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의외였다. 소심하고 수줍음 많고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할 것 같은 ‘샤이(Shy) 안철수’를 기대하고 갔는데 힘 있는 목소리, 날 선 눈빛으로 폭포수처럼 열변을 토하는 ‘강골 안철수’가 있었다. 기업인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지 5년. 정치인 안철수는 겉 다르고 속 다른, 음모와 배신이 판치는 한국 정치의 속살을 헤쳐 나오면서 그야말로 ‘압축 성장’을 한 듯했다. 2011년 서울시장 선거에서는 박원순 후보에게,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문재인 후보에게 ‘양보’를 거듭했던 탓에 안 전 대표에게는 ‘철수(撤收)정치’라는 불명예스러운 닉네임이 붙어 있다. 그래서 “2017년 대선에 출마할 거냐? 혹시 또 양보할 거냐?” 대놓고 물어봤다. 안 전 대표는 특유의 빙그레한 미소를 지으며 “실수를 많이 하는 스타일이지만 한 번 했던 실수는 반복 안 한다”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대선이 본격화되면 합종이든 연횡이든 짧은 시간 안에 결실이 나타날 것이라며 사뭇 당찬 권력의지, 정치 9단 같은 공력도 드러냈다. 섣부르게 피아(彼我)를 가르지도, 스스로 퇴로를 차단하지도 않는 노련한 응수가 돋보였다. ‘정치인 안철수’는 이제야말로 진짜 대통령 후보감으로 거듭난 듯했다.

Q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정치 지형이 요동치고 있다. 반기문 총장이 대선 출마를 공식화하면서 지지도 1위를 재탈환했다. 안 전 대표와 국민의당 지지율은 여전히 정체 상태다.
A 이번 탄핵 정국 내내 정치한다는 생각보다 나라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도널프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저와 펜실베이니아대(유펜·UPenn) 동문이다.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다. 지난 10월 25일 박 대통령의 1차 대국민 사과 후 미국 지인들 얘기를 들어보니 미국은 더 이상 박 대통령을 외교 상대로 생각하지 않더라. ‘내치는 총리에게, 외교는 박 대통령에게’라는 통념이 지배적일 때 ‘총리에게 전권을 줘야 한다’고 먼저 주장했던 이유다. 퇴진 당론, 탄핵 당론 역시 국민의당이 앞장섰다. 전 국민이 감정적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을 때는 잘 안 보일 수 있지만 안개가 걷히면 객관적으로 평가받을 것이라고 믿는다.
Q “탄핵심판이 기각되면 혁명밖에 없다”는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발언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고 있다.
A 헌재 측에 하루빨리 신속하고 공정하게 판결을 해달라고 촉구하는 정도면 충분하다. 법리 검토의 완결성 못지않게 신속성도 중요하다. 외과수술에 비유하자면 환자 배 갈라서 환부 말끔하게 도려내고 상처 부위 꼼꼼하게 잘 꿰맸는데 정작 수술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환자가 죽는 경우랑 비슷하다. 지금 우리 경제는 빠른 속도로 붕괴되고 있다. 헌재가 빨리 결론을 내리는 게 나라를 살리는 길이다.
Q 문재인 전 대표가 사드(THAAD) 배치 반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무효화 등을 주장하면서 보수층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A 이미 체결된 정부 간 협약을 손바닥 뒤집듯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다음 정부에서 국익을 최우선 기준으로 삼아 재검토할 수는 있다고 본다. 사드의 경우 중국의 대북제재를 끌어내기 위한 레버리지 전략을 충분히 쓴 다음에 배치를 결정했어야 했다. 이 수순이 생략되는 바람에 국가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초래했고 앞으로 운신의 폭도 거의 없어졌다.
Q 새누리당은 분당 와해 수순으로 가고 있다. 탈당하는 비박계와 연대 가능성은.
A 한국 정치에서 만악(萬惡)의 근원이 책임지지 않는 것이다. 책임 안 지고 뻔뻔하게 버티는 사람이 되레 능력 있는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새누리당만 봐도 사상 초유의 국정농단·국기문란 사태에서 책임지는 세력이 전혀 없다. 친박(親朴)은 정치 역사상 이런 집단이 있나 싶을 정도로 안하무인, 후안무치다. 친박은 모두 정계 은퇴해야 한다. 비박계도 묵인 내지 방조의 책임이 없을 수 없다. 참회해야 한다.
Q 중도·보수를 아우르는 이른바 ‘제3지대 연대론’에 대한 기대가 크다.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겠나.
A 사회 전 분야가 뿌리부터 썩었다는 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드러났다. 돈으로 학점을 사고 대학 입학을 좌지우지했다. 국가 사회의 기본이 무너졌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좋은 기회다. 국민적 충격이 큰 만큼 개혁의 동력은 충분히 마련된 셈이다. 합리적 개혁 세력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 대선 전 4개월 동안 조선왕조 500년만큼의 사건이 일어난다는 말이 있다. 외연을 넓히는 작업이나 세력화도 대선처럼 큰 선거를 앞두면 화학반응이 빨라진다. 매일같이 사람 만나고 얘기 듣고 있다. 짧은 시간 안에 결실이 나타날 것이다.
Q 혼밥스타일(사교성 없음)·타고난 금수저·주변에 사람이 없다 등 박 대통령과 공통점이 많다는 평가다.
A 제발 혼밥 한번 먹어봤으면 좋겠다. 교수 시절에도 외부 강연 등 스케줄이 워낙 빡빡하고 만나자는 사람이 많아서 혼자 밥 먹을 기회가 전혀 없었다.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언젠가 “정치하니까 힘들지 않느냐”고 물어보더라. 그래서 “솔직히 중소기업 사장할 때보다 훨씬 덜 힘들다”고 답한 적이 있다. 안철수연구소 창업하고 나서 처음 4년은 매일 은행에 돈 꾸러 다녔다. 어음깡이 일상이었다. 보험료 낼 자신이 없어서 보험상품 하나도 맘 놓고 가입하질 못했다. 교수 시절에도 처음에는 강의를 너무 못했는데 열심히 외부 강연하다 보니 강의 실력이 늘었다. 금수저로 보여도 의외로 흙수저 스타일이다. 밑바닥에서 시작해 딛고 올라선 경험이 더 많다.
Q 주변에 사람이 안 남아난다는 평가에 대해 해명한다면.
A 안랩 직원 대부분이 10~15년 된 장기근속 직원들이다. 고참 직원일수록 나랑 잘 지낸다. 카이스트에서 가르쳤던 학생들은 지금도 스승의 날 꼬박꼬박 찾아온다. 나는 일반 대중보다 나를 잘 아는 사람과 더 친하다. 일반 학생보다 지도 학생, 수업 들었던 학생들과 더 친하다. 그런데 정치에선 인간관계가 많이 다르더라. 일반 사회생활에서는 한 번 적은 영원한 적이고 한 번 동지는 영원한 동지 아닌가. 그런데 정치권에서는 ‘영원한 동지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는 말이 더 맞는 것 같다.
Q 정치 입문 초기만 해도 어눌하고 수줍음 많다는 인상이 강했다. 지금 보니 말을 정말 잘하고 콘텐츠도 많이 보강된 것 같다. 학습 능력이 워낙 탁월한 건가.
A 교수 하면서 한 학기에 외부 강의를 100번씩 했다. 안랩에서는 영업이 전문이었다. 평생 제일 오래 한 일이 영업과 강연이다. 말을 못하는 게 이상한 거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딱 한 가지 있다. 이 악물고 참기다. 어릴 때 100m 달리기 경주하면 중간밖에 안 됐는데 1000m 하면 1등 했다. 요즘도 일주일에 사흘 정도는 중랑천에서 5~6㎞씩 뛴다. 처음에는 1㎞도 힘들다. 그런데 꾹 참고 달리다 보면 어느새 6㎞가 돼 있다. 정치도 4년간 농축 경험을 하면서 지난 4월 3당 체제를 만들었다. 정치하다 보면 온갖 방해가 들어오는데 이걸 어떻게 뚫고 내 뜻을 관철시켜야 하는지 확실히 배웠다.
Q 탄핵정국 속에서 안보·경제위기감이 높아지고 있다.
A 2017년에 외환위기 때보다 더한 위기가 올 것이라는 전망에 동의한다. 인구절벽, 수출절벽, 내수절벽, 기술절벽, 교육절벽 등 복합적인 문제가 한꺼번에 닥친다. 만약 박근혜정부보다 더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가 들어선다면 대한민국은 완전히 망하는 길로 가게 될 것이다. 나라가 망하는 판국에 솔직히 대권 주자들끼리 경쟁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이렇게 엄청난 위기를 헤치고 나갈 유능한 리더를 뽑아야 하는데 언론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 언론이 정치인을 콘텐츠로 평가하지 않고 이미지로만 평가하니까 ‘박근혜 게이트’ 같은 사태가 터진 거다. 언론이 평가기준을 바꾸지 않으면 또 콘텐츠 없는 대통령을 뽑게 될 것이다.

Q 산적한 경제 문제 가운데 우선순위를 꼽는다면.
A기본적으로 정치인이 경제 살리고 일자리 만들겠다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이다. 경제 살리고 일자리 만드는 것은 기업이 한다. 정부는 기업이 제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들어줘야 한다. 첫째는 교육 개혁을 제대로 해서 창의적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과학기술에 투자해서 기초 기술을 확보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공정한 경쟁이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실력 있고 빽 없는 사람이 실력 없고 빽만 있는 사람을 이길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사회다.
Q 사교육 문제가 심각하다. 교육 개혁의 구체적인 방법론은 뭔가.
A우선 정부의 틀을 바꿔야 한다. 현재의 교육부는 없애야 한다. 국가교육위원회를 만들어 장기적인 교육 목표와 정책을 수립하게 하고 10년 단위로 계획을 점검하면서 연속성이 보장되도록 해야 한다. 지금처럼 교육부가 재정을 무기로 대학들을 쥐락펴락할 것이 아니라 정부는 철저하게 뒤에서 교육을 지원하는 역할만 해야 한다. 교육 프로그램도 완전히 바꿔야 한다. 기업가정신 교육, 소프트웨어 교육, 독서 교육, 토론 교육을 초중고 정규 교육 프로그램에 집어넣어 창의적 인재를 길러내야 한다.
세 번째는 평생교육이다. 지금 우리나라 중장년층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데 관련 교육은 전혀 못 받고 있다. 선진국은 교육 예산 중 7%를 성인 평생교육에 할애하는 데 비해 우리나라는 0.07%에 불과하다. 100분의 1이다. 미국처럼 대학을 평생교육센터로 활용한다든가, MOOC(Massive Open Online Course) 같은 온라인 공개수업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
Q 트럼프 당선 이후 미·중 간 긴장이 극대화되고 있다. 다음 정권은 미국과 중국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을 가능성이 높은데.
A전 세계 중진국 가운데 1~4위 군사대국과 1~3위 경제대국에 둘러싸여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다. 강대국 사이에서 매번 선택을 강요받는 숙명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한미동맹이다. 한미동맹 없이 강대국 사이에서 우리가 독자적으로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미동맹을 근간으로 하되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미·중·일·러와 잘 소통하면서 경제·체제 위협을 최소화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Q 박근혜정부 보면 결국 ‘인사가 망사(亡事)’라는 말이 실감난다. 기업하면서 터득한 인사 원칙 같은 게 있다면.
A회사에서 가장 기본적인 인사 원칙이 스태프(참모진)와 라인(경영진)을 구분하는 것이다. 스태프로 어울리는 사람을 장관으로 기용하고 장관에 맞는 사람을 스태프로 쓰니까 문제가 생긴다. 우리나라 만큼 사회 각 분야별로 전문가 집단이 잘 갖춰진 나라가 없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인재풀을 놔두고 자기가 만나본 적이 있는 사람, 그중에서도 자기 말 잘 듣는 사람만 갖고 인사를 하니까 문제가 생긴 거다. 트럼프처럼 선거 때 상대편에서 일했던 사람이라도 능력이 있으면 과감하게 기용하는 문화가 돼야 한다.
Q 최순실 사태에서 드러났지만 이제는 정경유착에 검찰·국세청 등 국가기관까지 가담하는 형국이다.
A 검찰 개혁이 시급하다. 수사권 조정에 더해 고위공직자수사처를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검찰, 고위공무원, 청와대 비서실, 대통령 친인척 등을 제대로 견제할 수 있다.
재벌 개혁은 투트랙으로 접근해야 한다. 하나는 기업 지배구조 개혁이고 하나는 시장 개혁이다. 공정경쟁 원칙이 지켜지도록 시장을 개혁해야 하는데 핵심은 공정거래위원회다. 공정위를 경제검찰로 만들어 권한을 더 주되 100% 독립성과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 전관예우 문제가 핵심인데 전관예우는 현관(現官)들이 청탁을 들어주니까 성립한다. 이건 명백한 배임이다. 현관에 대한 처벌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
기업과 기업주도 구분해야 한다. 기업은 이미 전 국민의 자산이다. ‘오너’라는 말부터 틀린 말이다. 주식회사에 무슨 오너가 있나. 지분은 쥐꼬리만큼 갖고 있으면서 오너 행세하는 게 문제다. 권한은 많은데 책임은 거의 지지 않는 구조를 바꾸는 게 기업 지배구조 개혁의 핵심이다.
Q 재산 절반을 환원하기로 했었는데 잘되고 있나.
A 1500억원 기부해 ‘동그라미 재단’을 만들었다. 지방에 있는 사회적 기업 지원이 주 사업이다. 직접 교육시키고 경영 컨설턴트가 도와주고 자금도 지원한다. 정부 지원은 통상 창업 후 3년 지나면 끊어지는데 동그라미 재단은 3년 이후까지 꾸준히 지원한다. 그 밖에도 교육 격차 해소를 위해 은퇴한 선생님과 가정 형편 어려운 초중고 학생을 맺어주는 사업, 대한민국 격차지수를 산출하는 연구 프로젝트 등도 진행하고 있다.
[채경옥 주간부국장 chae@mk.co.kr, 김기진 기자 kjkim@mk.co.kr / 사진 : 윤관식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889·신년호 (2017.01.01~01.0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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