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에 걸쳐 왕후와 태후 고구려의 여걸 우씨 왕후

임기환 입력 2016. 12. 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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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사 명장면-8] 우리 역사에서 55년 동안 왕후와 태후로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여인이라면 누가 떠오르는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역대 어떤 여걸 못지않은 고구려 우씨 왕후 이야기를 해볼까한다.

  197년 5월 고국천왕이 재위 19년 만에 사망하였다. 왕후 우씨는 왕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밤에 몰래 궁궐을 나섰다. 그가 향한 곳은 왕의 첫째 동생 발기의 집이었다. 그는 발기에게 "왕의 아들이 없으니 마땅히 당신이 왕의 뒤를 이어야지요"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발기는 고국천왕이 죽은 것을 모르고, 밤에 찾아온 우씨의 행실을 비난하였다.

 무안해진 우씨는 둘째 동생 연우의 집으로 갔는데, 연우는 의관을 갖추고 예를 다해 환대하였다. 우씨가 왕의 죽음을 알리자 연우는 더욱 정성스럽게 직접 칼을 잡고 고기를 베다가 손가락을 다쳤고, 우씨는 치마끈을 풀어 다친 손가락을 싸매주었다. 둘 사이에 은밀한 교감이 오고간 것이다.

  연우가 자신의 속내를 알아차렸다고 생각한 우씨는 "밤이 깊으니 궁궐까지 바래다달라"고 은근히 청하였다. 연우도 그 뜻을 알고 왕후의 손을 잡고 궁궐로 들어갔다. 이튿날 우씨 왕후는 선왕의 유명이라고 하면서 연우를 왕으로 세웠다. 그가 산상왕이다.

필자가 산상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는 마선구 626호 고분.산 중턱에 높이 축조되어 있어, 산상왕이라는 왕호에 어울린다. [사진출처 = 필자]
 이 소식을 들은 발기는 군사를 거느리고 왕궁을 공격하였지만, 나라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자, 결국 요동의 공손씨에게 도망하였다. 그는 군사를 빌려 고구려를 공격하였다가 패배하고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발기의 죽음으로 즉위 초 혼란이 수습되자 우씨 때문에 왕위에 오르게 된 산상왕은 다시 장가들지 않고 우씨를 왕후로 삼았다.

  이렇게 고국천왕의 왕후 우씨는 다시 시동생의 부인이 된 것이다. 아마 독자 분들은 이런 혼인관계에 당혹스러움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형이 아들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삼는 '형사취수혼'은 북방 민족 사이에서는 흔한 풍속이었다. 하지만 산상왕이 즉위하게 되는 과정을 보면 '형사취수'라기보다는 오히려 우씨가 재혼할 시동생을 선택하는 '형사취제'의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왕후 우씨의 행위는 단순히 취수혼 풍속에 따른 것이 아니라 매우 정치적인 행위였던 것이다. 왜 우씨는 이런 매우 이례적인 행동을 하였던 것일까?

  우씨는 연나부 출신으로 180년에 고국천왕의 왕후가 되었다. 그런데 191년에 왕비족인 연나부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자 곤란해졌다. 고국천왕은 을파소를 등용하여 강력하게 정계 개편을 추진하였는데, 연나부 출신 우씨는 왕후 자리를 유지했다. 우씨 집안이 이 반란과 직접 관련이 없을 수도 있고, 혹은 고국천왕이 연나부 세력을 완전히 압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씨의 지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비록 왕후 자리를 유지했지만 우씨는 고국천왕대에는 전혀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그런데 고국천왕이 죽자 이 틈에 우씨는 스스로 주인공이 되려는 야망을 가졌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우씨는 차기 왕위 계승자를 자신이 선택했고, 산상왕을 왕위에 올리고 다시 왕후가 되었다. 이후 우씨 왕후는 사료상으로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그 위세가 대단하여 산상왕도 쉽게 제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양상을 보면 우씨가 스스로 차기 왕을 선택한 배경에는 왕후라는 자신의 지위를 지속시키려는 정치적 야망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국천왕도 아들이 없었지만, 산상왕 역시 우씨와의 사이에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후사가 없다면 사실 취수혼의 의미가 퇴색하는 셈이다. 이에 산상왕은 아들을 얻기 위해 다른 부인을 맞고자 했는데, 산상왕이 소후를 맞는 과정이 매우 흥미롭다.

  산상왕은 재위 7년인 203년에 아들을 얻게 해달라고 산천에 기도한 뒤, 하늘이 "소후(小后)로 아들을 낳게 할 것이니 염려말아라"라고 말하는 꿈을 꾸었다고 군신들에게 공개하였다. 그후 208년에 제사에 쓸 돼지가 주통촌으로 달아나 아름다운 여인이 이 돼지를 잡는 사건이 생기고, 이를 기이하게 여긴 산상왕이 주통촌으로 가서 그 여인을 소후로 삼았다. 이를 알게 된 우씨가 소후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소후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된 산상왕이 적극 보호하게 된다. 이렇게 태어난 아들이 바로 동천왕이다.

  즉 산상왕이 소후를 들이는 데에도 굳이 하늘의 뜻을 거론하고, 또 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나는 기적을 만들어서 겨우 가능했던 것이다. 이는 단순히 우씨의 질투라기보다는 소후라는 경쟁자가 등장하여 자신의 권력을 나누게 될 것을 두려워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왕후라는 자리는 스스로 권력을 갖고 있다기 보다는 자신이 낳은 자식이 차기 왕위를 이어감으로써 권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227년 5월 산상왕이 죽었을 때에도 우씨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자신이 죽이려고 했던 소후의 자식인 동천왕이 왕위에 올랐다. 불안했던 왕후는 동천왕의 너그러움을 시험해 보기 위해 왕이 타는 말의 갈기를 자르게 하거나, 또 시종을 시켜 왕의 옷에 국을 엎지르게 하였다. 그러나 동천왕은 화를 내기는 커녕 오히려 우씨를 높여 왕태후로 받들었다. 동천왕의 품성이 너그럽기도 했겠지만, 우씨 왕후의 위세가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또 동천왕 2년에 연나부 출신 명림어수가 최고직인 국상(國相)에 임명된 점에서도 우씨의 정치적 영향력을 엿볼 수 있다.

 234년 우씨가 죽으면서 유언을 남겼는데, 두 명의 남편 중 산상왕의 무덤 곁에 묻어달라고 한 것이다. 취수혼의 경우 본 남편의 무덤에 합장하는 것이 도리인데, 우씨는 마지막 자신의 장지까지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따지고보면 우씨는 왕후로 48년, 왕태후로 7년 모두 55년 동안 3대 왕에 걸쳐 왕후와 태후라는 자리에 있었다. 우씨의 영향력이 어떠했을지는 이런 이력만 보아도 충분히 짐작이 간다. 이런 면을 보면 왕후 우씨는 대단히 주체적인 자의식을 갖고 있고 정치적 야망도 크고 담대한 선택도 두려워하지 않는 여장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를 단지 우씨 왕후만의 독특한 캐릭터라고 한정할 필요는 없겠다. 여걸다운 풍모를 물씬 풍기는 우씨 왕후를 통해 고구려 여인들이 갖고 있던 당당함과 주체성 또한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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