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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 남몰래 우는 '육아上京 할머니들'

김민정 기자 입력 2016. 09. 03. 03:05 수정 2016. 09. 03.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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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 돌봐주기 위해 홀로 올라와 주말이면 타향살이 쓸쓸함 호소.. 식모살이 하는 기분 들기도 남겨진 할아버지, 독거노인 신세

제주도 서귀포시에서 남편과 둘이 살던 박모(여·65)씨는 지난 2월 서울에 있는 아들 부부 집으로 혼자 상경(上京)했다. 육아휴직을 하고 두 살짜리 손자를 키웠던 며느리가 직장에 복귀하게 되자, 아들이 박씨에게 "어린이집에 들어갈 때까지만 같이 살며 아이를 봐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처음 몇 달간 손자 보는 재미에 빠졌던 박씨는 요즘 주말만 되면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외로움을 호소한다. 주말에 아들 부부가 손자를 데리고 외출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박씨 혼자 집에 남는 경우가 부쩍 늘었기 때문이다. 박씨는 제주도 토박이여서 서울에 일가친척이나 친구가 없다.

박씨는 주말에 백화점이나 마트를 찾아 아들네 먹일 음식 장보기와 손주 옷을 사는 것으로 적적함을 달래보기도 했다. 그러나 아들이 준 신용카드로 계산하고 나면 어김없이 아들로부터 "뭘 그렇게 많이 사느냐"는 전화가 온다고 한다. 신용카드 사용 명세가 아들 휴대폰으로 통보되기 때문이다. 박씨는 "남편은 당장 내려오라고 성화지만, 내가 내려가면 손자 봐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자녀 대신 손주를 키우기 위해 서울 등 수도권에 있는 자녀 집으로 '육아 상경'한 할머니들이 아무 연고(緣故) 없는 타향(他鄕)에서 쓸쓸함을 호소하는 일이 부쩍 늘고 있다. 통계청의 '2015년 사회 조사'에 따르면 자녀와 같이 사는 60세 이상 인구 중 20.6%가 '손자녀 양육 및 자녀 가사 도움을 위해서'라고 답했다. 60세 이상 다섯 명 중 한 명꼴이다. 이 중 상당수는 자녀가 부모를 모시고 사는 대가족(大家族) 형태가 아니라 할머니 혼자서 결혼한 자녀의 집에 사는 경우로 추정된다고 통계청은 밝혔다.

경기 남양주시에서 나고 자란 김모(여·60)씨는 지난 5월 서울에 있는 아들(36) 부부 집으로 육아 상경한 뒤 말수가 부쩍 줄었다. 김씨는 "남양주에서는 텃밭도 가꾸고 친한 교회 사람들과도 자주 어울렸는데, 서울에서는 손주 보는 것 말고는 소일거리가 없다"면서 "육아뿐 아니라 청소와 음식, 빨래 등 집안일까지 도맡아 하는 게 힘에 부치지만 어디 하소연할 데가 없어 혼자 방안에서 눈물 흘리곤 한다"고 했다. 김씨는 "우울증에 걸릴 것 같아 주말에는 지하철을 타고 양재동 꽃시장에 가서 꽃구경을 한다"고 했다. 경남에서 운영하던 미용실을 접고 외손자를 봐주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한 할머니는 "직장 다니는 딸이 주말에 피부과 시술을 받거나 친구를 만나러 나간다며 손자를 은근슬쩍 맡길 때는 '내가 식모살이하는 것 아닌가'하는 설움이 밀려온다"고 말했다.

할머니들의 육아 상경은 홀로 남은 할아버지들의 피해로 이어진다. 대전에서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는 김모(65)씨는 올해 초 아내가 서울 구파발에 있는 아들 부부 집으로 육아 상경한 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술을 마시는 일이 잦아졌다. 그는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기 싫어 거의 매일 저녁 술 약속을 잡는다. 집 근처에서 손주 또래 아이들을 보면 과자를 한아름 사주기도 한다. 김씨는 "아이들 다 시집 장가 보내고 이제 부부가 마음 편히 사나 했는데, 앞으로 몇 년이나 혼자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며 "독거노인 신세가 따로 없다"고 했다.

김순옥 성균관대 소비자가족학과 명예교수는 "홀로 상경해 하루에 10시간씩 어린 손주를 돌보며 한정된 공간에서 생활하다 보면 소외감과 우울감을 느끼기 쉽다"며 "근처의 사회복지관에서 운영하는 시니어(연장자) 프로그램에 참여하거나 여가 활동을 통해 심리적으로 충전의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자녀가 먼저 알아챌 때까지 기다리기보다는 부모가 먼저 고충을 털어놓고 함께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자녀와 함께 살면 부양을 받기보다 손주 양육 같은 부담이 늘어난다는 이유로 자녀와 따로 살겠다는 부모들도 늘고 있다. 통계청의 지난해 조사에 따르면 자녀와 따로 살고 있는 60세 이상 부모 가운데 75.1%가 '앞으로도 자녀와 같이 살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이 비율은 2011년 71%, 2013년 73% 등으로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자녀와 따로 사는 이유는 '따로 사는 게 편해서'가 57.9%로 '자녀에게 부담이 될까봐'(39.4%)보다 훨씬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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