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 칼럼] 하데스와 시지푸스

김영민 입력 2017. 1. 1. 13:48 수정 2017. 1. 1.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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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아침 떠오르는 태양이 한 해 동안 또 굴려야 할 거대한 바위처럼 느껴지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시지푸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좋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신의 노여움을 산 시지푸스에게 명계(冥界)의 지배자 하데스가 내린 형벌은, 결국 아래로 다시 떨어지고야 말 무거운 바위를 산 정상으로 끊임없이 밀어 올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시지푸스는 오늘도 어디선가 무의미하게 지속되는 노역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다.

시지푸스가 상징하는 것은 단순한 노고, 단순한 덧없음, 단순한 끝없음 그 자체가 아니다. 시지푸스의 형벌이 의미하는 것은 그 세 가지가 모두 합해서 만들어지는 가공할 괴로움이다. 노고는 원래 힘든 것이다. 그런데 시지푸스의 경우, 인내는 쓰고 그 열매도 쓰다. 노고가 어떤 보람 있는 열매도 가져다 주지 않을 때, 오래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시지푸스의 보람 없는 노고는 끝날 길이 없다. 이 모든 요소가 더해졌을 때, 시지푸스의 형벌은 완성된다. 그러면 이 시지푸스의 형벌로부터 인생을 구원할 방법은 무엇인가. 시지푸스의 형벌을 이루는 3요소인 노고, 덧없음, 끝없음 중 하나만이라도 제거할 수 있으면 그 인생은 더 이상 시지푸스의 고된 삶이 아닐 것이다.

첫째, 자신의 인생에서 노고를 제거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부유한 그의 인생은 딱히 어떤 보람으로 채워져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끝없는 휴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비행기 일등석에 누워 승무원의 보살핌을 받으며 여행하는 승객과도 같다. 딱히 보람찰 것도, 불편할 것도 없는 그는, 이제 번식을 통해 그 휴식과도 같은 인생을 나름대로 연장하고 싶다. 물론 태어나는 자식이 마약을 하거나 기내에서 난동을 부려 부모의 속을 썩일 수도 있다. 자신의 분신으로 여겼던 자식으로부터 외면받아, 권태로운 노년을 보낼 수도 있다. 그러나 뼈를 부수는 덧없는 노고로 점철된 시지푸스의 인생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권태롭지만 통증은 없는 이들의 클럽’에서 떠날 생각이 없다.

둘째, 비록 인생이 노고로 점철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보람을 찾는 인생이 있을 수 있다. 비록 쉼 없이 노역에 시달린다고 해도 결국 보람 있는 결과를 얻는다면, 그 노역의 괴로움을 견딜 수 있다. 밀어 올린 바위가 다시 굴러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꾹 참고 바위를 산정까지 밀어 올릴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 보람에 대한 기대로 인해서, 한 때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참고 일하여 보람을 찾는 이들의 클럽’에 가입했다. 이들에게는 노역을 통해, 자신은 중산층으로 진입하고, 나라는 선진국이 되고, 자식은 한층 더 나은 삶을 살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 기대를 가지고 무거운 바위를 경제발전이라는 가파른 산 위로 밀어 올렸다.

셋째, 비록 힘들고 덧없는 인생이지만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는 위안으로 인해 살아가는 인생이 있을 수 있다. 보람 없는 노역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언젠가 끝난다는 약속만 있다면, 참을 만한 것이다. 비록 힘들고 덧없는 인생이지만, 그 생이 당대에 그친다면 적어도 그 인생은 영원한 노역의 쳇바퀴에 갇혀 있는 시지푸스는 아니다. 경제발전의 산정에서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보며, 민주주의의 산정에서 흑사병에 걸린 검은 뱀처럼 퇴행하는 엘리트들을 보며, 사람들은 ‘참고 일하여 보람을 찾는 이들의 클럽’에서 탈퇴하기 시작했다. 이 사회가 탈출할 길 없는 덫으로 느껴지자 사람들은 ‘태어났지만 번식을 거부한 이들의 클럽’에 가입하기 시작했다.

하데스는 ‘태어났지만 번식을 거부한 이들의 클럽’을 참을 수 없다. 그 클럽 멤버들은 하데스가 가진 가장 가혹한 무기인 시지푸스의 형벌을 무력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얼마 전 정부는 저출산 문제 극복대책으로 전국 가임기 여성의 수를 표시한 분홍빛 출산지도를 온라인에 배포했다. 이제 이 사회가 무의미한 노역장이 아니라는 것을 정부는 증명해야 한다. 스스로 하데스를 자처하지 않는다면.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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