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배속이 우르릉 쾅쾅" vs "그냥 배가 아파요"

송태호 송내과의원 원장·의학박사 2016. 10. 8.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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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호의 의사도 사람] 형용사·부사 발달한 한글, 통증 표현하는 말도 다양.. SNS로 소통하는 젊은 세대 의성어·이모티콘 남발..생각 표현하는 데 서툴러

10월에 들어섰는데도 낮 기온이 높아서인지 배앓이를 하는 환자들이 제법 있다.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온 70대 할머니가 말했다. "명치 부근이 간질간질하더니 배속에서 우르르 쾅쾅 천둥소리가 나면서 애가 트는 것처럼 틀다가 식은땀이 좌악 나고 화장실에 갔더니 그냥 수도꼭지에서 물이 콸콸 나오듯이 설사를 한바탕 하고 났더니 기운이 하나도 없어. 그래서 누워 있었는데 또 배가 트는 거야." 근래 들었던 배앓이 환자 중 가장 실감 나는 표현이었다. 이것을 다른 나라 말로 옮기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이 실감 나는 통증을 영어로는 '칼릭 페인(colic pain)'이라고 한다. 배를 칼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도 칼릭이고 배를 쥐어짜는 통증도 칼릭이다.

전 세계 언어 중 우리나라 말처럼 형용사와 부사가 발달한 것도 없을 것이다. 이런 실감 나는 표현을 들을 때마다 우리나라 말의 우수성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한글이 발명되기 전부터 이런 표현이 있었을 텐데 한자로는 당연히 기술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발명한 이유가 아닐 수 없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는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승무' 중 한 구절이다. 이 짧은 한 문장에 담긴 정서를 외국어로 표현해낸다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흰'과 '하이얀'은 같은 말처럼 보이지만 느끼는 감정이 다르다. 그저 하얗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우리말은 시간, 장소, 상황에 따라 같은 의미를 가진 다른 말을 폭넓게 쓰는 언어다. 태어날 때부터 한국어를 쓴 나로서는 영어로 쓰인 내과 의학 교과서가 무미건조하기 이를 데 없다. 우리나라 작가가 노벨상을 타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도 외국어로 번역했을 때 문체의 맛이 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노벨상을 타려면 서양 사람처럼 생각하고 그들의 문체로 써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얻어낸 노벨상이 과연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같은 날 오후엔 중학생이 배앓이 때문에 병원에 찾아왔다. "어떻게 아프냐"고 물었더니 짜증 난다는 기색으로 "그냥 배가 아파요. 아 몰라. 그냥 아프다니깐요"라고 말했다. 문진(問診)이 왜 중요한지 설명한 다음 선택형으로 물었다. "여기가 아픈가요? 아니면 저기가 아픈가요? 배가 쓰린가요? 아니면 쥐어짜듯이 아픈가요? 언제부터 어떻게 아픈지 설명해봐요." 사지 선택에 익숙하기도 할 텐데 머뭇거리며 답변을 못한다. "모르겠어요. 그냥 아파요. 아팠다가 사라졌다가 그래요."

아마도 이 학생은 앞으로 연애편지 쓰기도 무척 어려울 것이다. 자기가 느끼는 것을 말로도 표현하지 못하는데 어찌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 또래인 내 둘째 딸도 틈만 나면 SNS를 붙들고 친구들과 이야기한다. 뭐라고 하나 슬며시 어깨너머로 보았더니 'ㅋㅋ ㅇㅇ' 온통 의성어와 이모티콘뿐이다. 문장이라고 해봐야 10글자 이내다. 같은 자리에 앉아서도 문자로 소통하는 세대라서 빠른 의사소통을 위한 방편이라는 것은 알겠지만 걱정이 앞선다.

생각한 것을 글로 표현하기는 너무나 어렵다. 따라서 훈련이 필요하다. 대학 입시에 논술시험이 있는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 세대는 길고 논리적인 문장을 싫어한다. 직감적이고 간단한 문장만을 선호한다. 내일은 한글날, 글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나라도 아마 우리나라밖에 없을 것이다. 지하에 계신 세종대왕이 걱정하실까 봐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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