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 안 보는 생리' 배려 아닌 인권문제

양진하 입력 2016. 6. 4. 0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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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리대 가격인상에 여론 불붙어

언급조차 금기 삼은 사회 꼬집어

직장인 76% “생리휴가 쓴 적 없다”

유엔 “부정적 시선은 인권침해”

권리로 가르치는 인권교육 필요

초등학교 6학년 첫 생리를 시작한 김모(28)씨는 당시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건강한 여성이 됐다”며 부모에게서 축하 꽃을 받았다. 하지만 축복은 그 때뿐, 생리는 이내 꼭꼭 숨겨야 할 월례 행사가 됐다. 학창 시절엔 같은 반 남학생들이 생리 중인 것을 알아챌까 늘 전전긍긍했다. 생리통이 심해 어쩌다 보건실에 가야 할 때는 “체했다”고 둘러대곤 했다. 몸이 심하게 붓는 등 유독 생리 후유증이 심했던 그는 직장에 다니면서 어려움이 더 커졌다. 김씨는 3일 “생리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지금도 몸이 아프면 ‘유난 떤다’며 못마땅하게 여기는 직장 동료들이 적지 않다”고 토로했다.

한국 여성들은 맘 편히 생리할 권리도 없다. 여성이 한 달에 한 번씩 겪어야 하는 신체 변화는 개인이 감내해야 할 당연한 고통으로 치부돼 왔고, 생리의 속사정을 끄집어 내려는 일부 여성단체의 권리 찾기 운동도 외면 받기 일쑤였다. 하지만 최근 가격 인상으로 불붙은 생리대 논란을 계기로 생리를 복지나 시혜의 대상이 아닌 인권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난달 국내 생리대 시장 과반을 점유한 유한킴벌리의 기습적인 가격 인상 발표는 생리를 대하는 사회적 논의를 촉발시켰다. 생리대를 살 돈이 없어 ‘신발 깔창을 속옷에 덧대 쓰는 친구가 있었다’ 등 저소득층 청소년들의 사연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공개되면서 반응이 터져 나왔다. 반응 중에는 여성의 필수품인 생리대 가격을 일방적으로 올린 기업의 비도덕성을 질타하는 내용이 많았다. 실제 한 번 생리 때 드는 생리대 평균 구입 비용은 2, 3만원 정도다. 생리대에 부과된 부가가치세가 면제된 2004년 이후에도 가격은 꾸준히 인상됐다.

그러자 여론 동향에 민감한 정치권과 지방자치단체가 발빠르게 나섰다. 전북 전주시와 경기 성남시 등은 저소득층 여학생을 대상으로 ‘생리대 지원’ 방침을 밝혔고, 설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일 학교가 생리대를 마련해 비치하도록 하는 내용의 학교보건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다수 논의가 생리대 가격의 적정성과 공급을 따지는 시장논리 차원에 그치고 있어 ‘생리→임신→출산’으로 이어지는 생리의 공적 역할을 제대로 짚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다. 여론의 높은 관심에도 논의가 지지부진한 것은 그간 남성중심 사회에서 생리를 언급하는 자체를 금기시한 탓이 크다. 실제로 생리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남성들은 여성의 신체 변화 과정을 정확히 알기 어렵다. 직장인 정모(31)씨는 “‘한달 정도를 주기로 일주일 정도 출혈과 통증이 있다’고 학교에서 배운 내용이 전부”라며 “얼마나 아픈지, 생리대 가격이 얼마인지 등은 굳이 몰라도 될 것 같아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말했다. 무지는 곧 혐오로 이어지기도 한다. “생리를 평일에 참았다 주말에 하면 되는 것 아니냐” “임신하면 생리를 안 할 테니 임신을 해라” 등과 같은 악의적 반응이 대표적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여학생이 생리통으로 수업에 빠질 경우 공적 결석으로 처리해주는 ‘생리공결제’나 법으로 보장된 직장인의 ‘생리휴가’에도 부정적 여론이 압도적으로 많다. 2014년 20~30대 여성 직장인 1,3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아예 생리휴가를 쓴 적이 없다는 응답이 76%나 됐다. ‘상사에게 눈치가 보여서(42%)’ ‘주위에서 아무도 사용하지 않아서(36%)’ 등 외부의 따가운 시선이 주된 이유였다.

전문가들은 더 이상 개인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으려면 생리를 여성 재생산 활동의 기초로 존중하고 인권 대상으로 개념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지난해 유엔 경제사회문제 인권사무소도 “생리에 대한 부정적 시선은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각국 정부에 생리ㆍ위생 관련 대책을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이상화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교수는 “생리대 지원정책 만으로는 모든 사회 구성원이 생리를 여성의 권리로 인식하게 할 수 없다”며 “어릴 때부터 생리는 자연스러운 몸의 변화고 더럽거나 숨길 것이 아니라는 인권 교육이 수반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생리대 가격 인상 논란을 계기로 여성의 생리를 복지나 시혜의 대상이 아닌 인권 문제로 여겨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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