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저금리로 시중에 풀린 돈이 갈 곳을 잃었다. 시중에 떠도는 단기 부동자금이 올 들어 15조원 가까이 불어나며 945조원을 돌파했다. 저성장 추세가 장기화되는 데다 금융불안까지 겹쳐 시중자금이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있는 탓이다. 한국은행이 아무리 돈을 풀어도 실물경제에 스며들지 못하고 금융권에서 맴도는 ‘돈맥경화’ 현상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셈이다.

19일 한국은행과 금융투자협회 자료를 분석해보면 지난 4월 말 기준 단기 부동자금은 945조2000억원으로 지난해 말(931조3000억원)보다 13조9000억원 증가했다. 이 같은 추세라면 5월부터 연말까지 8개월 동안 약 28조원이 늘어나 973조원이 넘을 것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단기 부동자금은 현금과 사람들이 금융사에 맡긴 만기 1년 미만의 자금을 합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현금, 요구불예금, 수시입출식 저축성예금 등이 포함된다.
2012년 말 664조4000억원이었던 단기 부동자금은 2014년 794조8000억원으로 800조원에 육박했고, 지난해 931조3000억원으로 1년 사이에 130조원 이상 늘었다. 지난해 한은은 기준금리를 연 2.0%에서 두 차례 내려 연 1.50%까지 인하했다.
최근 들어서는 은행이 금리를 낮춰도 돈이 더 몰리는 기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한은이 지난 9일 기준금리를 연 1.25%로 0.25%포인트 내린 뒤 은행들은 수신금리를 줄줄이 인하하고 있지만, 은행 수신액은 일주일 동안 10조원이나 늘었다.
은행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우리·KEB하나·NH농협은행의 원화예수금 잔액은 지난 9일 973조6249억원에서 5영업일 후인 지난 16일 984조401억원으로 10조4152억원 늘었다. 원화예수금은 원화예금과 양도성예금증서 등을 합한 것이다.
5대 은행의 정기예금은 같은 기간 497조5107억원에서 498조5468억원으로 1조361억원 증가했다. 정기적금은 41조9232억원에서 41조9875억원으로 643억원, 요구불예금은 383조1222억원에서 390조1024억원으로 6조9802억원 늘었다. 은행별 증가액을 보면 농협은행이 3조7684억원으로 1위고, KEB하나은행(1조4820억원), 우리은행(1조2900억원), 신한은행(9721억원)이 뒤를 이었다. 국민은행은 활동성 고객(입출금이 활발한 고객)이 가장 많아 5323억원 감소했다.
이날 금융감독원 자료에 따르면 지난 1분기 국내은행의 요구불예금잔액(평잔기준)은 154조1170억원으로 전분기에 견줘 20조7425억원이 늘었다. 이는 17년 만의 최대 규모 증가로, 이전에는 작년 1분기(10조1906억원)가 최대였다. 특히 올해 1분기 증가액은 1999년 이래로 연간 최대 증가폭을 보인 작년 기록(20조620억원)조차 뛰어넘었다.
이처럼 단기 부동자금이 불어나는 것은 그만큼 장기 투자처를 찾기 힘들다는 의미다. 코스피는 2011년 무렵부터 1900∼2100선을 왔다 갔다 하는 박스권에 갇혀 있어 큰 수익을 내기 힘들다. 올해 들어 아파트 매매가 상승률은 지난해보다 한풀 꺾여 투자처로서 매력이 떨어졌다. KB주택가격동향 자료를 보면 서울의 아파트 매매가격은 지난해 1∼5월 715만원 올랐지만, 올해 같은 기간 동안 457만원 상승했다.
최근에는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를 놓고 벌이는 영국의 국민투표가 다가오면서 금융시장도 난기류에 휩싸였다.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 가능성도 여전한 불안요인이다. 정희수 하나금융경영연구소 개인금융팀장은 “글로벌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한 안전자산 선호, 예·적금의 단기화 현상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문제는 단기부동자금이 금융과 경제불안의 불씨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들 자금이 증시나 부동산 등에 한꺼번에 쏠릴 경우 자산거품을 양산하며 금융과 경제불안을 증폭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경기부양과 더불어 구조개혁의 정공법이 긴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지난 9일 금융통화위원회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경기 회복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통화정책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재정정책이 같이 가야 한다”며 “현재의 저상장 추세는 구조적 요인이 상당히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구조개혁도 같이 가야 한다”고 말했다.
오현태 기자 sht9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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