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냉면 예찬

한현우 주말뉴스부장 2016. 5. 21.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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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날 문득]

다시는 젊은 후배들과 평양냉면을 먹으러 가지 않을 것이다. 미각(味覺)만 아직 미성년에 머물러 있는 그들에게 한 그릇 1만원짜리 냉면을 사줘봐야 '뭐 이런 걸 먹으러 택시를 타고 오나' 하는 표정을 지을 뿐이다. 그들은 심지어 냉면의 5분의 3을 남기고 "잘 먹었습니다"라고 말한다. 먹은 게 없는데 도대체 뭘 잘 먹었다는 말인가.

함경남도 함흥에서 월남하신 아버지와 함흥 아래 작은 동네 고원에서 오신 어머니 밑에서 태어나 주야장천 함흥냉면을 먹어온 나로서는, 평양냉면과의 전쟁에서 완패한 함흥냉면 신세가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의 본질에서는 모르되 정치·사회·경제적으로 평양냉면이 우위에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서울 을지면옥은 그중에서도 나의 평양냉면 이력 대부분을 차지하는 집이다. 다른 집보다 면의 메밀 함량이 적어 쫄깃한 국수, 돼지 껍데기와 피하지방이 적당히 섞인 고기 한 점과 편육 한 점이 담긴 이 집 냉면은 여름이든 겨울이든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쇠고기 육수와 동치미 국물을 어떤 비율로 섞었는지 알 수 없는 냉면 육수는 그 정점에 있다. 결코 달지 않고 짜지 않고 시지도 않고 심지어 그다지 차갑지도 않지만, 그릇째 들고 들이켰을 때 이미 나의 입술은 이 말을 하려고 달싹거린다. "아, 참 시원하고 달다." 나는 냉면을 먹으며 이 맛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한국인임이 자랑스러울 지경이다. 그러므로 평양냉면은 이북식으로 '국수'라 불러야 마땅하다. '물냉면' 또는 '물냉'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것을 고깃집 3000원짜리 후식 물냉과 동격화하는 행위이다.

일찍이 백석은 겨울 냉면에 고졸(古拙)한 헌사를 바쳤으나 입맛 없고 숨 턱턱 막히는 초여름, 백석을 표절해 냉면을 칭송하지 않을 수 없다. 땀과 씨름한 새벽을 기어이 일어나/ 밥 몇 숟가락 찬물에 말아먹고 출근한 아침/ 이 반가운 것을 생각하매 일도 즐겁고 동료도 살가워/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빌딩숲 월급쟁이의 하루를 반으로 쩍 가르며 오는 이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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