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is Story >"대학때 '주사파' 앞장섰지만.. 北에 민주시민 100만 양성"

김성훈 기자 2017. 1. 11.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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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백 국민통일방송 대표가 지난 3일 서울 마포구 망원동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라디오 녹음을 준비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곽성호 기자 tray92@

이광백 국민통일방송 대표

“북한 주민들이 인간다운 세상에서 자유롭고 풍요롭게 살도록 하려면 북한 인권 개선과 민주화가 필수적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방송을 통해 북한에 외부 정보를 유입해 변화를 촉진하는 게 최선입니다. 이 문제에는 여야, 보수·진보 구분 없이 힘을 합쳤으면 좋겠습니다.”

이광백(47) 국민통일방송 대표는 “북한 성인 약 1000만 명 가운데 10%가 주 1회 이상 우리 방송을 듣게 하는 게 목표”라며 “방송을 통해 인권이 무엇인지, 진정한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지 알려 북한에 ‘시민’ 100만 명을 양성한다면 북한을 바꿔낼 수 있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혁명조직(RO) 간부 출신으로 ‘주사파’의 한계를 깨닫고 방향을 전환, 현재는 민간 대북방송사를 운영 중인 이 대표를 지난 3일 서울 마포구 망원동 국민통일방송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이 대표는 1989년 원광대 법대에 입학하자마자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등록금인상 반대 투쟁으로 ‘운동권’ 생활을 시작한 그는 처음엔 ‘석탑계열’ 소속이었다. 석탑계열은 북한 주체사상에서 김일성을 수령으로 숭배하는 부분을 배척하고 ‘자주사상’으로 변형시킨 정파로, 이 조직이 만든 계간지를 발행하는 출판사 이름이 ‘석탑’이었다. 이후 민혁당계가 석탑계열을 흡수하면서 이 대표도 민혁당 소속이 됐다.

1992년 창설된 민혁당은 수도권위원회·전북위원회·영남위원회 등 3개 지역 위원회를 두고, 산하 시당 조직을 구축했다. 이 대표는 1990년대 중반까지 전북위원회 교육선전국장을 맡았다.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은 당시 수도권위원장이었다. 민혁당은 당원이 100명 정도였고, 그 밑에 400여 명의 ‘준당원’ 조직이 있었다. 준당원 조직이 바로 RO다.

당시 전국의 민혁당 RO는 18개 정도였는데, 이석기 전 의원이 관리한 4개만 ‘통합 RO’로 합쳐졌고, 나머지는 1990년대 중반에 거의 해산됐다는 게 이 대표의 설명이다. “이석기 RO는 준당원 외에 외곽조직원까지 전부 합쳐도 500명을 넘지 않습니다. 김재연 전 통진당 의원 같은 경우는 당시 외곽조직원 정도였을 겁니다.” 그러나 이 대표는 민혁당 활동 당시 이 전 의원을 알지는 못했다. “지역조직을 넘으면 누가 민혁당 당원인지, RO 조직원인지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점조직으로 운영됐습니다. 민혁당 총책임자가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준비하는 미래 대표) 씨라는 것도 민혁당이 해산되고 나중에야 알았으니까요.”

골수 운동권답게 이 대표도 구속된 전력이 있다. 1991년 원광대 법대 학생회장이던 그는 민혁당 모태 조직인 ‘반제청년동맹’ 기관지 ‘주체기치’의 내용을 발췌해 법대 학생회 통일 자료집에 싣고 학생들에게 배포했다. 무상의료, 무상교육 등 북한 사회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내용이었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붙잡혀 그해 12월 구속됐고,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1992년 3월 풀려났다. 징역 2년 이상의 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군 복무를 하지 않던 시절이라 이 대표는 계속 학교에 남아 학생운동을 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점점 주사파 운동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결국 1997년 5월 대학을 중퇴하고 시민운동에 뛰어들었다. 이 대표는 ‘새길청년회’를 거쳐 ‘시민행동21’이란 단체의 지방자치센터 소장을 맡아 전북 지역에서 예산감시 운동을 했다. 그러던 중 1997년 국내에선 민혁당이 해체됐고, 북한에서는 대량 아사 사태가 발생했다. 시민단체들이 북한동포돕기 운동에 나섰고, ‘전국연합’이라는 단체에서 7억 원 정도를 북한에 보내기도 했다. 또 주체사상을 집대성한 황장엽 씨가 같은 해 망명했다. 이후 5년 동안 월 1회씩 황 씨를 만나 공부했다. 황 씨 사망 전 마지막 5년 동안은 주 1회씩 모였다.

“북한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굶어 죽고, 정치범 수용소에 20만 명이 갇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가만히 앉아서 예산 감시나 하고 있을 때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1세기 진보운동의 방향이 불분명한데, 시류에 편승한 시민운동이나 환경운동 말고 진보의 정신에 입각해 고통받는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의제가 북한 민주화운동이나 북한 인권운동이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죠. 저도 2002년 지방선거 이후 시민운동을 접고 서울로 올라와 북한 인권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초기 북한 인권운동은 민혁당계와 ‘반미청년회’ 등 두 그룹이 주도했다. 이들은 1999년에 이미 북한민주화네트워크로 통합돼 활동하고 있었다. 이 두 조직 출신 외에 개인적으로 북한 인권 개선의 필요성에 공감해 합류한 사람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하태경 바른정당 의원, 한기홍 현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다. 그런데 노무현정부 출범 이후 유화적 대북정책 속에 북한 민주화운동이 한국 정부의 적극적 지원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갈등관계에 놓이는 상황이 이어졌다. 북한 인권에 도움이 될 정부 정책을 끌어낼 활동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느낀 사람들이 2004년 ‘자유주의연대’를 만들었다. “북한 인권운동을 함께하던 최홍재 씨가 그쪽으로 넘어가 신지호 씨 등과 함께 자유주의연대를 만들었습니다. 운동권 출신인데 우파 같은 주장을 하니까 언론에서 ‘뉴라이트’란 이름을 붙여줬고요. 나중에 신지호 씨는 18대 국회의원이 됐고, 최홍재 씨는 국회 입성에는 실패했지만 청와대 행정관, 국민대통합위원회 기획단장 등을 지냈죠.”

이들과 달리 이 대표는 북한 인권운동 진영에 남았다. 특히 방송을 통한 북한 변화 유도 전략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민혁당이 주축이 된 초기 단계의 북한 민주화운동은 주요 활동무대가 중국이었다. 중국에서 탈북자를 모아 의식화·조직화해 다시 북한으로 들여보내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런 1980년대 지하운동 방식은 북한 민주화 견인에 효과가 없었다. 이 대표 등은 ‘공중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미국 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의 지원을 받아 2005년 12월 10일, 세계인권의 날을 기점으로 전파를 북한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당시 민간 대북방송사는 국민통일방송의 모태가 된 ‘자유조선방송’, 탈북자들이 만든 ‘자유북한방송’, 프로그램 송출 대행사인 ‘열린북한방송’ 등 3개였다. 하태경 의원이 열린북한방송 대표 출신이다. 2007년 자유조선방송 대표를 맡은 이 대표는 2013년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청취율 조사를 했다. 북한에서 자유조선방송을 들어봤다는 사람은 1∼2%에 불과했다. 이 대표는 방송사를 통합해 방송 시간도 늘리고 콘텐츠도 강화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2014년 11월 자유조선방송과 열린북한방송, 신문 사업을 하던 데일리 NK까지 합쳐져 국민통일방송이 탄생했다. 자유북한방송은 지금도 별도로 활동한다.

국민통일방송은 주 2회 정기적으로 북한에서 벌어지는 일 가운데 국제사회나 한국에서 관심을 갖는 사안을 브리핑한다. 북한 주민들의 인권 교육에 도움이 될 콘텐츠도 만들어 송출하고, 이슈가 발생하면 그때그때 빠르게 방송으로 제작한다. 방송시간은 오후 9시부터 3시간, 오전 3시부터 2시간 등 하루 5시간. 저녁 시간대에는 타지키스탄의 송신소를 임대해 송출하는데, 연간 3억 원 정도가 든다. 새벽 방송은 연간 약 4000만 원을 주고 춘천MBC를 통해 송출한다. 30여 명의 인력이 라디오 방송과 인터넷 뉴스, 인터넷 방송용 동영상 등을 만들고 있다. 연간 총예산은 12억∼13억 원 정도다. 전 세계 인권과 민주주의를 지원하는 미국 단체 ‘민주주의진흥기금(NED)’에서 60% 정도를 지원받고, 월 1만 원 이상 후원자 500명이 보내주는 후원금이 총 1억 원 정도로 예산의 10% 정도를 차지한다. 나머지 30% 이상은 정부 프로젝트에 공모해 지원받는 사업비로 충당한다.

이 대표는 방송을 통한 정보 제공 운동이 북한 변화를 견인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라고 본다. “북한 변화를 위한 외교적 압박과 제재는 임계점에 달했습니다. 북한 내 시장경제 확산은 배급제가 무너져 어느 정도 달성됐습니다. 마지막 의식 전환 부분을 외부 정보 유입을 통해 이뤄내야 합니다. 그런데 북한의 인터넷 환경 수준을 고려하면, 실시간 정보 전달을 위해서는 방송이 최적의 매체입니다. 지금처럼 외국에서 약한 전파를 사용해 방송하는 게 아니라, 국내에서 강한 전파를 이용해 송출할 경우 효과는 더욱 커질 겁니다. 정부에서 AM 주파수 1개만 민간 대북방송사에 배정해줘도 10% 이상의 청취율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러나 최근 국내 상황은 그의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은 정보 제공 운동에까지 악영향을 끼쳤다. “미국에서 제재·압박 대신 북한에 외부 정보를 유입시켜 내부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우리 정부에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요구한 바 있습니다. 이에 따라 박근혜 대통령의 지난해 국군의 날 메시지가 나왔고, 이를 계기로 국방부 등에서 관련 세미나 등을 진행하던 시점에 국정농단 사건이 밝혀지면서 다 중단됐죠. 저희도 올해 5∼6월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가서 통일 강의를 할 계획이었는데 최순실 때문에 물 건너갔어요.”

또 지난해 9월 4일 북한인권법 시행에 따라 북한인권재단이 설립되면 북한 주민의 언론 및 표현의 자유를 증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국정농단 사건으로 관심이 멀어진 데다 더불어민주당이 이사를 추천하지 않아 재단 출범도 하지 못했다. 앞서 북한 주민 대상 통일방송 사업자에게 주파수를 지정해주는 등의 내용으로 하태경 의원이 2015년 8월 발의했던 방송법 개정안은 2016년 5월 19대 국회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북한인권법을 만들긴 했지만 여야 모두 북한 민주화 및 인권 개선에 의지가 없는 것 같아요. 여권은 찬성하긴 하지만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사람이 없고, 야당은 북한을 자극할까 봐 불편해하고. 그런데 북한 인권은 국제사회에서 이미 10년 넘게 이어져 온 이슈입니다. 유엔에서도 북한 인권결의안이 채택되잖아요. 인권은 좌우 진영논리를 떠나 모두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입니다. 또 북한의 독재 체제를 가만히 두고는 핵 문제 해결이나 한반도 평화는 없을 겁니다. 물론 북한과 대화는 필요하지만, 대화나 합의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면 안 됩니다. 북한의 변화, 즉 개방과 민주주의 및 인권 신장을 위한 대화여야 합니다.”

이 대표는 역대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한 쓴소리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무작정 지원만 한 진보 정권이나 지원을 끊는 데만 몰두한 보수 정권 모두 문제라는 지적이다. “그동안 정부는 경직된 정책만 써왔습니다. 대북 정책은 양쪽을 병행할 수 있는 유연성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제재와 압박을 가하고, 때로는 통 크게 대화해야 합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정파와 상관없이 유연하게 전략을 써야 합니다. 아마추어적인 경직된 전술로는 우리가 주도권을 쥘 수 없어요. 유연한 전략이 오히려 김정은 정권을 다루는 데도 효과적일 걸로 봅니다. 김정은 정권을 잡고 뒤흔들어 원하는 방향으로 견인해가는 정치적 리더십이 국내에서 나오기를 바랍니다.”

김성훈 기자 tarant@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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