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자 인생]③ '어린이집→영어유치원' 하루 두탕 뛰는 괴로운 5살

세종=이현승 기자 2017. 1. 3.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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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분당에 사는 손지훈(37)씨는 내년부터 외벌이를 감수하고, 아내에게 아들 준우(5) 군 육아에 전념해달라고 부탁했다. 두 달 전부터 아이가 자주 멍하게 앉아있는가 하면 잠을 못자고 종종 머리를 쥐어뜯어 상담치료를 받으러 갔더니 "학업 스트레스가 심한 것 같다"는 진단이 나왔다.

지난 3월 경기도 화성시의 한 사립유치원에서 유치원생들이 코딩 수업을 받고 있다. 태블릿 PC로 진행되는 수업이 신기한지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김지호 기자

준우는 올해 초부터 오전에 어린이집을 갔다가 오후에 영어유치원 방과후 교실에 다녔다. 영어 교육은 5살부터 시작이고, 3년차인 7살에 꽃이 핀다는 이야기를 비슷한 나이 또래 자녀를 둔 회사 동료에게 듣고 아내와 고민을 하다 내린 결정이었다. 하루종일 영어유치원을 보내기에는 비용이 부담스러웠고, 일반유치원만 보내자니 다른 아이들보다 영어가 뒤쳐질까 걱정이 됐다.

아이는 처음 몇 달은 잘 적응하는 듯 했지만 최근 들어 영어유치원에 가기 싫다며 우는 날이 많아졌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도 문제가 없고 영어도 곧잘 한다고 했다. 하지만 하루에 두번씩 전혀 다른 환경에서 생활하는 것 자체가 버거운 듯 했다.

요즘 부모들에게 5살은 한창 투정을 부리는 '미운 시기'인 동시에 영어 교육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할 '배움의 최적기'다. 상당수 부모들은 5살부터 영어를 가르쳐야 3년차인 7살부터는 듣기 말하기에 능숙해지고 초등학교 입학해서도 영어를 잊지 않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한달 교육비가 100만원이 넘는 영어유치원에 보내기 위해 부모들이 줄을 선다.

국내 영어유치원은 2013년 311개에서 2015년 339개로 늘었다. 서울에 가장 많은 91개(26.8%)이 있고 다음으로 부산(49개, 14.5%), 경남(45개, 13.3%), 경기(37개, 10.9%) 순으로 나타났다. 영어유치원에서 하루 4시간 이상 수업을 듣는 유아는 2013년 1만5487명에서 2015년 2만309명으로 31.1%(4822명) 증가했다.

이런 뜨거운 교육열은 어린 자녀의 스트레스 원인이 될 뿐 아니라 집의 가계부에도 적잖은 부담이 되고 있다. 재력이 충분한 고소득층 뿐 아니라 중산층도 사교육을 위해 빚을 내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이른바 에듀푸어라고 불리는 이들이다.

문제는 생활비도 빠듯해 교육비를 댈 여력이 없는 저소득층과의 교육 격차가 계속 벌어진다는 점이다. 부모의 경제적 뒷받침이 성공의 필수 요건이 되는 이른바 '개천 용이 실종된 사회'에서 젊은 세대들이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악순환은 반복되고 있다.

◆ 초등학교 적응 못할까봐…'일유'서 예행연습 하는 7살 "5살부터 영유(영어유치원)를 보냈고 이제 7살 되는 여아 엄마입니다. 국공립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1년 간 일유(일반유치원)로 돌릴까 하는데 어떨까요. 아이가 영어만 하다가 적응을 못할까봐서요."

이달 초, 젊은 주부들이 많이 모이는 한 인터넷 까페에 이런 고민 글이 올라왔다. 댓글은 10여개 남짓 달렸는데 의견이 다양하게 갈렸다. 한 학부모는 "일반유치원에 보내서 적응할 시간을 줄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고, 다른 학부모는 "아이가 영어를 잊어버릴 수 있으니 영어유치원을 계속 보내고 차라리 집에서 엄마가 초등학교 교육과정에 대비해주는 게 좋다"는 댓글을 달았다.

영어는 변별력이 없다며 제2외국어를 배우는 초등학생이 늘고 있다. / 조선일보DB

부모들이 고민하는 이유는 영어유치원의 독특한 교육 과정 때문이다. 영어유치원은 한달에 100만원 가까운 돈이 들어 일반유치원에 비해 3~4배 수준이지만, 모든 과정이 영어 교육 위주로 짜여져 있고 원어민에게 영어를 배울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영어에 집중한 나머지 한글로 수업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아이가 적응을 못할 수 있다고 부모들은 우려한다. 이 때문에 6개월에서 1년 정도 일반유치원에 보내 초등학교 적응기를 갖도록 하는 부모들이 늘고 있다.

한 반의 정원이 영어유치원은 10명 안팎으로 적다는 점도 일반유치원과의 차이다. 일반유치원은 한 반에 많게는 20명 이상 수업을 같이 듣는다. 부모들은 영어유치원에서 선생님의 집중 관리를 받으며 지내던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순간 같은 반 친구들이 많아지고 선생님의 관심은 덜 받게 돼 혼란스러워 할 수 있다고 걱정한다.

◆ 한쪽선 제2외국어에 예체능도 과외…일부는 학원 1개도 빠듯 서울 잠실에 사는 대기업 13년차 직원 윤대식(44)씨는 초등학교 4학년인 딸을 작년부터 중국어 학원에 보냈다. 유치원 때부터 영어를 가르쳤고 미국 단기 연수도 몇 차례 다녀와 영어 실력은 어느정도 갖췄지만 이것 만으로는 변별력이 없다고 생각해서다.

딸은 영어, 수학, 과학, 중국어, 플루트(악기)까지 학원을 일주일에 다섯 개 다니지만 불평불만을 하지 않는다. 같은 반 친구들도 다 그렇게 생활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학원을 안 다니면 친구들을 못 만난다며 서운해한다.

지난 6월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자녀가 있는 직장인 1202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했더니 44.6%가 “스스로 에듀푸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자녀 1인당 월평균 교육비는 미취학 자녀가 34만8000원, 초등학생은 41만1000원, 중·고등학생은 55만1000원으로 나타났다.

조사 대상의 절반 이상(57.3%)은 자녀가 미취학 아동일 때부터 학원이나 학습지 등의 사교육을 시킨다고 답했다. 사교육을 처음 시작한 나이는 ‘5살부터’(21.1%)가 가장 많았고, ‘7살부터’(15.6%)가 다음으로 많았다. 10.5%는 ‘2살부터’라고 답했다.

초등학생 자녀가 있는 직장인 중에는 95.5%가 사교육을 시키고 있다고 답했다. 과목은 영어(69.3%)가 가장 많고, 수학도 52.6%로 많았다. 다음으로는 국어·논술(44.3%), 체육(34.2%), 음악(30.9%) 순이었다.

서울 종로의 한 외국어학원에서 대학생, 취업준비생들이 토익 특강 수업을 듣고 있다. /조선일보 DB

사교육에 쏟는 투자 수준은 소득별로 차이가 컸다. 통계청에 따르면 월 소득 600만원 이상 가구의 가계지출에서 교육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2007년 12.4%에서 작년 13.4%로 올라갔다. 같은 기간 소득 600만원 이하 가구에서는 전부 교육비 지출 비율이 축소됐다. 소득 100만원 미만 가구는 5.4%에서 2.8%로 반토막이 났다.

사교육 참여율은 소득 100만원 미만 가구는 32.1%, 100만~200만원 가구는 43.1%였지만, 소득 700만원 이상 가구는 82.8%에 달했다.

◆ 대학 보내도 사교육 안 끝난다…취업준비학원 성행 자녀가 대학에 들어가도 사교육은 끝나지 않는다. 취업이 점점 더 어려워지면서 토익(TOEIC)이나 전산, 금융 관련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은 물론 자기소개서 쓰는 방법이나 면접 때 말하기 등을 컨설팅 해주는 업체를 찾는 학생들이 많아지고 있다.

최근 취업포털 사람인이 자사 회원인 취업준비생 522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28.4%가 취업 사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지금까지 받은 취업 사교육의 종류는 평균 3개로 월 평균 28만원 정도를 지출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교육 내용은 토익 등 어학교육(53.4%)이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자격증 취득 교육(48.6%), 희망직무 관련 전문교육(28.4%), 컴퓨터 활용 교육(27.7%), 취업컨설팅(18.9%), 전공교육(17.6%), 오픽 등 영어 말하기 교육(14.2%), 이미지 메이킹(10.1%), 인적성·필기시험 대비교육(8.8%) 등이었다.

정부 방침에 따라 공기업와 민간기업이 스펙 초월 채용을 늘리겠다고 밝혔지만 여전히 구직시장에서 영어 점수나 인턴 경험 등 자격요건을 갖추지 않으면 서류 합격 조차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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