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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뉴스]'자국이성혐오'가 어쨌다고?- 메갈리아 논쟁 이면의 논점: 혐오의 죄악화와 소비자행동의 문제

한윤형 자유기고가 입력 2016. 09. 01. 10:18 수정 2016. 09. 02.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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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향이네는 작가,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이 티셔츠 사태와 웹툰 작가, 메갈리아와 미러링, 페미니즘에 관해 보낸 기고를 8월 1일부터 7회에 걸쳐 연재했습니다. 독자 비판·반론 전문도 실었습니다. 연속 기고·반론을 두고 다시 두 편의 글이 들어와 전합니다. 반론 등은 h2@khan.co.kr로 보내시면 됩니다.

뜨거운 논의를 피해가기 위한 방법으로 하나의 비유를 들어본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을 ‘다카키 마사오’란 이유로 비난하는 담론이 있다. 2천 년대 초반부터 인터넷에서 볼 수 있었던 주장이며, 2012년 대선정국서 이정희 통합진보당 전 대표의 발언으로 유명해진 주장이다.

따져보자면 이 주장은 다소 터무니없다. 박 전 대통령이 친일파냐는 논란에는 여러 말을 거들 수 있지만, 그가 ‘다카키 마사오’였다는 사실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1945년 광복 당시 소위에 불과했던 박 전 대통령은 청산해야할 등급의 ‘친일파’는 아니었단 것이 합리적 해석에 가깝다.

여기서 더 재미있는 부분은 이에 대한 대항담론이다. 한국인들은 정치적 적대자를 규탄할 때 상대방을 외계인 취급하지만, 막상 뜯어보면 논리의 지반은 엇비슷한 경우가 많다. ‘박정희=다카키 마사오’였다는 주장에 대해 우파들이 반박할 때, 그들은 일제시기말 조선인의 90%가 창씨개명을 했다느니 하는 맥락적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대신에 다음과 같이 받아친다. “그래 니들 말대로 ‘박정희=다카키 마사오’였다고? 그랬다면 ‘김대중=도요타 다이쥬’였다!!!” ‘김대중’을 ‘도요타 다이쥬’로 칭하는 글을 나는 2013년 이후로 자주 보았다. 주로 그 문제의 ‘일간베스트’(일베)에서 말이다(그 이전엔 2천년대 초반 조선일보 독자마당에서 간헐적으로 보았다. 다만 그때 그들은 기성세대답게 한자 표기를 했다). ‘다카키 마사오’에 의미가 없듯 ‘도요타 다이쥬’에도 의미는 없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뭔가를 반박했다 여겼다. 설령 아무 내용이 없을지라도 진보좌파의 ‘위선’이라도 반박했다 여겼다.

메갈리아 논쟁이 교착점에 빠져 있는 지점도 이와 유사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교하지 못했던 담론 적용에 대해 대항담론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대항담론도 의미가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제시하는 쪽에선 그것이 진보좌파의 위선을 공박한다고 믿게 되고야 말았다.

여기서 ‘창씨개명’에 해당하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혐오’의 문제다.

메갈리아가 발행한 남성잡지 ‘맥심’을 미러링해 발행 한 잡지 ‘멕심’ 표지

혐오가 대체 언제부터 죄악이었나 현 시점 ‘반메갈’ 담론의 주요 생산 및 전파기지로서 페미니즘 옹호층의 (과도한) 조소를 사고 있는 ‘나무위키’의 서술을 보자. 그들은 ‘혐오’를 ‘관용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죄악’이란 식으로 서술했다. 그랬기에 ‘일베’를 배제해왔듯 ‘메갈’도 배제하겠단 논리다. 심지어는 ‘방어적 민주주의’ 담론을 끌어들이기도 한다. 혐오가 대체 언제부터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죄악이었으며, 정치영역에서 배격해야 할 극단주의와 비슷한 취급을 받았을까?

페미니즘 진영에선 이에 대해 ‘나무위키’를 이용하는 그 남성들이 혐오표현(hate speech)이나 여성혐오(misogyny)의 개념을 모르고 일상어법의 오용을 통해 ‘뇌내망상’ 논리를 만들었다고 말할 것이다. 어느 정도는 그렇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다. 그들이 ‘도요타 다이쥬’를 들이밀 때의 책임의 일부는 ‘다카키 마사오’를 이상한 방식으로 들이댄 이들이 가져가게 된다.

다시 돌아와, ‘혐오’는 한국의 웹문화에서 금기였을까? 아니다. 물론 그들이 ‘일베’를 매우 강도 높게 배제했던 건 사실이다. 이 사실조차 무시하면 안 된다. 정치성향 상관없는 평범한 커뮤니티들에서도 그저 ‘일베’에 먼저 올라왔던 게시물을 퍼온 게시물을 삭제했고, ‘일베’ 용어를 조금이라도 체득한 운동선수와 연예인들에게 ‘일베’ 유저 의혹을 덧씌우며 괴롭혀왔다. 그렇게 하는 것이 ‘상식’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들이 ‘혐오’에 반대해서 그렇게 했는가? 아니었다. 그들이 ‘일베’에 반대하며 사용한 용어는 ‘패륜’이었다. 차마 인간만도 못한 놈들이란 논리였다. 그들이 흥분한 단어는 대체로 (여성혐오 문제는 아니고) ‘노알라’, ‘운지’, ‘홍어 택배’ 같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런 논변은 보통 제대로 된 근거를 갖추지 못한 윤리적 직관일 뿐이었다. ‘일베’의 문제를 ‘호남 혐오’, ‘민주화 혐오’, ‘여성 혐오’ 등의 각종 혐오의 문제로 대응했다면, 그들은 단지 ‘일베’를 사용했다는 의혹만으로 그 사람을 ‘매장’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으리라. 그가 ‘일베’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주목하고 그게 왜 그릇된 일인지를 사회적으로 공인시키려 했으리라. 즉 상대방을 ‘일베충’이란 특정 종족으로 모는 것이 아니라 개별행위를 문제삼았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대응하는 것을 새로운 ‘상식’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오늘날의 정의당처럼 ‘메갈리아’에 대한 찬반을 표시해야 하는 난감한 처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메갈리아4’와 ‘메갈리아’와 ‘워마드’의 관계가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 답이 안 나오는 추론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패륜’이란 말에서 드러나는 세계관은 “나는 정상인, 너는 미친 놈”이란 정서의 발현이다. ‘일베’는 그런 식으로 배제당했다. 별 생각없이 이용하는 유저들 입장에선, 영문도 모르는 채로, 왜 잘못했는지 설명도 안 해준 채로 말이다(지금 ‘오늘의 유머’ 사람들은 그 같은 짓을 ‘메갈리아’에게 하려다가 외려 진보담론에 비슷한 일을 당하고 있다. 밑도 끝도 없고, 설명도 없는 규탄. 말을 꺼내려 하면 “나무위키 따위나 믿냐?”라고 조롱당하는 규탄).

그 와중에 한국 남성들은(편의상 이렇게 타자화하겠다) 자신들이 행하던 모든 ‘혐오’를 멈추었는가? 그럴 리 없다. 혐오표현(hate speech)이나 여성혐오(misogyny) 문제까진 아직 지적하지 말기로 하자. 일상언어로서의 ‘혐오’의 측면만 봐도 그렇다. 당장 매우 정치색과 무관하다고 여겨지는 해외네티즌 반응 번역 사이트로 가보자(심지어 여기서도 ‘일베’에서 퍼온 게시물은 삭제대상이다). 적어도 십수 년 이상 ‘쪽바리’(일본인), ‘짱깨’(중국인), ‘섬짱깨’(대만인)과 같은 단어가 수시로 융통된 이 사이트들에서의 표현이 ‘일베’ 논쟁이나 ‘메갈’ 논쟁의 와중에 순화되었는가? 그런 일은 없었다. 상당히 정치적인 척하는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적인 사이트들에선 어떠한가? 이들을 새로이 문제삼은 사람도 없다. ‘일베’ 뿐만 아니라 ‘디시’에서도 만연한 호남인 혐오, 그 호남인 혐오에 맞부딪혀 정치적으로 진보적이라 우기는 사이트에서 일어나는 영남인 혐오 역시 순치되지 않았다. ‘파오후’(외모 비하)에서 파생되었다는 ‘메오후’(‘메갈’+외모 비하)란 단어도 그냥 쓰인다. 그게 혐오 단어인지도 모른다. 많은 남성들은 ‘메갈’을 범죄적 사이트로 규탄하면서 ‘메오후’ 같은 단어들을 별 문제의식 없이 쓴다.

그렇다면 혐오는 언제부터 죄악이 되었는가. 간단하다. ‘여성혐오’에 대한 규탄 여론이 비등하게 되면서 ‘남성혐오’가 새로운 죄악이 된 것이다. ‘도요타 다이쥬’의 탄생이다.

여기서 ‘다카키 마사오’의 영역으로 돌아가보자. 앞서 말했다시피 최근 ‘여성혐오’라는 단어로 적극 사회문제를 지적해온 이들은 크게 보아 혐오표현(hate speech)이나 여성혐오(misogyny) 담론을 활용해서 상대방을 규탄해왔다. 지식이 얕은 내 오해일 수 있단 걸 전제로 말하겠다. 매우 많은 사람들이 한국 사회에서 몇 년 유통되지도 않은 이 언어들을 일관성 없이 남발하며 상대방을 무식하다고 재단한다. 사람들에게 ‘대체 언제부터 그 단어를 알았는지’, ‘그리고 언제부터 그 단어를 글에 썼는지’를 괄호로 표기해달라고 하고 싶어질 지경이다. 이를테면 ‘미소지니(2015년 8월, 2016년 5월)’란 식으로 말이다. 심지어는 관련 전공자들의 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맨스플레인’이란 말은 아주 잠깐만 넣어두자. ‘설명충’들 중에 남성이 많다는 경향을 무시할 생각은 없으나, 아직까지 한국 사회에선 이런 논의가 시작될 때 끼어들어 남성들의 무식함을 공박하는 ‘관련 전공자’들 역시 남성이 태반이다. ‘맨스플레인’도 피장파장이다. 그러니 내 얘기를 조금만 들어보고 만약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누군가 설명이라도 해주길 바라겠다.

‘여성혐오’ 명명은 적절하게 이루어졌을까? 먼저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전혀 다른 성격의 담론이라 여겨지는 혐오표현(hate speech)과 여성혐오(misogyny)가 무시로 함께 사용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이해한 게 그르지 않다면 두 단어는 성격이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인다. 먼저 전자는 ‘규제와 처벌을 위한 담론’이고, 후자는 그에 비한다면 ‘비평과 성찰을 위한 담론’이다. 게다가 전자가 혐오 문제에 대한 일반론을 지향한다면, 후자는 ‘여성혐오’란 현상의 특수성을 강조한다. 그러니까 두 단어는 같은 현상을 비평하기 위해 함께 사용하기도 어렵고, 만일 같이 사용된다면 적용되는 맥락이 어떻게 포개질 수 있는지 섬세하게 입증해야 하는 단어다. 그러나 무지몽매한 탓이었는지 모르나 한국 사회에서 ‘여성혐오’에 대한 질타 내지는 ‘남성혐오의 불가능성’을 얘기하는 이들이 이 부분을 구분해서 얘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관련 전공자들이 그걸 모를 리 없는데 무시로 섞어 쓰는 상황도 도통 이해가 안 간다.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자. 혐오표현(hate speech) 담론에서는 ‘사회적 소수파에 관한 혐오표현’만을 문제 삼는다. 이에 대해선 관련 전공자들이 적극적으로 ‘계몽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그들이 지면에서 그러기 전에 웹에서도 그런 논의가 있었다. 그들은 이 얘기를 끌고 들어와 “당신들이 잘 몰라서 그러는데 소수파가 혐오를 구사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남성혐오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나는 이런 식의 논의가 사실상 전후맥락을 거세한 말장난이라고 보는데, 그 이유를 설명해보겠다. ‘혐오표현’은 사회적 처벌을 논의하는 담론이다. 즉, 이 담론을 끌어들여 말할 거면 ‘소수파는 혐오를 구사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게 아니라 ‘소수파의 혐오를 처벌하는 것은 불필요하다’라고 말하는 게 정확하다. 내가 이해하기로 ‘혐오표현’은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하는 문맥에서, 사회적 소수파에게도 그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최소한의 처벌 규정을 고민하는 담론이다. 그리고 그마저도 반대하는 이들도 존재한다고 알고 있다. 서구 사회에서도 혐어표현의 처벌을 반대하는 좌파나 페미니스트가 존재한단 것이다. 한국 사회에선 아직 규제당하는 ‘혐오표현’이란 게 존재하지 않으므로, 담론의 맥락에서 이 표현이 사용될 상황은 입법논의 때여야 한다.

즉 이 담론에선 ‘이성애자는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것이 가능하며, 동성애자는 이성애자를 혐오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이 아니다. ‘이성애자의 어떤 동성애자 혐오발언은 처벌할 필요가 있지만, 동성애자의 이성애자 혐오발언에까지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는 없다’고 얘기하는 게 옳다. 다수파가 소수파를 혐오할 때는 소수파의 존재와 권익이 위축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고 경향성을 설명하는 것이 옳다.

그렇기 때문에 혐오표현(hate speech) 담론은 여성혐오(misogyny)와 같이 언급되는 게 이상할 만큼 상이한 담론으로 보인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지금까지 관찰한 바 여성혐오(misogyny) 담론은 인류 사회를 살아가는 남성 모두와 여성 대다수가 떨쳐내기 힘든 어떠한 편향을 지적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이에 대해선 서구권이나 일본에서도 넓은 의미로 사용하는 이와 좁은 의미로 사용하는 이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사실 여성혐오란 건 매우 특수하게 논의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다른 혐오의 양태에선 자신이 혐오하는 이들을 피하려고 하지만, 이성애자 남성은 개별 여성에게 구애하고 사적인 차원에선 그들을 위한다고 착각할 수 있는 관계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가 여자를 사랑하는데 왜 여성혐오자임?”이란 발화에 대해 담론적으로 반박하는 것도 매우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나는 여성혐오(misogyny)라는 단어가 별도로 존재하는 것에 매우 공감하며,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시비 걸 생각도 없다.

하지만 또한 그렇게 이 양상이 독특하기 때문에 여성이라 하더라도, 혹은 페미니스트라 하더라도 자기혐오에 가까운 여성혐오를 떨쳐내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이 그 담론의 주창자들이 말하는 바였다. 그렇다면 그들이 논적을 ‘미소지니스트’라고 명명하고 비난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더구나 그 명명과 비난을, 마치 ‘혐오주의자’들에 대한 낙인처럼 사용하는 것은 어찌 이해해야 할까. 인류의 99%가 여성혐오를 벗어던지기 힘들다면 ‘미소지니스트’가 욕이 될 수 있는 맥락은 따로 설명해야 하지 않을까?

‘정도’와 ‘등급’의 구분이 없는 명명의 문제 그렇게 하려면 이 포괄적인 언어 사이에 일종의 ‘등급’에 대한 인식이 필요할 것이나, ‘미소지니스트’라는 낙인을 찍을 때, 그들은 자기가 그게 아니라는 사람들에게 “그래봤자 미소지니에요. 이래도 저래도 그래도 당신은 미소지니에요”라고 말하기에 바쁘다. 한국 페미니스트들 뿐만 아니라 서구권 페미니스트들의 논의를 봐도 여성을 가문의 재산으로 여기는 제3세계에서 일어나는 범죄행각과 여성의 권익이 어느 정도 신장되었단 사실에 ‘역차별’을 느끼고(그 느낌이 정당하다는 건 아니다) 분개를 터트리는 남성들을 전혀 구별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모든 게 ‘등급’ 구분할 필요 없는 ‘미소지니’일 뿐이라면, 페미니즘 운동은 대체 왜 해야 할까? 그런 식으로 치면 참정권이 없는 1세기 전으로 돌아가든 세계적으로 거센 페미니즘 운동이 재전개된 지금으로부터 1세기 후로 날아가든 우리의 관계양상은 큰 틀에서 비슷하며 여전히 인류의 99%는 ‘미소지니스트’일 뿐일텐데 말이다. 굳이 트럼프든 오바마든 ‘미소지니스트’라고 불러서 얻게 되는 인식이 있다면, 그 둘을 구별하는 언어도 추가로 제공되어야 하지 않을까.

너무 멀리가기 전에 다시 돌아와서, 이제 누군가 “혐오를 지양해야 합니다”라고 말할 때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그것을 어떻게 지양할지에 대해선 다양한 방법론이 나올 수 있다. 매우 투박하게 단계별로 정리해본다고 해도 다음과 같은 예시가 가능하다.

첫째, 법적 처벌 수준의 제재가 필요하다는 관점(이른바 혐오표현 담론 류의 입법).

둘째, 사회 공론의 영역에서 그것이 그릇된 행위라고 규정하는 인식이 필요하다는 관점.

셋째, 인터넷커뮤니티 등에서 ‘금지어’를 설정해야 한다고 보는 관점.

넷째, 누군가 별다른 인지없이 그 말을 쓰면 옆에서 제지할 정도의 행동은 보여줘야 한다고 되는 관점.

이 모든 영역을 뭉뚱그려 얘기한다면 어떤 논의도 불가능하다. 가령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년’ 따위의 여성비하 욕설이나 ‘병신’ 따위의 장애인비하 욕설을 쓰지 말자고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는데 거기다 대고 “당신은 대통령 욕을 처벌하는 권위주의 시대로 돌아가잔 말입니까!” 수준의 반발을 하면 무슨 말을 어찌 하겠는가. 그런데 평소에는 이 정도 구분은 하고 살던 사람들이 유독 여성혐오 논란에 대해선 이런 문제를 전혀 구별하지 않고 뭉뚱그린다. 그건 이게 당대의 민감한 논제라는 걸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사태를 대하는 사려 깊은 태도는 결코 아니다.

한국 사회에선 ‘일베’조차도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지는 않다. 그렇기에 ‘메갈리아’ 논의에 유럽의 혐오표현 입법 상황이 나오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법적 금지를 반대하더라도 우리는 무언가를 비판할 수 있다. “민중은 개돼지” 발언은 교육부 고위관료의 징계의 근거가 된다. “공무원과 메갈리아 유저는 다르잖아요”라고 넘어가지 말도록 하자. 그 ‘등급’과 ‘정도’에 관한 구체적인 얘기를 해봐야 하는데, 다들 말장난이나 하며 회피하고 있었던 상황이 아닌가? 메갈리아에서 사용되는 언어들이 법적 금지대상은 아니라 하더라도 특정한 영역에까지 등장하는 건 당연히 비판할 수 있다.

또한 난무하는 ‘혐오’에 대한 정의를 대략 활용하면서도 ‘여성혐오’의 특이한 위상을 강조하다 보니 이제는 반메갈리아 진영에선 ‘자국이성혐오’가 제일 나쁘단 식의 논리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이제는 다른 모든 종류의 혐오발언은 죄악이 아닌데, ‘자국남성혐오’와 ‘자국여성혐오’만 죄악이란 식이 된 것이다. 이러한 대항논의가 지극히 자의적인 것은 사실이나, 역시 이쪽에서 전개된 혐오표현(hate speech)과 여성혐오(misogyny)란 단어의 무맥락적 적용의 미러링인 측면이 있다. 우리는 상대방이 잘 모른다고 공박하기 전에 자신들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이 ‘유사담론적’ 논의가 진정될 수가 없는 것이 아닐까?

강약관계는 전가의 보도가 아니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표준적인 답변은 “남성혐오와 여성혐오는 같지 않다. 남성혐오는 존재하지 않거나, 있더라도 여성혐오에 비해선 미약하고 효과가 없다”란 것이다. 전가의 보도처럼 동원되는 “혐오를 할 수 있는 것은 강자뿐이다”란 말인데, 이 역시 납득이 안 되긴 매한가지다. 이러한 논의에서도 혐오표현(hate speech) 담론과 여성혐오(misogyny) 담론이 이상한 방식으로 섞여있는 것으로 보인다. 후자에만 집중한다면 “여성혐오와 대칭적인 수준의 남성혐오는 불가능하다”라고 말하면 될 일이다. 나는 그 말은 사실이라고 본다.

그러나 사회적 강자만이 혐오를 할 수 있다고 말하면 어찌 되는가? 가령 ‘쪽바리’. ‘짱깨’, ‘섬짱깨’란 단어를 늘어놓고, 이중에서 ‘쪽바리’와 ‘짱개’는 우리가 약자니까 혐오단어가 아니고, ‘섬짱깨’만 자제해야 할 단어라고 ‘구분’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를테면 진보담론의 관심과 상관없이 한국 사회에서 선도적으로 상호 혐오 표현을 일삼았던 지역주의 담론을 살펴보자. 호남인에 대한 ‘홍어’ 등의 비하어를 법적으로 금지하자고 논의를 시작하자 한다면 동의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면서 경북인에 대한 ‘통구이’는 아무 때나 아무렇게나 발화해도 상관없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통구이’가 법적 금지의 대상이 아니라도, 가령 시사토론에서도 나와도 될 단어라고 우길 수 있을까. 어원으로 보면 ‘통구이’가 ‘홍어’보다 더 반인륜적인 단어인데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등급’과 ‘정도’에 관한 인식이 전무한 채 모든 걸 강약관계로만 따지다 보니, 이제는 신문지상에서도 ‘빻은 진보’와 같은 표현이 버젓이 등장한다.

강약관계 구별은 논의를 위해서 필요하지만 자의적일 수 있다. 사회적 약자라도 자신들끼리 모여서 떠드는 공간에선 담론적 우위를 가진다. 그래봤자 사회 전체로 보면 비대칭이지만 ‘혐오’의 맥락이 안 생기는 건 아니다. 요즘은 인터넷이 발달해서 어지간한 소수자들도 커뮤니티 레벨에선 자기들끼리 모여서 떠들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봐야 한다. 사회적 약자임은 분명하지만 숫자로 보면 구성원의 절반인 여성의 양상은 그와도 다르다.

더구나 “김모 성우는 해고당했지만, 장동민은 여전히 방송에 나온다”, “여성들은 죽어가지만, 남성들의 삶에는 위협이 없다” 같은 말들이 반복되는 것을 보자면 “우리는 소수니까 어차피 당신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어요. 그러니까 뭘 하든 내버려 두세요”라는 식으로까지 들린다. 이 말은 상당히 이상하다. 첫째로, 운동이란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수단이다. 둘째로, 최근의 넷페미(‘메갈리아’만 구별하는 것보단 이렇게 통칭하는 게 더 낫다고 본다) 운동 조류에선 자신들이 적극적으로 소비자의 권리를 활용하여 ‘미소지니스트’를 징벌하고 세상을 바꾸겠다고 천명해왔기 때문이다. “그들의 밥줄을 끊어야 합니다. 우리 힘을 보여줘야 합니다”. 이는 지금 넥슨 게임 유저들이 성우의 밥줄을 끊었다고, ‘오늘의 유머’가 웹툰 작가들을 검열하려 든다고 표현의 자유의 수호신처럼 난리치는 사람들이 과거 2년간 했던 발화 내용의 요약본이다.

만일 당신이 이런 조류를 본 적이 없다면, 없었다고 우기지 말고 그냥 “본 적 없다. 나는 몰랐다”고 솔직하게 말하기로 하자. 원래 내게 동의가 가는 제재는 제재로 느껴지지 않는 법, 그렇다고 자신들이 추구할 때는 “페미니즘은 돈이 됩니다”란 말의 위용에 감격하다, ‘메갈리아’ 관련 의심자를 타격하기 위한 불매운동에 대해선 소비자행동이 그릇되었다고 공박하는 건 민망하다. 우리는 ‘밥줄’ 끊으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너희는 성공했으니 너희만 비난하겠다고 한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1990년대 후반 5공세력에 대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했던 검찰의 논리를 본받아, “성공하지 못한 ‘밥줄 끊기’는 비난할 수 없다”고 말할 참인가? 그런데 요즘은 이렇게 앞뒤가 안 맞는 얘기를 하면서도 아무도 자기 얘기를 정당화하려고 조차 들지 않는다.

여기서 남는 것은 담론적으로는 서로가 ‘약자’라고 우기면서, 시장에서는 서로가 ‘갑’이 되기 위해 이전투구하는 영원한 ‘화력과시’의 전장 뿐이다. 그 전장에서 불의의 피해자들이 발생하고 있는 데에도 담론은 이 부분을 문제삼지 않고 ‘선악결전’만을 추동하려고 한다. 마치 ‘적대적 군비경쟁’의 상황과도 같다. 집단탈당과 성명서 제출이 맞붙은 정의당은 이 전체 전장의 축소판이다. 양쪽의 대결 속에서 정의당은 (양쪽의 불평을 합치면) 졸지에 ‘반페미니즘 메갈리아’ 정당이 되었다. 과연 이래도 되는 걸까?

실력행사로서의 소비자행동의 문제 사실 이러한 ‘화력과시’와 ‘선악결전’의 공간의 형성은 소비자행동 자체의 특수성과도 관련이 있다. 소비자행동은 이에 크게 영향을 받는 이에게 화력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의도 여부와 상관없이, 소비자행동이란 건 ‘우리의 가치지향에서 가장 나쁜 사람을 혼내준다’기 보다는, ‘우리의 가치지향에서 벗어난 이들 중에서 가장 혼내주기 쉬운 사람을 혼내준다’란 효과로 귀결되기가 무척 쉽다.

그래서 매 상황별로 고민해야 되는 지점들이 생긴다. 어떤 기업의 친노동/친환경/친여성 성향 등 가치기준을 보고 하는 ‘정치적 소비’는 매우 훌륭한 일이다. 그 기업에 투자하는 이들에게 문제를 삼는다면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이고 생각해볼 여지가 좀더 생긴다. 기업 구성원의 지향이나 행동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다면 훨씬 더 고민해봐야 한다. 프리랜서나 창작자까지 나아간다면? ‘메갈’ 의심 성우를 옹호해야 하는 이유는 그녀가 ‘메갈’이 아니기 때문인가, 아니면 ‘메갈’이 그르지 않기 때문인가, 아니면 ‘메갈’이 그르든 말든 생계활동을 간섭받으면 안 되기 때문인가? 이 세 층위는 모두 다른 것인데 다들 이걸 뭉뚱그려 얘기한다. 그리고 자신이 싫어하는 이들만 타격하려고 든다. 이래선 안 된다.

결국 그들이 ‘우리에게 무슨 잘못을 어느 정도로 저질렀다고 생각하는지’와 ‘그들에게 필요한 적절한 정도의 징벌은 뭐라고 생각하는지’와 ‘우리가 그 적절한 정도의 징벌을 만들어내기 위해 해야 할, 할 수 있는 방책은 무엇인지’가 모두 고민되어야 한다. 하지만 소비자행동의 과정에선 이 문제가 고려되기가 매우 어렵다.

다시 문제의 ‘메갈리아4’ 티셔츠로 돌아와 보자. 티셔츠는 1억여 원 어치가 팔렸다. 구매자가 많을 것이고, 인증한 이도 한두 사람은 아닐 것이다. ‘메갈리아’가 싫을 수는 있겠으나, 그 수많은 구매자 중에 성우 한 명만 막심한 손해를 보는 상황은 부조리하다. 남성향 게임에 성우로 참여하면서 그 티셔츠를 샀다는 것이 가중처벌이 될 요소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마찬가지 논리가 ‘미소지니스트’들에게도 발생한다.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며 페미니스트들이 소비자행동에 들어갈 때, 타격을 입는 건 ‘가장 여성혐오가 극심한 세력’이 아니다. ‘여성혐오자로 규정된 넓은 범위의 사람들 중에서 우리의 항의에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다. 공중파방송에서부터 가장 극심한 여성혐오가 넘치는 상황에서, 그간 ‘여성혐오’ 논란으로 구체적 피해를 본 건 웹툰 작가나 인디밴드 가수 등이었다는 엄연한 사실이 존재한다. 이 부분에 대한 자신들의 행동을 성찰하지 않고 ‘미소지니스트’들이 성우를 부당해고하고 웹툰 작가들의 창작의 자유를 탄압한다고 얘기한다면 더 이상 논의가 불가능하다. 서로 불매운동과 구매 인증샷을 찍어 올리는 ‘화력과시’ 밖에 할 일이 없다.

‘적대적 군비경쟁’ 상황을 벗어나려면 지금 일군의 넷페미니스트들은 ‘오늘의 유머’ 등에 대항하여 검열반대세력을 자처하고 있다. 하지만 이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우리의 검열은 여성혐오 진영에 대한 반대이므로 정당하다’고 우기기도 쉽지 않다. 세상문제는 많은 경우 그러한 이분법으로 재단되기 어렵다. 가령 얼마 전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아이유 앨범 소아성애 논란을 떠올리자.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하필 젊은 여성인 아이유가’ 유난히 비난을 받는 세태에서 ‘여성혐오’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동의한다. 반면 다른 페미니스트들은 아이유의 앨범의 선정성에서 ‘양보해서는 결코 안 될 여성혐오의 전선’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는 동의한다. 그렇다면 이 경우 ‘미소지니스트’와의 선악결전을 추구하는 이들은 어느 편을 드는 것이 정당할까? 그리고 이에 대해 누가 정당한 답변을 했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

페미니즘은 단일하지 않다고 알고 있다. 서구권에서도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정치적 보수주의자들과의 연대까지 불사하며 포르노 검열을 주장하고,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이에 대해 반대하면서 논쟁을 한다. 페미니스트도 조류에 따라 검열세력일 수 있고, 검열반대세력일 수 있다. ‘미소지니스트’란 규정은 전가의 보도가 아니다. 현실의 논의는 복잡미묘하며, 이를 몇몇 진보판 명사들이 그러하듯 단순논리로 쪼갠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지나치게 유행에 따라 움직이는데, 가령 2012년 나꼼수 코피 사건 때는 “나꼼수 코피가 뭐가 문제냐. 거기에 시비를 거는 당신들이 고루하다”는 식으로 반응했던 이가 2016년에선 “메갈리아가 뭐가 문제냐. 거기에 시비를 거는 당신들이 고루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페미니즘 진영에선 나꼼수 코피 사건을 진보가 페미니즘을 무시한 사건의 전형으로 공박하면서도 그의 우스꽝스러운 모순은 지적하지 않는다. 다들 몇 년 전에 한 말도 검증을 안 받으니 아무 말이나 해댄다. 이래도 될까?

이렇게 유행이 돌고 돌 때, 유행이 자기편을 든다고 필요한 논의를 생략하면 훗날의 역풍을 막을 수 없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진보담론을 바라보며 언제나 느낀 것은 ‘물들어올 때 노젓는’ 식의 태도가 운동판에 새로운 암흑기를 가져다주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암흑기 동안 너무 굶주린 그들은 새로운 조류가 들어올 때 역시 성찰 없이 그 단물을 흡입하는데 골몰하곤 한다.

나는 진보담론이 지금 보이는 행태가 그 모습의 재탕에 불과한 건 아닌지 몹시 우려스럽다. 그리고 그간 ‘물들어올 때 노 젓는’ 태도가 새로운 정치적 반동을 불러왔듯, 머지않아 새로운 반동을 맞이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세계적으로도 브렉시트 찬성파와 트럼프 지지가 이슈가 되는 세태에, 상대방을 머저리 취급하며 담론장에서 몰아낸 그 행태가 무엇으로 돌아올지는 짐작조차 못 하겠다. 무수한 논평가들이 해외사례를 분석할 때는 기존 진보담론이 자신의 삶을 대변해주지 못한다고 느낀 이들이 이러한 반동을 불러왔다고 말했으면서 말이다.

그리고 왜 이런 고민을 나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한윤형= 혼자 쓴 책으로 <뉴라이트 사용후기>(2009), <안티조선 운동사>(2010),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2013) 등이 있고, 함께 쓴 책으로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2011),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2011) 등이 있다. 매체비평지 <미디어스>에서 3년(2012~2014) 간 정치·신문비평 등을 담당했다.

<한윤형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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