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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값도 못하냐" "너 실적 못내면 우리가 죽어"

입력 2016. 02. 12. 09:26 수정 2016. 03. 11.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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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노동자 24% ‘직장 내 괴롭힘’ 시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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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병원에서 근무했던 간호사 ㄱ씨는 임신 뒤 선임의 괴롭힘 탓에 사직서를 냈다. ㄱ씨는 “간호사들 사이에는 암묵적으로 임신하는 순서가 정해져 있는데, 예상치 않게 원래 순서보다 일찍 아이를 갖게 됐다. 그때부터 행동 하나하나에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못 견디고 퇴사했지만, 다른 간호사는 결국 중절수술을 하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말했다.

11일 발표된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서유정 부연구위원의 ‘직종별 직장 내 괴롭힘’ 연구 결과에 나온 한 간호사의 경험담이다. 이 연구 결과는 한국직업능력개발원에서 수행한 ‘직장 따돌림의 실태조사와 방지 방안 연구: 제조업을 중심으로’ 외 2건의 연구와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여성 근로자에 대한 직장 내 괴롭힘의 실태와 보호방안 보고서’의 데이터를 통합해 분석한 것이다. 분석에 활용된 4건의 연구 데이터는 모두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개발한 직장 괴롭힘 측정도구인 ‘KICQ’(Korean Interpersonal Conflict Questionnaire)를 활용해 측정됐다. 연구 결과를 보면 일본에서 ‘파워 하라’(power harassment, 성희롱을 가리키는 sexual harassment에 빗대, 힘과 괴롭힘을 합친 조어)라는 신조어까지 낳았던 직장 내 권력관계에 의한 괴롭힘 현상이 국내에서도 만연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직까지 국내에선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개념이 사회문제로 부각되지 않았지만, 노동자의 인격권 침해와 함께 정신적·신체적 건강에도 해를 끼친다는 점에서 이를 막기 위한 정책적 접근이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유럽, 미국 등에서는 성희롱과 마찬가지로 직장 내 괴롭힘을 금지하는 법이 시행되고 있다.

간호사, 아이티(IT) 서비스, 금융·보험, 매장 판매, 기계 관련 서비스, 공공 부문, 전자, 철강 등 국내 8개 업종 노동자 206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이번 조사에선, 23.6%가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간호사 등 특정 직군에 대한 직장 내 괴롭힘 실태조사를 정례적으로 실시하는 영국의 피해 응답률이 평균 10% 정도인 것과 비교하면 2배 이상 높은 수치다. 구체적 유형으로는 모욕감을 주는 말이나 행동 하기, 사소한 일로 트집 잡기, 성과 가로채기, 뒷담화하기, 업무 몰아 맡기기, 휴식·업무시간에 과도하게 감시하기, 업무 성과 불인정 등이 꼽혔다.

사소한 일로 트집잡기
간호사 ㄴ씨: “링거 교체나 투약이 1~2분, 심지어 몇십초만 지체돼도 ‘환자가 잘못되면 책일질 거냐’, ‘게으르다’며 다그치는 경우가 많다. 정작 이렇게 혼나거나 다그침당하다가 환자 케어가 지체되는 일도 있는데, 그땐 또 그 책임까지 떠안게 된다.”



성과 가로채기
금융보험업 종사자 ㄷ씨: “금융상품을 고객한테 소개하고 가입하도록 하는 업무를 하고 있는데, 입사 초기 선임 직원이 결과 보고를 도와준대서 믿었더니, 내가 올린 실적을 대부분 선임 직원의 실적으로 보고하고 있었다.”





뒷담화 하기
금융보험업 종사자 ㄹ씨: “관리자로 승진하면서 새로운 지점에 발령났는데, 업무방식이 비효율적인 측면이 있었다. 새로운 업무지침 만들어 업무 능률이 향상됐지만, 오히려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는 식으로 기존 직원들 중심으로 뒷담화가 퍼지더니, 결국 지점장 등 상사들한테도 ‘관리자로서 역량 부족 아니냐’는 지적을 듣고 있다.”





휴식 및 업무의 지나친 감시
공공기관 종사자 ㅂ씨: “업무진행과 휴식시간에 모두 폐회로텔레비전(CCTV)으로 감시하는 것 같다. 휴식시간 10분이 종료해서 업무 수행하러 돌아가고 있는데, 관리자가 달려 내려와 닦달하고 소리를 쳤다.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모욕감을 주는 언행 및 음주 강요
아이티(IT)서비스 업종 종사자 ㄱ씨: “입사한 직후였는데 선임들이 친해지기 위한 놀이라며 옷을 찢거나, 즐기지도 않는 화투·카드놀이에 끼라고 강요하곤 했다. 돈을 다 잃었는데도 억지로 계속 시키더니, 나중에 노름빚을 진 거라며 돈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업무 몰아 맡기기
기계관련 서비스 종사자 ㅁ씨: “신입으로 입사했는데, 고객들이 맡긴 수리 업무를 집중적으로 나한테 몰았다. 주중 야근은 기본, 주말에도 나와서 일했지만 결국 제 시간에 다 수리하지 못했는데, 그 뒤로 계속 ‘일을 못한다’며 비난하고 있다.”

서비스업이 괴롭힘 가장 많아
간호사·IT서비스 10명중 4명이 피해
공공부문·제조업 비해 크게 높아
“서로 밀착된 관계속 일하기 때문”

성과주의 확산이 한몫
실적 가로채기…업무 몰아주기…
금융보험 등 실적경쟁 심한 직종
업무 연관 괴롭힘 현상 두드러져

직종별 피해 응답률은 간호사 직군에서 41.3%로 가장 높았다. 이어 아이티 서비스(40.0%), 금융·보험(39.4%), 매장 판매(36.3%), 기계 관련 서비스(36.3%) 등 서비스 업종에서 비율이 높게 나타났다. 공공 부문인 정부부처·공기업은 24.0%의 응답률을 보였고, 제조업인 전자(10.3%), 철강(4.9%)은 응답률이 낮았다. 서유정 부연구위원은 이에 대해 “서비스업 사업장은 종사자 사이에 밀착된 관계가 형성되고, 정서적·감정적 폭력을 끊어줄 중간지대가 없어 직장 내 괴롭힘에 취약한 구조인 경우가 많다”고 해석했다. 성별(남 23.0%, 여 25.3%), 정규직 여부(정규직 40.0%, 비정규직 38.3%) 등에 따른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 비율은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괴롭힘 유형도 직종별 차이가 있었다. 금융보험·기계 관련 서비스·공공 부문을 제외한 5개 업종에서는 ‘사소한 일로 트집 잡기’가 가장 빈번한 괴롭힘 유형으로 꼽혔고, 금융보험 직종에서는 ‘업무 성과 불인정’, 기계 관련 서비스는 ‘업무 몰아주기’, 정부부처·공기업에선 ‘휴식 및 업무의 지나친 감시’가 가장 잦은 괴롭힘 유형으로 조사됐다. 금융 부문은 실적 경쟁이 심한 점, 기계 관련 서비스 직종은 업무 절대량이 많은 점 등이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번 실태조사에서는 ‘성과주의’ 확산이 직장 내 괴롭힘과 연관성을 갖는다는 정황도 드러났다. 성과주의 모델이 자리잡은 금융보험과 아이티 서비스 업종에서 업무와 직접적으로 관계된 괴롭힘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먼저 금융보험 직종에서는 ‘업무 성과 불인정’과 ‘업무 몰아주기’ 등이 가장 빈번한(각각 6개월간 10.29건, 9.49건) 것으로 조사됐다. 아이티 서비스 업종에서도 ‘업무 성과 불인정’(6.58건) ‘승진 및 보상 차별’(6.33건)이 각각 2·3번째로 빈번한 유형인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해 11월 민주노총 사무금융노조가 발표한 ‘직장 내 괴롭힘 실태조사 보고서’에서도 ‘성과주의와 실적 압박’이 직장 내 괴롭힘의 주요한 원인으로 제시됐다. 실제 한 증권사 직원은 보고서에서 “‘그렇게 해서 밥값도 못 해가지고 살겠냐’ ‘고등학교는 나왔냐’는 등 인격적인 공격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니가 싫어서 갈구는 줄 아냐. (실적이 안 나오면) 위에서 죽는다” 등 집단주의 조직문화와 결부된 ‘내리갈굼형’ 질책도 많았다. 서유정 부연구위원은 “직장 내 괴롭힘이 개인적 관계망을 넘어서 조직적으로 활용되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 같다”며 “정책적 해법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노현웅 기자 goloke@hani.co.kr

‘직장 내 괴롭힘’이란 직무상 지위 등 권력관계를 바탕으로 업무 범위를 넘어 노동자에게 정신적·정서적 고통을 주거나, 업무 환경을 악화시켜 노동자의 인격과 존엄을 해치는 일체의 행위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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