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건국 시조는 누구? 주몽인가? 동명인가?

임기환 2016. 9. 29.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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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3] 고구려의 건국 시조는 주몽왕(朱蒙王), 또는 동명왕(東明王)으로 알고 있다. 건국신화의 주인공인 주몽의 아버지는 천제(天帝) 혹은 해모수이며, 어머니는 강의 신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이다. 혈통과 탄생을 보면 말 그대로 설화다운 이야기이다.

 그러면 주몽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 설화상의 인물인가? 삼국지 고구려전에는 중국의 왕망(王莽)이 세운 신나라(9~25) 무렵, 즉 기원 전후 시기에 '고구려왕 추(騶)'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런데 광개토태왕비에는 시조를 '추모왕(鄒牟王)'이라고 하였다. 추모는 주몽과 서로 통하는 말이다. 바로 이 추모왕이 앞에서 본 '고구려왕 추'와 통한다. 즉 추모왕이라고 불린 고구려 왕이 실재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주몽이 실존 인물이라고 해도, 주몽신화는 어디까지나 설화이다. 이 건국설화는 언제 만들어졌을까? 보통 건국설화는 나라를 세운 그 무렵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에 왕실의 정통성과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만들어진다. 주몽설화도 추모왕 당시에 바로 만들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건국설화가 다 창작품이라는 뜻은 아니다. 거기에는 나라를 세울 때의 어떤 사실들이 담겨 있다. 이런 건국의 모습은 여러 형태로 전해지다가 건국설화가 만들어질 때 거기에 많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 건국설화가 만들어지는 시기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점이 주몽이 동시에 동명왕으로 불린다는 점이다. 그런데 역사상에는 주몽보다 먼저 동명(東明)이라 불린 인물이 있다. 바로 부여의 시조 동명이다. 정확히 말하면, 고구려의 시조는 주몽이고, 동명은 부여의 시조다. 게다가 주몽이 부여에서 내려왔다고 하듯이, 부여가 더 오래된 나라이기 때문에 부여의 시조 동명이 고구려 시조 주몽보다 앞선 인물이다.

 그런데 이 두 인물이 혼동되거나 또는 같은 인물로 알려지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주몽설화는 부여의 동명설화를 베낀 것이며, 그래서 이 두 설화는 이야기의 구조가 거의 비슷하다. 주몽설화에서 보듯이 주몽이 부여에서 남하하였기 때문에 부여의 건국설화를 익히 알고 있고, 그래서 그 뒤에 고구려 왕실이 유사한 건국설화를 형성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고고학의 물질자료를 살펴보면 고구려 건국 주체들이 부여에서 남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주몽설화의 주요 내용은 역사적 사실보다는 고구려 왕실의 관념적인 정통성을 내세우는 뜻이 더 크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고구려의 주몽설화가 부여의 동명설화를 차용하게 된 것은 고구려가 부여를 대신하여 부여족의 대표자로 부각할 무렵으로, 이르면 3세기 늦으면 4세기 중엽에는 우리가 지금 접하는 주몽신화가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의 오녀산성 옹성 유적.광개토왕비문에 추모왕이 나라를 세운 곳으로 나온다./매경DB
 또 주몽설화도 내용상 주몽이 탈출한 부여가 동부여라는 설화와 북부여라는 설화 두 계통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동부여'로 되어 있으며, 5세기에 고구려인이 남긴 금석문인 광개토태왕비와 모두루묘지에는 '북부여'에서 내려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두 기록 중 어느 하나가 잘못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둘 다 고구려인들 스스로 기록한 것이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나왔다는 설화가 먼저 성립하고, 동부여로부터 나왔다는 것은 이보다 늦게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주몽설화 중 해부루와 금와왕, 그의 아들 대소왕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본래 동부여 건국설화 내용으로, 나중에 고구려의 주몽설화와 합쳐진 것이다. 실제로 금와왕설화와 같은 신성한 두꺼비 이야기는 두만강 지역에 널리 전승되고 있다. 이렇게 나중에 동부여설화가 합쳐진 배경에는 동부여 출신 귀족들이 정치적으로 크게 성장하는 것과 관련되지 않을까 추정하기도 한다. 후기의 권력자였던 연개소문 집안이 동부여 계통 출신일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건국설화는 어느 정도 건국 당시의 사실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지만, 상당 부분은 관념적 산물로서 왕실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건국설화도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시대 상황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변화되어 간다. 이는 따지고 보면 고구려인 스스로가 자신의 역사를 새로 환기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건국설화 그 자체가 역사적 산물인 셈이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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