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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기 부검논란]"아들 부검 깊이 후회"..연세대 노수석씨 부친

김태헌 기자 입력 2016. 10. 0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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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년 시위진압 과정서 사망한 노수석 학생 父 인터뷰 최루탄 흡입·구타 정황에도 부검서 "사인은 심장질환"
1996년 故 노수석씨 영결식장 모습. (노수석 열사 추모사업회 제공) © News1

(서울=뉴스1) 김태헌 기자 = "부검을 해야 사인이 정확히 밝혀진다고만 믿었으니까요. 우리 수석이 부검하도록 둔 걸 정말 후회합니다."

지난해 민중총궐기 당시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뒤 약 10개월 만에 유명을 달리한 고(故) 백남기씨(69)에 대한 부검영장이 28일 발부된 가운데, 20년 전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숨진 고(故) 노수석씨(당시 20세)의 아버지에게 당시 심경과 최근 백남기 사태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1996년 3월29일 연세대 법대 2학년에 재학 중이던 노수석씨는 서울 종묘에서 열린 '등록금 인상 반대와 김영삼 대통령 대선자금 공개 촉구 결의대회'에 참여한 뒤 최루탄과 곤봉으로 진압하던 경찰에 쫓기다 을지로5가의 한 인쇄소 안에서 숨을 거뒀다.

당시 경찰의 과잉진압은 비판을 받았고, 노씨 사망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 촉구가 정치권과 시민사회에서 터져 나왔다. 이에 사법당국은 노씨에 대한 부검을 진행하고 '심장질환으로 인한 급성심장마비'가 사인이라고 밝혔다. 총 7곳에서 피하출혈이 발견되는 등 외상이 있었으나 부검의들은 직접적인 사인이 아니라고 밝혔다.

부검 참관인이었던 양길승 의학박사는 부검결과 발표 후 "평소 건강하던 청년이 외부 충격이 없는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심장 이상증세를 보여 사망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진압과정에서 가해진 외부충격이 심장에 영향을 줘 사망했을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유족과 시민사회는 부검결과에 반발했고 이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등을 진행하며 사인에 대해 공방을 벌였다. 그러나 부검결과가 주요 증거로 채택되면서 소송에서 패했다. 2003년 9월이 돼서야 노수석씨는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됐다.

1996년 아들의 시신을 부여 안고 슬퍼하는 노봉구씨(당시 54세). (노수석 열사 추모사업회 제공) © News1

29일 오후 뉴스1과의 통화에서 노수석씨의 아버지 노봉구씨(74)는 "백남기 농민 사태를 보면서 '왜 수석이 때 부검을 반대하지 못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노씨는 "당시에는 사인을 정확히 밝히려면 꼭 부검이 필요하다고 믿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 후회된다"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노씨는 "당시에는 백골단이 시위진압을 하면서 곤봉으로 시위대를 두들겨 패고 최루탄을 쏟아부었다"며 "그런 부분은 부검결과에 전혀 반영되지 않고 심장이 멈춰 죽었다고 사인이 나왔다. 얼마나 모순이냐"라고 말했다.

노씨는 사인으로 지명된 '심장질환으로 인한 심정지'에 대해 "모든 사람은 죽을 때 심장이 멈추는데 그게 사인이라는 게 황당하다"고 말했다.

또 노씨는 "수석이는 선천적 심장질환으로 고생한 적이 없었다"며 "고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몸을 많이 쓰는 풍물패를 열심히 했을 정도로 건강했다. 그렇기에 심장마비라는 부검 결과가 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백남기씨는 물대포에 직접 맞는 영상이 있고, 그 충격으로 300일 넘게 식물인간으로도 계셨다"며 "원인이 명백한데도 왜 경찰이 부검하려고 하는지 의문이다"고 말했다. 노씨는 "부검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백남기씨 죽음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길 바란다"며 말을 맺었다.

solidarite4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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