시는, 저에 대한 그분들의 인식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가족분들의 살아오신 이야기를 기록했다. 어린 시절 어떻게 자랐고, 어떤 과정을 통해 안산까지 오게 됐는지를 본인들의 입을 통해 들으면서 제 언니, 오빠의 삶과 정말 똑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가족분들이 저와 비슷한 연배여서 제 언니, 오빠가 살아 온 역사와 흡사할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분들을 더욱 가깝게 느낄 수 있던 계기였다.

▶ 가장 힘들었던 기억을 끄집어낸다면.

= 유가족들 곁에서 '카메라를 들어 기록을 하자'고 결심하기까지 2주가 걸렸다. 막상 기록을 시작했을 때는 생각보다는 힘들지 않더라. 가족분들에게 지금도 감사드리는 게 '품어주셨다'는 말처럼 많은 정보를 주시고 챙겨 주셨다. 가족분들이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을 받으러 다니시는 데 동행할 때도 감정적으로 힘들었다. 힘들어하는 가족들 옆에서 기록을 해야 했으니….

'인터뷰를 하겠다'고 단단히 마음먹고 갔다가도 첫 질문 하다가 눈물이 터지곤 했다. 그런 과정이 계속 됐다. 영화에서 긴 시간 동안 어머니들이 우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상황이 제게는 몹시 힘들었다. '나는 왜 거리에 서 있어야 하나'라는 가족분들의 복잡한 감정과 '저들은 왜 저러고 있나'라는 시선으로 지나쳐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너무 큰 괴리감을 느꼈던 까닭이다.

▶ 막상 다가가서 이야기를 나눠보면 유가족들 역시 우리네 평범한 이웃들인데 말이다.

= 앞서 언급했듯이 제 언니, 오빠와 비슷한 분들이다. 특별한 상황에 놓였던 분들도 아니고, 평범한 일상을 살던 중 참사를 겪었을 뿐이다. 가족분들이 회의에서 "무슨 무슨 일을 할 때 카메라가 동행하냐 마냐"라는 논의를 하시다가 "우리가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 지금 당장 판단할 수 없으니 후대가 우리를 평가할 수 있도록 기록으로 남기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시더라. 현재 자신들의 활동이 이후에 어떻게든 평가를 받을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도움을 줄 것이라는 점을 알고들 계신다. '기록이라는 것이 유가족들에게는 그러한 의미로 다가가고 있구나'라는 점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 곁에서 지켜보면서 그들의 아픔이 기성 언론을 통해 왜곡되고 있다는 점을 절감했을 텐데.

= 지난 2014년 7월 국회 농성을 진행할 때 제 위치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유가족들이 처음 농성을 시작할 때는 워낙 많은 카메라가 있었던 반면, 가족분들이 국회에 들어가서는 어떤 요구를 하는지 매체에서 전혀 나가지 않았다. 가족분들이 원하는 것은 특별법 제정에 대한 여야 합의인데, 그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 상황이 언론에는 나가지 않았다. 가족들이 국회 본청 앞에서 농성을 하면서 외부에 알리려 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우리 목소리를 밖으로 전해 주는 언론이 없다"는 가족들의 인식을 접하면서 "기록단이 나서서 이를 외부에 알려야 하지 않나"라는 내부 회의를 며칠간 했다. 우리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위해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계획을 가졌던 만큼, 그날 그날 가족들의 활동과 요구를 알리는 속보 영상을 찍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했다. 저 역시 개인적으로 다큐멘터리 작업자와 영상 활동가 사이에서 갈등을 했다. 결국 속보 영상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을 연결해 주는 걸로 정리를 했다.

▶ 다큐 작업자와 영상 활동가 사이 괴리감이 컸겠다.

= '도움이 되지 못하는구나'라는 생각까지 들었으니…. "사람들은 모른다" "국민들은 모른다"는 말이 가족분들 사이에서 돌았다. 국회 본청 앞에서 단식농성을 하는 상황이, 그분들이 어떤 요구를 하는지 알려지지 않았다고 본다. 기존 언론의 한계와 그에 대한 불신은 분명했다. 우리는 가족분들께 SNS 사용법을 알려 드렸다. 유가족들이 직접 카메라를 들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고, 그 결과물이 세월호 관련 이슈를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지금의 '416TV'다.

▶ 영화에서 생존 학생들이 등장하는 첫 장면에 대한 지적이 일었고, 결국 그 장면을 빼는 재편집을 결정해 애초 계획보다 개봉이 두 달이나 늦어졌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 우리 입장에서 가장 첫 번째로 고려해야 할 이들은 피해 당사자들이었다. 법적인 문제가 없다는 이유로 개봉을 강행할 사안이 아니었다. 생존 학생들은 이제 안산을 떠나 대학을 가는 등 흩어져야 하는 상황이다. 나름 꾸준히 소통의 절차를 밟아 왔음에도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우리 영화가 지난해 봄이나 초여름에 개봉했다면 큰 문제가 안 됐을 텐데, 생존학생들이 진로에 예민할 때를 개봉 시점으로 잡은 데 따른 문제였던 셈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세월호에 대한 관심이 퇴색하고 있다. 이에 대한 국민적인 문제제기나 공감대가 없는 상황에서, 생존 학생들이 또 다른 위기에 직면하도록 만들 수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매듭이 잘 지어졌다고 본다.

▶ 영화 개봉 뒤 기억에 남는 관객 반응을 꼽는다면.

= 고등학생들이었다. 개봉을 준비하면서, 편집을 마치고도 청소년들에 대해 크게 고민을 하지는 못했던 게 사실이다. 특별법 제정 과정을 다루고 있기에 참사에 관심을 지닌 시민들을 주요 관객층으로 잡았으니까. 그런데 개봉 고지가 나간 뒤 청소년들의 반응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왜'라는 물음을 갖고 세월호 참사에 접근하는 데서 '논술 세대 아이들은 뭔가 다르구나'라는 생각까지 들더라.

또래 집단이 희생 당한 참사라는 점에서 세월호는 청소년들에게 어느 세대보다 특별한 집중과 관심을 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개봉 뒤 유가족분들과 함께한 관객과의 대화에서 가장 뜨거운 반응을 보인 관객도 청소년들이었다. 가족분들이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 아이들을 키워서 함께 가자고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할 정도니…. 저 역시 그 청소년들을 보면서 '5~10년 뒤에는 이 아이들이 세월호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은 유가족분들과 안산에서 시사를 가진 적이 있는데, 단원고 1학년 학생들이 몇 명 왔더라. 그 학생들을 보는데, 먼저 간 아이들이 겹쳐졌다. 한편으로는 선배를 잃은 아이들이 영화를 지지하기 위해 왔다는 데 뭉클했다. 사실 유가족분들은 청소년 관객들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신다. 눈물이 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화 개봉 뒤 청소년 관객들 덕에 더 나은 세상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됐다.

영화 '나쁜 나라' 스틸컷(사진=시네마달 제공)
▶ 최근 진행된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제1차 청문회'를 보면서는 어떤 마음이었나.

= '졸속 청문회'는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이다. 유가족들도 애초에 청문회를 통해 새로운 것이 드러날 것이라는 기대는 안하고 계셨다. 그럼에도 청문회가 열렸다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고 싶다. 피해 가족들이 2년 가까이 길 위에서 투쟁한 열매로 만들어진 특별법 안에서 조사위원회가 구성됐고, 그 활동의 하나로 청문회가 열렸으니까. 당장 성과가 나타나지는 않더라도, 한 걸음씩 가다보면 국회 청문회도 열릴 수 있다고 본다. 진실을 향해 다가가는 과정인 셈이다.

앞서 국회에서 농성을 할 당시에는 조용한 밤시간을 활용해 가족분들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평소 다가서기 어려운 아버님이 한 분 계셨는데, 그분께서 "30년 뒤 80세가 되면 진실이 밝혀지지 않을까. 20년이든 30년이든 끄떡없이 갈 거다"라고 말하시더라. 그분의 휴대폰 화면에는 아이 사진이 걸려 있었다. 가족분들은 그런 마음이다. 힘들면 조금 쉬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 자리에 다시 서 계실 분들이다. 나쁜 나라 개봉 뒤 든 생각은 걱정했던 것보다 시민들이 잊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먼저 간 아이들과 함께 결국에는 우리 모두가 참사의 피해자다. 함께 가다보면 우리는 진실을 밝히고 내적인 성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 세월호 참사를 외면하려는 국가, 어떻게 다가오는지.

= 국가가 이렇게 무성의할 줄은 몰랐다. 참사 뒤 응답을 요구할 때 문을 걸어 닫고 그 어떤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말은 고사하고 가족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고 할 정도로 무응답이다. 이렇게까지 이 분들을 외면할 줄은 몰랐다. 처음에 유가족들은 몇 달이면 참사로 벌어진 상황이 정리될 것으로 봤다. 모든 국민이 슬퍼했고, 대통령도 청와대로 가족들을 초청해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피해 가족들과의 약속을 이 정도로 철저하게 외면할 줄은, 없는 존재로 취급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국가는 참사 당시에도, 참사 뒤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한편으로는 유가족들이 길 위에서의 싸움을 이렇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못했다. 가족분들이 상황에 따라 대안을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 문제를 선점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아이를 잃은 분들이기에 타협하거나 멈추지 않을 것이다. 대학 시절 기억 한 편이 있다. 광주 5·18 학살에 대한 책임으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형사처벌을 받는다는 소식을 버스 안에서 접했던 기억이다. 그때 든 생각이 "결국 처벌을 받네" "달걀이 바위를 깼구나"라는 것이었다. 세월호 유가족들을 보면서 그때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결국 어느 시기가 되면 가족들이 원하는 상황이 만들어질 거라고 본다.

▶ 우리는 왜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애도해야 할까.

= 제 조카가 고3이다. 고등학생이면 누구나 수학여행을 간다. 세월호를 타고 제 조카가 수학여행을 갔을 수도 있는 것이다. 처음 참사 소식을 접했을 때 아득한 느낌이 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얼마 전 관객과의 대화를 하는데, 한 대학생이 참사 일주일 전에 세월호를 타고 제주도에 다녀왔다고 하더라. 어떤 학생들은 선생님을 졸라서 나쁜 나라를 보러 왔는데, 제주도에서 수학여행을 즐기고 있을 때 세월호 참사 소식을 들었다더라. 그 중 한 학생은 제주에서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쟤네들은 살았네"라는 수근거림을 들었다는 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결국 세월호 참사는 '나'와 먼 일이 아니라는, 내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참사의 피해자가 될 수 있기에 이를 예방할 수 있는 시스템을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 희생의 대가가 너무도 혹독했다. 무엇보다 어린 학생들이 많았다. 아이들은 국가·선원들이 구해줄 것이라 믿었지만, 정작 그들은 본인들 살기에 바빴다. 어른으로서 부끄러울 뿐이다. 유가족분들은 본인들이 자식을 잃었음에도 청소년들을 만나면 항상 "미한하다"는 말을 하신다.

결국 그분들에 대한 지지가 절실하다. 유가족들은 누군가 옆에 다가왔을 때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같이 갔으면 한다"는 부탁을 건넨다. 나중에 본인들만 남게 될 것이라는 고립감이 큰 것이다. 관심은 커다란 데 있지 않다고 본다. 세월호 관련 이야기를 인터넷에서 찾아 읽고, 노란 리본을 다는 데서부터 관심 어린 행동이 싹틀 테니까.

[CBS노컷뉴스 이진욱 기자] jinuk@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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