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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창]대한민국 헌법의 역사관

전우용 역사학자 입력 2016. 08. 18.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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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48년 7월17일에 공포된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로 시작했다. 글 첫머리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넣은 것은 대한민국 헌법 제정이 민족사 전체에서 점하는 위치를 분명히 하려는 의지의 산물이었다. 이듬해 10월1일에 공포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은 이 의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이 법률에 따라 국경일로 지정된 날이 개천절, 삼일절, 광복절, 제헌절인바, 이는 대한민국의 ‘유구한 역사’를 법률로 명시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환웅이 신시에 도읍한 날(개천절)로부터 시작해 면면부절 이어지다가 1910년 일제 침략으로 일시 국권을 잃었으나, 1919년 3월1일 온 민족의 총의를 모아 독립을 선포하고(삼일절),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가 주권을 위임받아 영토와 인민을 완전히 수복하기 위해 투쟁한 끝에, 1945년 8월15일 일본을 몰아내고 광복을 이루었으며(광복절), 1948년 7월17일 헌법을 제정함으로써(제헌절) 다시 온전한 국가를 이루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런데 제헌헌법 전문과 국경일에 담긴 역사 계승 의식에 모든 국민이 동의하지는 않았다. 개천절은 1909년부터 대종교인들이 기념해온 종교적 축일이었던 것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경일로 삼은 데에서 기원했다. 개천절 지정의 근거인 단군신화를 둘러싸고는 학문적, 종교적으로 다양한 견해가 있었다. 신화로 각색되었을 뿐 환웅과 단군은 분명히 실재한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단군신화는 후대에 날조된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단군신화가 교리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며 강경히 반대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취임 선서를 할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이승만조차 개천절 지정을 거부하지 않았다. 자기 개인의 종교적 신념보다는 ‘국민통합’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리하여 단군은 국민통합의 상징으로 공인되었다.

삼일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해서도 이견이 많았다. 어떤 사람은 삼일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의 군대인 광복군이 연합군과 함께 일본군을 격퇴했다고 주장했고, 또 어떤 사람은 임시정부는 일개 독립운동 단체로서 공연한 희생자만 내었을 뿐 독립에 기여한 바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 양극단 사이에 여러 절충적인 생각들이 폭넓은 스펙트럼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제헌헌법은 이들 중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다는 견해만을 채택했다. 이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유권해석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이 공유해야 하는 역사관에 대한 선언이었다. 대한민국은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이 일본군을 격퇴함으로써 세워진 나라가 아니라,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선열들의 피로 세운 나라라고 천명한 것이며, 이런 역사관이 국민통합과 국가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현행 헌법 전문 역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로 시작한다. 제헌헌법에 담긴 역사관을 그대로 승계한 것이다. 헌법은 국민통합의 상징이자 실체이며, 국민이 공유해야 할 역사관에 대한 국민적 합의의 산물이다. 물론 민주국가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또는 학문적 성실성에 기초하여, 헌법에 담긴 역사관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단군신화는 황당무계한 것이니 우리 민족사의 시원을 신라 건국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이 건국됐다는 것은 국제사회로부터 보편적 동의를 얻을 수 없는 우리만의 주장일 뿐이니 1948년 8월15일을 건국절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헌법을 수호할 책임을 지닌 사람은 그래서는 안 된다. 헌법을 수호하는 것은 곧 헌법에 담긴 역사관을 수호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광복절 경축사에서 ‘올해는 건국 68돌’이라고 말했다. 설사 본인의 종교적, 정치적, 학문적 신념이 헌법정신과 다르더라도, 헌법을 개정하기 전에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미국 독립기념일은 7월4일이다. 미국 헌법이 제정된 날도, 미국 정부가 수립된 날도, 미국이 국제적으로 승인받은 날도 아니다. 아메리카 식민지 주민들이 종주국 영국에 대항해서 독립전쟁을 벌이던 와중에, 13개 지역 대표들이 모여 독립을 선언한 날이다. 우리 역사에서 보자면 삼일절에 해당한다. 다른 건 다 미국을 본받으려는 사람들이, 이런 건 왜 본받지 않는가?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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