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한국 사회] 허현회의 죽음

입력 2016. 8. 16.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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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

그는 명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한때 언론사에서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전형적인 80년대 학번이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정의로운 청년들처럼, 그는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의 문제를 인식했고 혁명을 원했다. 미국 군산복합체의 문제에 천착했던 그의 첫 저서는 록펠러 일가를 다룬 <그들은 어떻게 권력이 되었는가>였다. 언젠가부터 그는 의학계와 제약업계로 관심사를 넓히더니, 결국 의약학계에 대한 음모론적 시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허현회, 지난 7월8일 55살 나이로 원주의료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사망 원인은 당뇨 합병증으로 인한 결핵이다. 당뇨와 결핵 모두 현대의학으로 치료가 가능한 질병이지만, 그는 의사의 처방을 거부하고 자연치유로 두 질병을 이겨내려다 아까운 생을 일찍 마감했다. 그는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질병들이 의사 집단에 의해 날조된 것이며, 실제로 의사들은 우리의 건강과 질병에 대해 대부분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스스로의 신념에 충실했고, 그로 인해 죽음을 맞았다.

허현회의 죽음을 해프닝으로 넘기기엔, 그의 죽음이 한국 사회에 남긴 여운이 작지 않다. 한때 그의 책은 베스트셀러였고, 그를 따르는 상당히 많은 시민들이 있었다. 언론은 그를 조명했고, 그의 발언을 제지하는 단체는 없었다. 허현회의 이론은 전문지식 없는 시민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의사협회는 그를 조롱했을 뿐, 공식적인 방법으로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심지어 정부조차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언론은 허현회를 흥밋거리로 다뤘다. 그는 마치 사이비교주처럼 대중 사이에 퍼져나갔다.

허현회는 개인이었다. 한 개인이 한국 의사집단처럼 최고의 두뇌들을 제치고 의학계를 이렇게 뒤흔들 수 있다는 데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허현회라는 개인이 한국 사회에서 이토록 큰 권위를 얻게 된 이유를 따져 물어야 한다. 어쩌면 그 기저엔 한국 사회가 지닌 과학적 삶의 양식의 부재가 있는지 모른다. 과학적 삶의 양식은 과학적 사고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과학을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익혔을 때에야 나타나는 삶의 태도에 가깝다. 근거 없는 소문을 들었을 때 경험에 기대 의심해보고,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 최대한 많은 이들의 의견을 묻고, 폐쇄적인 의사결정보다는 열린 의사결정의 건강함을 따르고, 권위가 아니라 합리적 민주주의의 힘을 믿는 것, 이 모든 상황들이 과학적 삶의 양식이 정착한 사회라면 자연스레 나타나는 문화다.

한국은 전 국민이 혈액형별 성격을 아주 당연한 듯 믿고 사는 사회다. 인종차별은 나쁜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혈액형별 성격은 농담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과학 없는 사회도 가능하다. 그런 사회가 얼마나 건강할지는 장담하지 못한다. 하지만 과학 이후의 사회는 다르다. 우리는 과학이 주는 삶의 태도들을 통해 사회를 건강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 사회는 최소한의 근거에 기대야 한다.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돌고, 인간은 진화한 것이다. 과학적 토대 위에서 민주주의는 더 멋진 체제가 된다. 과학은 그렇게 삶에 봉사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한다. 허현회는 개인이었다. 문제는 개인이 아닌 권력의 비과학성이다. 권력이 비과학적인 태도로 우리 삶을 조종할 때, 그것은 해프닝이 아닌 학살이 된다. 창조과학자를 과학정책의 결정권자로, 영구기관을 믿는 자를 과학기술 연구비 심사위원으로 임명하는 권력은 위험하다. 그 위험에 더 이상 시민들을 노출시켜서는 안 된다. 허현회의 죽음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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