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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

[정희진의 낯선 사이]혐오는 대칭적이지 않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입력 2016. 06. 12.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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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여성혐오는 인류 문명과 함께 시작되었지만 이 단어는 최근에서야 한국사회에 알려졌다. 여성혐오로 인한 살인은 놀라운 뉴스도, 새로운 현상도 아니다. 마치 조선시대에도 성폭력은 있었지만 ‘성폭력’이라는 단어는 없었던 것과 같다. 이 말은 영어 미소지니(misogyny)의 번역이다. 부정적 의미의 접두사 ‘mis~’와 여성을 뜻하는 ‘gyn’의 합성어다. 여성 외에도 외국인, 동성애자, 나이든 이들, 공산주의자 등이 혐오의 주요 대상이 되어 왔다. 외국인에 대한 제노포비아, 동성애자에 대한 호모포비아가 그것이다.

번역의 과정은 정치적이다. 그 결과 또한 정치적이다. ‘미소지니’가 꼭 ‘여성혐오’로 번역되어야 했을까. 영어권에서 “싫다”를 뜻하는 다른 표현으로 hate, disgust 등이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여성학자 우에노 지즈코의 책 <여성을 싫어하는 일본의 미소지니(女ぎらいニッポンのミソジニ-)>가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된 것은 유감이다. 일본에서는 영어 그대로 ‘미소지니’라고 쓴다. 인터넷, 버스, 치즈처럼 우리에게 없던 물건이어서 그대로 사용해도 오해가 없는 말과는 달리, 여성혐오처럼 논쟁적인 단어가 직역된 것은 문제다.

모든 번역은 의역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의역은 ‘직역 vs 의역’에서의 의역이 아니다. 사실 직역은 가능하지 않다. 어떤 사회에는 있는 사물이나 현상, 그것을 표현하는 단어가 다른 사회에는 없을 수 있다. 이때 직역을 하면 없는 것을 만들어내거나 다른 문제로 대체된다. 식혜와 요구르트의 원리는 비슷할지 모르지만 같은 것이 아니다. 두 사회 간의 문화적 차이를 고려한 번역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번역은 문화의 이동이자 새로운 문화의 탄생, 끊임없는 이접(移接)의 과정이다. 그것을 같게 하려는 순간, 식민주의적 동화가 일어난다. 같음의 기준은 그 말의 원산지(대개 서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렌지는 ‘어륀지’가 될 수 없고, ‘빤스’(pants)는 원래 뜻인 바지가 아니라 속옷(inner wear)을 의미한다. 란닝구, 스레빠 모두 우리말이다.

여성혐오는 분명한 현상이고 정확한 말이다. 문제는 미소지니가 여성혐오로 번역되면서 본뜻이 왜곡되는 한국의 남성 중심적 문화다. 이 문제는 여성에게 난관을 가져왔다. 일단, 사소한 문제로는 혐오(嫌惡)라는 단어의 어감이 너무 강력해서(‘악’이라고도 읽지 않는가) 남성들로 하여금 ‘혐오’를 방어해야 한다는 적반하장의 태도를 갖게 했다.

다음은 일부 남성들의 여성혐오에 대한 전형적인 반론이다. “아니, 제가 얼마나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데요, 여자 싫어하는 남자 있나요? 그런데 혐오라니요!”, “우리나라처럼 여성의 지위가 높은 나라가 없어요. 우리 엄마는 독재자예요. 아버지, 저희들 모두 꼼짝 못해요. 여성이 차별받는다는 얘기도 기가 막힌데, 여성을 혐오한다고요?”, “솔직히 한국 남자들처럼 불쌍한 사람들도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남자를 혐오하는 사회예요. 남자가 한 마디하면 여자는 열 마디 합니다”. 이 이야기들을 차례대로 해석하면 남성들은 이성애 제도, 가정에서 여성의 성역할 노동,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여성 상위’로 착각하고 있다.

무엇보다 ‘여성혐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남성혐오라는 대칭적 용어의 발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혐 vs 남혐’이라는 이분법이 그것이다. 이분법은 A와 not A라는 타자화의 문법으로, 평등으로 생각하기 쉬운 속임수다. 미소지니라면 다르지 않았을까. 미소지니는 대립 구도를 만들어내기 힘든 단어다. 그대로 수용될 수 있다. 남성 위주 사회는 너무 오래된 역사라서 여성에 대한 비하와 차별은 남녀 모두에게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이를 자각하고 여성이 자신의 이중노동, 여성에 대한 폭력을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이 혐오인가?

혐오는 기본적으로 약자에 대한 강자의 감정이다. 이에 반해 약자는 강자를 선망, 동일시, 시기, 분노하는 감정이 크다(가해자의 분노와 피해의식이라는 현상도 있긴 하다). 분노와 혐오는 반대말에 가깝다.

영어권에서 남근 선망(penis envy)에 ‘대응’하는 ‘페니스 헤이트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있으나 남성혐오와는 다르다. 혐오는 특정 대상을 싫어하는데, 그 이유가 자기 자신에게 있다. 자기 문제의 반영이자 합리화다. 혐오는 자신과 타인의 인간성을 훼손한다. 악플이 대표적이다. 이에 반해 분노는 자신을 억압하는 대상에 대한 정당한 판단이며 스스로를 격려하고 존중하는 힘이다(empowering). 이처럼 혐오와 분노는 이유, 양상, 효과가 전혀 다른 인간 행동이다.

다른 사회운동에 대입해 봐도 ‘남혐’은 어불성설이다. 구의역 사건에 대한 시민들의 애도가 서울시(민)에 대한 혐오인가? 장애인의 이동권 투쟁이 비장애인에 대한 혐오인가? 동성애자들의 인권 운동이 이성애자에 대한 혐오인가?

말할 것도 없이 여성과 남성의 관계는 동등하지 않다. 인간의 개념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여성은 최초의 타자였다. 인류 역사상 여성과 남성은 단 한 번도 같은 위치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 양성(兩性), 부부(夫婦), 음양(陰陽) 등의 용어와 이성애 제도가 남녀를 대칭적인 존재처럼 보이게 만들었을 뿐이다. 나는 여성혐오를 혐오하지 않는다. 나는 미소지니를 우려하고 저항하고 분노한다. ‘강남역의 그녀’가 맞이했던 고통의 순간, 죽음의 공포처럼 무서울 뿐이다.

<정희진 | 여성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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