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한겨레

[단독] 강경대와 백남기..군사정권도 합의로 사인 규명했다

입력 2016. 10. 14. 04:06 수정 2016. 10. 14. 10:06

기사 도구 모음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글자 크기 조절 레이어

[한겨레] 25년전 강씨 검안했던 양길승 녹색병원 이사장 메모 공개
당시도 부검 놓고 갈등…검·유족, 공동검안 합의·결과 수용
양 이사장 “군사정권도 대화·소통해 부검 없이 사인 규명”

경찰 물대포에 맞아 숨진 백남기 농민의 사망사건을 대하는 정부의 태도를 보며, 사람들은 군사정권 시절을 떠올린다. 그런데 실제 군사정권 시절에 국가폭력에 의한 사망 사건은 어떻게 처리됐을까?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노태우 정부 시절 명지대 경제학과 1학년 강경대씨가 등록금 인하와 학원자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다 1991년 4월26일 백골단이라고 불리던 전투 경찰들에게 쇠파이프로 구타당해 숨지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소속 의사로서 강경대씨 사인규명에 참여했던 양길승 녹색병원 이사장이 25년 전 사인규명 과정을 기록했던 메모를 공개했다. 메모에는 “검찰(정부)과 유족 및 대책회의가 성의를 가지고 합의하여 검안이 이루어진 점”과 “검안에 첨단기기를 활용함으로 편의주의와 유족의 심정에 반하는 부검을 통하지 않고도 사인을 확인할 수 있는 선례·교훈을 남김”이라고 기록돼있어 백남기 농민 사건과 비교된다.

13일 양길승 녹색병원 이사장이 <한겨레>에 공개한 1991년 5월2일 강경대 열사를 검안하고 작성한 메모. 양길승 이사장 제공

13일 양 이사장 설명을 들어보면, 당시에도 부검 여부를 두고 갈등이 심했다. 검찰은 사인 규명을 위해 부검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지만, 유족은 부검을 신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목격자도 있고, 외상 흔적도 분명해 부검이 필요없다고 맞섰다.

하지만 당시 검찰은 유족과 지속적으로 소통한 끝에, 사망 5일 만인 91년 5월1일 유족과 부검을 전제하지 않은 공동검안에 합의했다. 검찰과 유족이 각각 의사 4명씩을 추천하고, 이들이 강씨 시신을 검안한 뒤 부검 여부에 대한 입장을 정하면 유족과 검찰 모두 그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당시 보고서를 보면, 검찰 추천으로는 이윤성 서울대학교 법의학과 교수와 이정빈 서울대 명예교수, 황적준 고려대 명예교수, 서재관 당시 국립과학수연구소 법의관이 참여했고, 유족 추천으로는 양 이사장과 신경외과 전문의인 변박장 전 순천향대의료원장, 정형외과 전문의인 고한석 전 서울백병원 교수, 최병수 전 보훈병원 일반외과장이 참여했다.

양 이사장은 “처음에는 강씨가 머리에 쇠파이프를 맞아 죽은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외상 흔적은 많았는데 특히 오른쪽 이마에 길이 4.3㎝, 폭 1.2㎝의 상처가 있었고 정수리에 지름 3.5㎝ 정도의 손상이 보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검시 결과는 달랐다. 양 이사장은 “엑스레이와 씨티(CT) 촬영한 결과를 보니 갈비뼈가 부러지고, 부러진 뼈가 심낭을 찔러 발생한 출혈이 심장을 조인 것이 보였다. 이것이 가슴에 있는 외상 흔적과 일치했다. 결국 사인은 가슴 부위를 가격당해 발생한 심낭막 내 출혈인 것으로 드러났다”고 설명했다.

양 이사장은 “당시에도 법의학자들은 끝까지 부검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검안 결과를 검찰과 법원이 수용해 가해자들이 구속 기소돼 처벌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양 이사장은 “군사정권 시절에도 그렇게 대화하고 소통해서 부검 없이 사인규명을 했다. 백남기 농민 사건은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목격자와 영상자료, 의료기록이 있는데도 이런 논란이 벌어져 착잡하다”는 심경을 밝혔다.

당시 검찰 쪽 추천 의사로 검안에 참여했던 황적준 교수는 훗날 언론 인터뷰에서 “요즘 유럽에선 부검 대신 엑스레이를 찍어 사인을 밝히는 ‘벌톱시’라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일명 ‘칼 대지 않는 부검’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강경대 군 사건이 뜻하지 않게 우리나라 법의학 최초의 벌톱시 케이스가 된 셈”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검찰과 정부의 태도도 지금과 대조된다. 당시 검찰은 강경대씨 사망사건이 발생한 직후 관할 검찰청인 서부지검에 신속하게 수사팀을 꾸려 사건을 직접 챙겼다. 검찰이 직접 유족을 만나 설득했고 대화를 이어간 끝에 부검 없는 사인규명에 합의했다. 하지만 현재 검찰은 사건 발생 열달이 넘도록 제대로 된 수사를 진행하지 않고 있다. 또 사건 당사자인 경찰로 하여금 유족을 접촉하게 해 반발을 더욱 키우고 있다.

정부의 대처도 달랐다. 안응모 당시 내무부 장관은 사고 다음날인 91년 4월27일 아직 사인규명과 수사가 시작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대국민사과를 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노태우 대통령도 6일 뒤인 91년 5월2일 국민과 유족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백남기 농민이 쓰러지고 열흘이 지난 국무회의에서 처음으로 민중총궐기를 언급하며 시위대의 폭력성만 강조했다. 허승 기자 raison@hani.co.kr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포토&TV

    이 시각 추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