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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죽인 경찰, 시신에 손 대지 말라"

김연희 기자 입력 2016. 10. 11.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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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5일 밤,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의 분위기는 삼엄했다. 경내 곳곳에 대열을 갖춘 경찰이 눈에 띄었다. 경찰 병력은 담처럼 병원 정문과 후문을 막아섰다. 조문객들은 경찰과 승강이를 벌인 끝에야 장례식장에 닿을 수 있었다.

이날 오후 1시58분, 백남기씨가 숨졌다. 부인 박경숙씨와 딸 도라지, 아들 두산씨가 임종을 지켰다. 하지만 유가족들은 남편·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이날 경찰은 서울대병원에 병력 3600여 명을 배치했다. 슬픔 대신 긴장감이 장례식장을 메웠다.

한 차례 부검 영장을 기각했던 법원은 9월28일 밤, 압수수색 검증 영장(부검 영장)을 발부했다. “경찰의 손에 돌아가신 고인의 시신에 다시 경찰의 손이 절대로 닿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유족으로서의 도리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런 패륜·불효를 저지르고 싶지 않습니다(유가족 탄원서).” 지난 317일간 그랬듯 가족들의 호소는 외면당했다.

ⓒ시사IN 이명익 9월28일, 고 백남기 농민의 유가족들이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부검 영장 집행에 대한 거부 의사를 밝히고 있다.

“오늘은 저희 아버지 칠순 생신입니다. 이쁜 손자 2년밖에 못 봐서 참 미안하당. 사랑해 아빠.”

2016년 9월24일 사건 316일, 백민주화씨 페이스북에서

69번째 생일을 앞두고 백남기씨 상태는 급격히 나빠졌다. 이뇨제를 써도 소변이 나오지 않아 더 이상의 약물 투여가 어려웠다. 의료진은 가족에게 이 같은 사실을 통보했다. 가족들은 중환자실 앞을 지켰다. 백씨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병원에 모인 건 가족들만이 아니었다. 이날 밤 10시께 경찰차 20여 대가 서울대병원 주변에 배치됐다. 병원 안팎에서는 검찰과 경찰이 부검을 할 것이라는 말이 퍼졌다. 백남기 투쟁본부는 “지난 10개월간 고발된 경찰들을 제대로 수사하지 않던 검찰이 부검 얘기를 하고 있다. 이는 사인(死因)을 뒤집기 위한 빌미를 찾으려는 시도다”라고 비판했다.

백씨 사망 직후 서울대병원이 작성한 사망진단서도 논란이 되었다. 사망진단서에는 ‘사망의 종류’로 외부 충격에 의한 사망을 뜻하는 ‘외인사’ 대신 ‘병사’가 표시되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우석균 공동대표는 “말이 안 되는 진단서다. 대한의사협회는 선행 사인을 사망 원인으로 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이를 어겼다”라고 말했다. 백씨 사망진단서에는 직접 사인으로 심폐정지, 중간 선행 사인으로 급성신부전, 선행 사인으로 급성경막하출혈(뇌출혈)이 기재돼 있다. 우 대표는 “급성신부전은 와병으로 오래 누워 있으면 발생한다. 선행 사인인 뇌출혈을 사망 원인으로 삼아 외인사 진단을 내렸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사고 이후 백씨의 의료 기록을 확인한 신경외과 전문의 김경일씨는 “백씨의 사인은 살수차 충격으로 인한 뇌출혈이다. 그 자리에서 즉시 돌아가실 수 있었는데 현대 의학의 힘을 빌려 지금까지 연명하신 거다. 마치 논쟁점이 있는 것처럼 몰고 가는데 이는 의학적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소견을 밝혔다.

백씨가 세상을 떠나고 이틀이 지난 9월27일, 둘째 딸 민주화씨가 네덜란드인 시부모, 남편 그리고 아들 지오와 함께 입국했다. 지난해 서울대병원 중환자실 앞에서 밤을 지새웠던 가족은 10개월 뒤 장례식장에 다시 모였다. 9월28일 부검 영장 발부 소식에 상복을 차려입은 일가족이 기자회견 카메라 앞에 섰다. 도라지·민주화씨뿐만 아니라 부인 박경숙씨, 아들 두산씨까지 나선 건 처음이었다. “저희 가족은 절대 부검을 원하지 않습니다.” 유가족의 요구는 짧고 단순했다.

ⓒ시사IN 조남진 지난 2월23일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를 촉구하는 도보순례단이 천안시내를 행진하고 있다.

“부모님께서 파종한 우리밀을 얼마 전에 수확했어요.”

2016년 6월22일 사건 222일, 백민주화씨 페이스북에서

6월13일 백씨의 후배들은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형님을 대신해 밀을 수확했다. 지난해 가을 서울로 향하기 이틀 전 백씨가 파종한 밀이었다. 백씨의 부인 박경숙씨는 남편 후배들을 대접할 새참을 준비했다. 밀은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작물이지만 농부의 부재는 숨길 수 없었다. 평소 40kg짜리 가마니로 50~60가마가 나오던 밀밭에서 밀을 32가마밖에 거두지 못했다.

백남기씨는 1982년 고향인 전남 보성 웅치면으로 돌아왔다. 그는 유신 철폐에 앞장서 1970년대를 민주화 운동으로 보냈다. 그 와중에 중앙대 행정학과로부터 무기정학을 당했다. 10·26 사태로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자 무기정학이 해제됐지만, 이윽고 들어선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다 2년간 옥살이를 치렀다. 백씨의 꿈은 백도라지·백두산·백민주화 세 자녀의 이름에 새겨졌다.

1989년부터 밀 농사를 지은 백씨는 우리 밀 살리기의 선구자였다. 1989~1991년에는 가톨릭농민회 광주·전남 지역 회장을 맡았다. 농민 운동을 이끌었지만 후배들은 그를 풍물놀이와 막걸리를 좋아하고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소탈한 형님으로 기억했다. 아침마다 꽹과리를 치며 논밭을 도는 백씨를 두고 이웃들은 “멧돼지를 쫓아준다”라며 반겼다. 그가 심은 마지막 밀은 ‘백남기우리밀’ 세트로 만들어졌다.

ⓒ참여연대 6월17일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발언 중인 백민주화씨(두 번째 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No apology, No investigation, No justice” (사과도, 수사도, 정의도 없습니다).

2016년 6월17일 사건 217일, 백민주화씨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백민주화씨는 6월17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인권위원회에 참석했다. 마이나 키아이 유엔 평화적 집회 및 결사의 자유 특별보고관, 한국 정부를 대표해 나온 유대종 외교부 국제기구 국장 다음으로 민주화씨에게 발언 기회가 주어졌다. 민주화씨는 “아버지는 200일이 넘도록 의식불명이다. 한국 정부는 시위를 집회가 아닌 범죄로 규정하여 임의적으로 금지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혹시 허락하신다면 제 아버지에게 발언할 기회를 주고 싶다”라며 사진 한 장을 들었다.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백남기씨의 사진이었다.

이날 키아이 특별보고관은 한국을 방문해 집회의 자유 실태를 조사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21쪽 분량의 보고서에는 ‘국가 안보를 이유로 인권이 희생돼선 안 된다’ ‘모든 집회는 평화적일 것이라 간주해야 하며, 일부 참가자들의 행동이 평화롭지 않더라도 나머지 참석자들의 권리를 부정할 순 없다’ 등의 내용이 담겼다. 살수차 사용과 관련해서는 백남기씨 사례를 들며 ‘한국 정부의 물대포 사용은 무차별적이다. 집회 참가자들에게 심각한 위해를 가할 수 있다’라고 꼬집었다.

이에 대해 유대종 외교부 국장은 “경찰은 2015년 (집회에서) 폭력이 발생했을 때 엄격한 가이드라인에 따라 물대포를 4번만 사용했다. 백남기씨의 경우 검찰에서 철저히 수사하고 있다. 합법적 참가자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국민을 지키고 보호하는 데 써야 할 공권력을 정부가 아무런 제한 없이 휘두르는 일은 민주주의, 법치국가에서는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2016년 2월21일 사건 100일, 백도라지씨 기자회견에서

도보순례에 나선 백남기대책위(9월26일 백남기 투쟁본부로 전환)는 2월11일 백씨가 살던 전남 보성을 출발했다. 서울까지 16박17일, 천리 길을 나선 이유는 ‘책임자 처벌’과 ‘정부의 사과’를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한 참가자는 “정부가 사과하는 것과 백남기 농민이 깨어나는 것 중에 어떤 게 기적일까? 도보 순례가 참 힘든데 다른 방법이 없다”라고 말했다.

도보순례단은 사고 100일째가 되는 2월21일 대전에 도착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도라지씨는 “아빠가 쓰러지시고 100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박 대통령은 사과하고 경찰청장이 파면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그 100일간 도라지씨의 삶도 아버지를 중심으로 돌았다. 다니던 회사를 휴직한 그녀는 가족 대표로서 기자회견, 법률 대응 등을 도맡았다.

네덜란드에 사는 둘째 딸 민주화씨는 1월28일 로테르담 역에서 1인 시위를 시작했다.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백남기씨 사진 밑에 ‘아버지가 경찰의 물대포에 의해 쓰러진 후 여전히 의식이 없다. 정부의 사과도 전혀 없었다’는 영어 문구를 쓴 피켓을 직접 만들었다. 네덜란드 시민들은 “(북한이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일이 맞느냐”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연합뉴스 2015년 11월14일 백남기 농민이 경찰 물대포에 맞고 쓰러지는 장면.

“물대포에 맞았다니 물에 젖었겠구나 생각했다.”

2015년 11월14일 사건 첫날, 백도라지씨 인터뷰에서

백도라지씨는 지난해 11월14일 저녁 7시30분께 아버지가 서울대병원에 있다는 전화를 받았다. ‘물에 좀 젖었겠구나’ 여겼던 아버지는 의식불명 상태였다. 밤 11시부터 새벽 4시까지 이어진 수술. 의료진은 생명을 연장하는 조치일 뿐 소생을 기대하는 건 어렵다고 전했다.

도라지씨는 병원으로부터 아버지가 입고 있던 옷을 돌려받았다. 캡사이신과 최루액을 머금어 지독한 냄새가 나는 옷은 그날의 참혹한 상황을 증언하는 것 같았다. 도라지씨는 수사의 주요 증거가 될까 싶어 옷을 빨지 않고 말렸다. 11월18일 가족들과 백남기대책위원회는 강신명 전 경찰청장을 비롯해 경찰 책임자 7명을 고발했다. 지금까지 검찰은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라고만 말한다. 백씨가 물대포에 쓰러지고 15일 뒤인 지난해 11월29일 둘째 딸 민주화씨는 페이스북에 아버지를 향한 편지를 남겼다. “아빠랑 (아들 지오가) 노는 동영상을 웃으면서 또 보고, 또 보고 하는데 행복한 모습이 날 더 눈물 나게 한다. 아빠 (…) 딱 5년만 더 아빠 웃는 모습 보고 싶다. 이거 욕심 아니지? 아니라고 대답해줘요. 우리가 정말 많이 기다려요.”

김연희 기자 u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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