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서울 중구에서 4남매를 키우는 30대 중반의 주부 김지연(가명)씨는 최근 한전 검침원이 두고간 전기사용량 집계 쪽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에너지 효율 1등급이라고 광고하던 삼성 스탠드형 스마트에어컨을 한달 전쯤 샀는데, 지난 7월 11일부터 한달간 쓴 전기 요금이 55만원을 훌쩍 넘은 것이다. 평상시 전기 요금(7만원)의 8배 수준이었다.

김씨는 “작년 여름만해도 한달에 25만원 정도 전기요금이 나왔는데, 올해는 이렇게까지 많이 나올줄 몰랐다"며 “하루 10시간 정도로 에어컨을 틀었을 뿐이다. 누진제가 일반 가정집을 잡는다"고 푸념했다. 김 씨네 가족은 다둥이 가족으로 한전으로부터 5인 가구 이상의 요금 할인혜택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월간 할인 한도가 1만2000원에 불과해 전기요금 부담을 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연일 계속되는 폭염 속에서 7·8월분 전기요금 고지서가 청구되면서 가정용 전기요금 누진제로 인한 요금 폭탄 우려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정부와 여당은 성난 민심을 잠재우려 7월부터 9월까지 한시적으로 3개월 동안 누진제 구간의 폭을 50㎾h씩 넓혀 가계의 요금 부담을 완화하기로 했다. 그러나 3개월간 가구당 전기료가 평균 2만원 가량 줄어드는데 그칠 것으로 알려지면서 국민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하다. 게다가 전국적으로 한전의 검침일이 가정마다 달라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된 7월 말부터 8월 중순까지의 전기요금이 부과돼 요금 폭탄을 맞을 가능성이 높은 가정은 불만이 더 많을 수 밖에 없다.
◆부랴부랴 누진제 구간 폭 50㎾h씩 완화했지만, 누진제 손질없이는 ‘요금 폭탄’ 논란 지속
한전은 전국적으로 월 7차례에 걸쳐 검침을 한다. 1차 1~5일, 2차 8~12일, 3차 15~17일, 4차 18~19일, 5차 22~24일, 6차 25~26일, 7차 26~말일까지다.
무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7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의 전기 요금이 한꺼번에 합산될 경우, 전기 사용량이 급격히 늘어나 비싼 금액의 누진제 단계가 적용돼 전기요금 폭탄을 맞는 사례가 많다.
부산에서 다섯명의 가족이 함께 사는 조희명(가명)씨는 7월 15일부터 8월 14일까지 총 987㎾h의 전기를 썼다. 전 달에는 543㎾h 정도를 사용했지만, 지난달 24일부터 20일 넘게 폭염주의보가 발령되면서 매일 밤 켜둔 에어컨 때문에 전기사용량이 급증했다. 조씨 가족은 누진제 최고 구간인 6단계 비용이 적용되면서, 월 50만6000원의 전기요금 ‘폭탄'이 떨어졌다.

경기도 광주에 사는 최예지(가명)씨의 사정도 비슷하다. 평소에는 매달 450㎾h의 전기를 쓰지만 가족 중에 암 환자가 있어 무더웠던 지난 3주 동안은 에어컨과 에어서큘레이터(공기순환기)를 동시에 틀었다. 지난달 16일부터 8월 17일까지 최씨 가족이 사용한 전기량은 762㎾h로 요금은 34만원이 나왔다.
한전 관계자는 “인원이 한정된 관계로 전국적으로 검침일을 나눠 운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앞으로는 고객이 희망하는 날짜에 검침할 수 있도록 전산시스템을 개선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전은 9월부터 원하는 날짜를 검침일로 정할 수 있는 '희망일 검침제'를 도입하고 2022년 스마트 계량기가 전 가구에 보급되면 이 제도를 대폭 확대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또 올해 여름(7~9월) 전기요금이 이전 달과 비교해 지나치게 많이 나온 가구에 대해서는 요금을 3개월로 나눠내는 '분할납부제'도 확대하기로 한 상황이다.
한전은 현재 기초생활수급자, 장애인 등 가정 내 상황에 따라 전기요금 부담이 큰 곳에 대한 할인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최저 요금과 최고 요금의 차이가 11.7배에 달하는 누진제가 그대로인 상태에선 상한선이 있는 할인 제도는 실효성이 없다는 논란이 일고 있다. 기초생활수급자, 장애인, 국가유공자의 할인 상한선은 월 8000원, 차상위계층의 경우 월 2000원, 다자녀 가정의 할인 상한선은 월 1만2000원이다. 수십만원 이상의 요금 폭탄을 맞는 상황에서 이 정도의 할인액은 별 도움이 안된다.
가구 구성원 수 5인 이상의 대가족이나 생명유지장치 사용자 중 351~650㎾h의 전기를 사용할 경우, 한단계 낮은 사용전력량 구간의 요율을 적용해 할인 금액을 산정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요즘처럼 에너지 사용량이 전반적으로 급증할 때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진우 연세대 글로벌융합기술원 특임교수(전 에너지경제연구원장)는 "11배가 넘는 누진율은 전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정책이다. 10여개 국에서 누진제를 채택하고 있으나 누진율은 최대 4배를 넘지 않는 것으로 알고있다"고 말했다. 이어 "에어컨을 비롯해 냉난방기가 필수품인 상황을 고려할 때 누진제 자체에 대한 획기적인 개편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여러가지 문제점이 곳곳에서 발견되자 해외의 사례를 벤치마킹해 다양한 요금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일본의 경우 계절별·시간대별 차등요금제와 선택형 요금제를 적용하고 있다. 주택용 누진요금제에 따른 요금체계는 3단계이며, 월 사용량 120㎾h까지 ㎾h당 19.5엔, 120~300㎾h 25.91엔, 300㎾h 이상 30.2엔을 각각 부과한다. 누진율은 최대 1.6배 수준이다.
일본은 국민들의 생활패턴에 따라 시간별로 다른 요금을 부과한다는 점도 특이하다. 오전 9시~오후 9시 ㎾h당 33.76엔, 오후 9시~이튿날 오전 9시 29.04엔 요금을 각각 부과된다. 최근엔 낮 시간대 전기 사용이 적은 1인 가구 등을 위한 ㎾h당 25엔 정도하는 고정요금제도 등장했다.
미국의 누진제는 2단계로 나눠져있다. 전기회사마다 누진율 차이는 있지만 최대 1.3배~4배 수준이다. 미국 내 90여개 전력공급회사는 다양한 요금제를 제공한다. 계절과 시간대에 따라 요금 차등폭을 변화시키는 피크형 요금제(Critical Peak Pricing), 변하는 공급원가를 기반으로 실시간으로 소비자 요금을 시간대별로 집계하는 실시간 요금제(Peal Time Pricing) 등이 있다.
◆ ‘전기요금 당정 TF’ 구성한 정부…수술대에 오른 주택용·산업용·교육용 전기료
정부는 18일 주택용 누진제를 중심으로 한 전기요금 제도 개편을 위해 ‘전기요금 당정TF’를 구성하고 첫 회의를 열었다. 전기요금 개편 작업은 전기요금 누진제 조정과 요금 체계 개편 등 두가지 축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주형환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이날 국회에서 열린 전기요금 당정 태스크포스(TF) 출범 회의에서 "누진제는 물론 누진제 집행 과정의 문제점, 더 나아가 교육·산업용 등 용도별 요금 체계 적정성·형평성에 이르기까지 전기요금 체계 전반에 대해 근본적인 개편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이채익 새누리당 의원과 손양훈 인천대 교수가 TF 공동위원장을 맡았고 이현재·추경호·곽대훈·윤한홍 의원, 우태희 산업부 제2차관, 조환익 한전 사장 등 13명이 TF 위원으로 위촉됐다.
정부는 당정 TF를 통해 해외 사례와 과거 누진제 개편 방안, 에너지 취약 계층 지원책 등을 폭넓게 검토해 올해 말까지 세부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산업용과 교육·일반용 요금도 전력 수급 영향과 경제적 효율성 등을 따져 새롭게 개편할 계획이다.

누진제 개편의 경우 현행 6단계 구간을 3~4단계로 줄이고 최저 요금과 최고 요금 차이를 현행 11.7배에서 3배 이내로 낮추는 방안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기요금 인하효과가 있도록 전체적으로 요금 수준을 낮춰 현행 6단계를 3단계로 통합하거나, 전기요금이 원가보다 낮은 1∼2단계를 통합해 요금 수준을 올리고 3∼4단계와 5∼6단계의 요금은 내려 각각 통합하는 방안, 1∼2단계를 폐지한 상태에서 3단계로 구간을 나누는 방안 등이 제시될 것으로 보인다.
누진제 단계를 줄일 경우, 전기를 적게 쓰는 가구의 요금은 다소 늘지만 전기를 많이 쓰는 가구의 요금은 크게 줄어든다. 저소득층 형평성 문제에 대해서는 에너지 바우처(쿠폰) 발행 등을 해결할 수 있다.
산업용, 상업용, 교육용 전기요금 개편 작업도 주목된다. 산업용이나 상업용 전기에는 누진제가 적용되지 않는다. 아무리 많이 써도 산업용은 ㎾h당 81원(6~8월 기준), 상업용은 105원이다.
정부는 용도별 요금체계반, 누진체계 개편반 등 2개 작업반을 구성해 전기요금 제도 개편을 체계적으로 검토한다. 손양훈 인천대 교수는 “요즘처럼 국민들의 관심이 누진제에 집중된 때가 없었다"며 “여러가지 문제점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해결책을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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