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도시 대구는 어떻게 반공과 지역주의의 첨병이 되었나

노현웅 2017. 1. 11.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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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2017 광장의 노래]
2부 우리안의 박정희들-대구 이데올로기의 탄생

[한겨레]

일러스트 김대중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리던 변혁의 도시 대구는 언제부터 반공과 지역주의의 첨병이 되었는가. 이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 역시 박정희라는 이름에 가닿는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반공주의에 기반한 조작 간첩 사건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대구에서 진보의 싹을 잘라내려 애썼다. 남로당 출신이라는 콤플렉스에 맞선 자기부정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잔인하고 집요했다. 지역 연고주의에 기반한 영남 패권주의도 적극 활용했다. 당근과 채찍을 통해 대구의 풍토를 바꿔낸 박정희는 결국 그를 추종하는 정치세력에 ‘지역주의’라는 유산을 남겼다. 반공과 지역주의를 두 축으로 하는 ‘대구 이데올로기’가 탄생한 순간이다. 광장의 촛불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정치적 사망선고를 내린 지금, 대구는 박정희를 넘어설 수 있을까. 우린 망국적인 지역주의, 시대착오적인 반공주의와 이별할 수 있을까.

# 대구가 ‘좌파도시’였던 이유

대구는 ‘항쟁의 도시’였다. 1907년 차관 1300만원을 강제로 제공해 대한제국을 경제 속국으로 삼으려던 일제에 맞선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의 중앙로에서 시작됐다. 1946년 미군정의 수탈에 맞선 10월 항쟁도 대구에서 비롯했다. 9월 노동자 파업에 이은 10월1일 시위에 대구 시민 1만여명이 모이자 경찰은 시위대를 상대로 총구를 겨눴다. 경찰에 의해 목숨을 잃은 희생자가 늘어가면서, 이들은 ‘산사람’이 되어 좌익 활동에 나섰다. 대구 팔공산의 ‘야산대’는 한국전쟁 전 좌익 빨치산 활동의 시초 가운데 하나였다. 10월 항쟁은 한국전쟁을 전후한 좌·우익 대립과 보도연맹 민간인 학살로 연결된다. ‘골로 간다’는 속어는 ‘산골에 들어간 자는 죽임을 당한다’는 처절한 이 지역 항쟁의 역사에서 연유한다.

일제강점기부터 대구에 좌파들이 많았던 이유는 크게 세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먼저 협소한 농경지 탓에 대지주 계층이 형성되지 않아 일찌감치 자영농 등 자립적 경제주체들이 형성됐다는 점이다. 일제는 대지주·양반 계층을 식민지배의 하위 파트너로 삼았는데, 대구 지역은 이런 흐름에서 한발 비켜 있었던 셈이다. 윤해동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는 “안동 김씨 등 서울로 올라가서 정치의 주류가 된 양반과 안동에 남아 있던 안동 김씨는 많이 다르다. 그들은 이미 중앙 정치 무대에서 제외돼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일제에 비타협적인 특성을 가졌다. 초기 사회주의자 가운데 이런 양반 출신이 굉장히 많다”고 말했다.

둘째, 일제 때 신교육기관이 경성, 평양, 대구에 생기면서 남쪽 지역에서 신문물의 흡수와 젊은 지식인 계층 성장이 대구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학생운동의 맥이 대구에서 퍼져서, 좌파 형성으로 이어진 셈이다.

세번째 이유는 대구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점령지가 아니어서 대대적 숙청을 피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10월 항쟁 직후 대구 민중운동사를 연구한 김상숙 박사는 “대구는 인민군 점령지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한국전쟁 뒤 부역자 학살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 덕에 진보적 역량과 기풍이 보존될 수 있었고 4·19 혁명 등의 전후 진보운동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진보성의 뿌리는 제도 정치의 공간에서도 꽃을 피웠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 결과가 대표적이다. 당시 무소속으로 출마한 조봉암과의 양자 대결에서 자유당 이승만은 전국 70% 지지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현직 대통령과 맞붙은 무소속 진보 후보 조봉암은 전국 30% 득표에 머물렀다. 그 조봉암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지역이 바로 대구였다. 대구는 강화도 출신의 무소속 진보 인사 조봉암 후보에게 무려 72.3%의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선거 뒤로도 대구는 이승만 독재 정권에 번번이 맞섰다. 1960년 2월28일 자유당 부정선거에 맞선 대구 시내 고등학생들의 2·28 의거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4·19 직후, 대구는 교원노조 설립과 혁신정당(경북사회당) 건립 등 본격적인 진보운동의 근거지가 됐다.

국채보상운동 등 반일운동 본거지
신교육기관 생기며 지식인층 성장
한국전쟁 숙청 피해 진보역량 보존
조봉암 압도적 지지에 2·28 의거까지

‘레드 콤플렉스’ 박정희 등장으로 궤멸
박, 미국 지지 얻으려 정치적 고향에서
좌익세력 대대적 탄압 ‘반공투사’ 돌변
“김종필 2만8천명 예비검속 계획도”

경주유족회 김하종 회장의 비극
1949년 민보단이 친인척 30여명 학살
“세상천지에 2살짜리 빨갱이라니…”
4·19 법정 세웠지만 쿠데타뒤 물거품
양민학살 피해자들 되레 검속대상 돼

# 스탈린의 그루지야, 박정희의 대구

대구의 역사는 박정희 등장 이후 극적 반전을 거친다. 박정희는 1961년 5·16 쿠데타 뒤 대구·경북 지역 ‘좌익 활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선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작성한 ‘5·16 쿠데타 직후의 인권침해사건 진실규명 결정서’를 보면, 인권탄압의 대상이 된 진보정당(중앙당·지역당 포괄) 13개 가운데 경북사회당 등 5개가 영남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던 정당이었다. 민주민족청년동맹 계열 사건은 3건 모두 경북·경남 등 영남 지역이 기반이었고, 보도연맹 피학살자 유족회 사건으로 탄압당한 8건도 모두 영남 지역 중심이었다. 스탈린 ‘공포정치’의 시초가 고향이었던 그루지야(현 조지아)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서 시작된 것처럼 박정희 역시 자신의 고향에서부터 좌익 숙청을 벌인 셈이다. 소수민족 출신으로 민족문제위원장으로 활동했던 스탈린과 남로당 출신으로 동지들을 밀고해 가까스로 살아남은 박정희는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주류가 되는 방식에서도 닮았다.

# ‘레드 콤플렉스’에서 시작된 공포정치

박정희는 미국의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해 과거를 지우고 ‘반공 투사’로 돌변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법제사법위원장을 지낸 이석제는 회고록 <각하, 우리 혁명합시다>에서 “5·16 직후 육군본부 상황실에서 미국이 박정희와 김종필의 배경을 뒷조사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고 (…) 미국의 사상 공세를 일거에 역전시키고 군사혁명의 성공을 결정하는 비상한 조치가 필요하여 보도연맹원 등 좌익 사상범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반공에 대한 의지를 미국에 보여주자”고 결심해, “전국의 군헌병대, 경찰에 비상을 걸어 보도연맹 관련자와 혁신정당 관련자, 좌파 지식인, 사회단체 지도자, 노조 지도자 등 사회불만세력과 좌익활동 경력자들을 대대적으로 색출, 4000여명을 체포·수감했다”고 적었다.

심지어 5·16 쿠데타의 주도세력 가운데 하나였던 유원식은 <5·16 비록, 혁명은 어디로 갔나>에서 “이승만 정권기에 작성된 요시찰인 명부를 근거로 김종필이 2만8000명을 예비검속해 거제도에서 살해할 계획을 수립하여 박정희에게 보고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석상에서 한웅진 등과 함께 항의한 결과 대량학살 계획을 저지했다”고 회고했다. 한국판 ‘킬링 필드’가 일어날 뻔했던 아찔한 순간이다.

# 5·16으로 뒤바뀐 가해자와 피해자

보도연맹 피해자 가족 모임인 ‘경주유족회’ 김하종(84) 회장은 5·16 쿠데타를 기점으로 극과 극을 오가는 경험을 했다.

그는 경북 경주 내남면 홈실에서 자랐다. 경주 남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에 홈을 파 물길을 댔다고 붙여진 이름이었다. 홈실에서 4㎞ 떨어진 바탕골에는 김씨의 친인척 4가구 27명이 살았다. 남산에 안긴 아늑한 고장이었다. 1949년 8월1~2일 이곳 바탕골에 살던 주민 80여명 가운데 30명이 이틀 밤 사이 ‘적색분자’라는 이유로 총살됐다. 그의 친인척 22명이 희생됐다. 당시 2살이었던 순자·순영이, 3살이던 이암이, 5살 하진·순헌이…. “세상 천지에 2살짜리 뻘갱이라니….” 지난 6일 <한겨레>와 만난 김씨는 68년 전 일을 회상하면서도 목소리를 떨었다. 경북 전역에서 ‘산사람’들이 좌익운동을 하던 시절이었다.

보도연맹 피해자들에게 5.16 쿠데타는 세상이 뒤집히는 계기였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경주유족회' 회장이 6일 오후 경북 경주시 성동동 사무실에서 2016년에 있었던 위령탑 제막식 사진을 보며 설명을 하고 있다. 경주/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김씨의 증언과 진실과화해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김씨 부락에 총을 겨눈 이들은 이협우 단장을 위시한 내남면 민보단원이었다. 이협우는 내남면에서 우익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단장, 민보단장, 대한청년단장을 차례로 맡았다. 이들 우익단체는 이승만 정권 경찰의 하부조직이었다. “그 다음날 시신을 수습한다며 바탕골에 들어간 아버지도 민보단원들한테 얻어맞았어. 옆집 아재가 피투성이가 된 아버지를 지게로 짊어지고 왔던 모습이 아직도 생각나. 아버지는 방에 숨어 계시다 11일 만에 돌아가셨어.” 양민을 학살하고 그들의 가산을 빼앗은 이씨는 이승만 정권 시절(1950~1960년) 내리 국회의원에 당선돼 3선 의원을 지냈다. 당시 국민학교 6학년이었던 김씨도 이협우한테 살해 위협을 당했다. 자기 집 암소를 끌고 가려던 이협우를 어린 김씨가 막아서자 뒤춤에 감춘 권총을 내보였다. “야는 아가 바봅니더.” 홈실 이장의 한마디가 없었다면 그 자리에서 총을 맞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이름을 ‘김태우’로 고치고 숨죽이며 겨우 살아남았다.

11년 만에 세상이 뒤집혔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신음하던 국민들은 4·19 혁명으로 민주주의를 한걸음 진전시켰다. 김씨는 가족의 한을 풀기 위해 경주유족회를 결성했다. 경주 지역 곳곳에 엎드려 살아남았던 유가족들이 힘을 보탰다. 경주 지역 학살 피해자 75명은 당시 국회의원 이협우를 고소했다. 검찰은 살인·방화 등 혐의로 이씨를 기소했고 사형을 구형했다. 1심 재판부도 양민 76명을 학살한 혐의를 인정해 1961년 3월 사형을 선고했다. 비명에 간 가족의 한이 조금은 풀렸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듬해 5월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뒤 세상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경주·밀양·대구 등 각지의 양민학살 피해자들은 군사정부의 예비검속 대상이 됐다. 김씨도 ‘반국가행위자’가 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됐다. 혁명재판소는 그에게 징역 7년형을 선고했다. 김씨는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으면서도 내가 무슨 죄를 진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 심지어 순경들도 너는 무슨 죄로 여기까지 왔느냐고 했어. 2년 뒤 사면돼 나왔지만 요시찰 인물이라는 딱지 탓에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어”라고 말했다. 다시 ‘빨갱이’ 사냥을 하는 시절로 돌아간 탓이었는지 이협우의 죄악을 지목하던 주민들의 증언도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협우는 1963년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받고 풀려났다. 우리 나이로 84살, 김씨가 아직까지 경주유족회 활동을 하고 있는 이유다.

# 영남 패권주의라는 당근

박정희는 대대적인 빨갱이 탄압으로 대구의 사상 토양을 정리한 뒤 이 지역 인사들을 고위직에 대거 등용함으로써 영남 패권주의의 싹을 심는다. 엄민영, 김성곤, 백남억, 이효상, 박준규 등 공화당의 주역들은 모두 대구고보(경북고의 전신) 출신이었다. 박정희의 통치기간이었던 3~4공화국 당시 유정회·전국구 국회의원의 출신 지역별 분포를 보면 경상도 출신이 100명(26.6%)으로 서울 93명보다도 많고 전라 53명, 평안 33명 등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고급 관료 사회에 ‘티케이(TK) 인맥’이 이식되면서 특정 지역의 지배계층화가 이뤄진 것이다.

지역감정 조장도 이때부터 시작된다. 1963년 9월19일 대구 수성천변 유세가 대표적이다. 박정희 대통령 쪽 찬조연사였던 이효상(훗날 국회의장 역임)은 “이 고장은 신라 천년의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고장이건만 그 긍지를 잇는 이 고장의 임금은 여태껏 한 사람도 없었다. 박정희 후보는 신라 임금의 자랑스러운 후손이며 이제 그를 대통령으로 뽑아 이 고장 사람으로 천년만년 임금님을 모시자”고 연설했다. 연고주의가 강한 영남 지역에서 ‘신라 대통령론’은 주효했다. 박정희는 윤보선에 비해 영남에서만 66만표 차이로 압도적 우세(전국 15만표 차이)를 보이며 대통령에 당선된다. 진보인사 조봉암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던 대구 분위기가 불과 7년 만에 극적으로 변한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 궁금한 것은 이때 형성된 지역감정과 패권의식이 어떻게 수십년간 지속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티케이라고 욕은 많이 먹지만 실제로 대구 경제가 풍족한 것도 아니다. 2015년 광역시도별 1인당 지역 총소득을 보면, 대구는 꼴찌에서 둘째로 광주보다 한 단계 위에 불과하다. 윤해동 교수는 “현재 대구의 정서는 70년대 이후 크게 바뀌지 않은 일종의 인식의 지체 현상을 보이고 있다. 전라도나 수도권은 이촌향도 등 해체의 과정을 겪으면서 다양화가 이뤄지는데, 대구는 그런 움직임이 없이 그대로 정체돼 있다. 인구 유입도 없고 유출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역의 정서 자체가 정체된 느낌”이라고 말했다.

‘영남패권’ 당근에 반세기 넘게 지역주의 ‘철옹성’

1963년 수성천변 ‘신라 대통령론’ 등장
전국 15만표차…영남서만 66만표 앞서
청와대·전국구 의원 TK출신 중용에
국가자원 동원한 경제개발 혜택 집중

인혁당·재건위 간첩조작 사건 기획
‘사법살인’ 혁신세력 잔재마저 지워
‘요시찰 대상’ 가족들도 만남 꺼리니
살아남은 이들도 대구 떠나 ‘뿔뿔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 옥고 정화영씨
“연좌제 알아? 난 평생 가족 눈치”
또다른 피해자 부인 “여전히 세상 무서워”
인혁당 사과 눙치는 박근혜 후보에
대구는 아버지보다 높은 80% 지지

# 인혁당 사형수 8명 중 5명이 대구

대구를 중심으로 남아 있는 혁신세력에 대한 ‘뿌리뽑기’ 작업은 계속된다. 인혁당 사건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대표적이다. 첫번째 인혁당 사건이 담당 검사 3명의 기소 거부로 사실상 실패에 그치자 박정희 정권은 10년 뒤인 1974년 4월 ‘인혁당 재건위’라는 또다른 조작 간첩 사건을 기획한다. 이철·유인태 등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 지휘부로 서도원·도예종 등 과거 인혁당 사건 연루자(인혁당 재건위)가 숨어 있다는 것이었다. 고문과 강압으로 만들어진 사건이었다. 1년 뒤 1975년 4월8일 대법원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기소된 여정남 전 경북대 학생회장 등 8명에게 사형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한다. 그리고 이튿날인 4월9일 ‘판결문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사형이 집행된다.

사형수 8명은 모두 영남에서 출생했다. 여정남·서도원·도예종·송상진·하재완 등 5명은 대구에 살고 있었다. 대구 지역에 한줌 남았던 혁신 계열이 뿌리째 뽑힌 순간이다. 박정희 정권은 ‘사법살인’이라는 국내외 비난이 거세지자 민청학련 등 나머지 관련자들을 형집행정지로 풀어준다.

# 인혁당 재건위 당사자가 대구를 떠난 까닭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정화영(68)씨는 그 사건 이후 대구를 떠난다. 사형당한 여정남의 경북대 법대 후배였던 그는 여정남이 학교를 떠난 뒤 반유신 투쟁에 주력했다. 1974년 3월 경북대에서 ‘반독재 민주 구국선언문’을 살포한 혐의로 인혁당 재건위에 연루됐다. 일주일 동안 잠을 재우지 않고 때리는 모진 고문에도 여정남을 모른다고 버텼다. 흠모했던 선배를 부인함으로써 그는 겨우 살아남았다. 1975년 대법원에서 징역형을 확정받아 대구교도소에 수감됐다. 그가 수감된 날 아침, 여정남의 사형이 집행됐다. 출소 뒤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다시 투옥돼 1981년 출소했다. 그는 어두운 감옥에서 밤마다 마음속으로 박정희를 죽였다고 했다.

그는 존경하던 선배를 부인함으로써 살아남았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 정화영씨가 3일 오후 인천 서구 검암역에서 한겨레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인천/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그의 수감 시절이 기록된 재소자 신분카드에 긴급조치 위반자를 뜻하는 ‘緊’(긴), 요시찰 대상자를 뜻하는 ‘要’(요), 좌익사범을 의미하는 ‘左’(좌) 자가 새겨져 있다. 200쪽이 넘는 기록 안에는 교도소 안에서 그가 벌인 단식과 항의 내용이 ‘동정보고’로 빼곡히 들어차 있다. “폭력행위 공갈 등의 죄명으로 수용중인 1144번 ○○○가 보안과에서 구타당하였다는 선동에 동조하여 이를 적법 처리해 달라고 요구하며 1979년 1월6일 조식부터 불식하고 있기에 보고합니다.”(1979.1.9) “박(정희) 정권은 바뀌어야 하며 그러면 사면령이 있을 것이다. 각 부 장관이나 고관들은 도둑놈 아닌 사람이 없다 등의 유언비어를 전파.”(1976.9.14) 재소자 신분카드에는 그와의 접견이 허가된 가족 5명(형과 형수, 자매 등)의 사진도 함께 기록돼 있었다.

“기자 양반, 연좌제라고 알아? 면회 허가자라고는 하지만, 뻘갱이 가족의 재소자 카드에 떡하니 사진이 들어 있으니 기분이 어떻겠어. 더구나 대구에서 말이야. 나로선 평생 가족들 눈치를 볼 수밖에….”

‘요시찰 대상’이었던 그는 도망치듯 대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여정남 선배는 경북대 학생운동의 중심이었지. 의협심과 의리, 용기가 넘치는 사내다운 선배였어. 박정희의 대를 이은 독재정권에 여정남의 복수를 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지. 그런데 대구에서는 아무도 만날 수가 없었어. 8명이나 사형당한 인혁당 재건위 출신을 누가 만나주겠어. 대구에 남아 있던 혁신 계열은 그때 충격으로 이미 뿔뿔이 흩어졌고, 몇몇 후배들도 얼굴 보기를 꺼렸어. 형제와 가족들도 마찬가지였지. 사복 경찰이 노상 쫓아다니던 시절이었으니….” 그는 떠돌이의 도시, 인천으로 흘러들게 된다.

그에게 대구는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까. “지금 대구에는 박정희 수혜자들이 많아. 이부영씨 경선 때 대구 유세를 갔는데 하나같이 얼굴에 기름 번지르르한 놈들밖에 없어. 박정희의 혜택을 뜯어먹고 산 사람들, 그놈들은 지금도 사돈의 팔촌이라도 자기 가족 중에 고위직 하나씩은 있다고 생각한다고. 그게 자기 신분이라고 착각하고 말이야.”

# 여전히 그곳엔…

박근혜 대통령은 2012년 대통령 선거 과정에 인혁당 재건위 유가족에 대한 사과 의사가 있느냐는 질문에 “같은 대법원에서 상반된 판결(1975년 사형판결과 2007년 재심 무죄판결)도 있었고, 그 조직에 몸담았던 분들의 여러 증언도 있어 이런 것을 다 감안해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사법 살인’에 대해 사과할 뜻이 없음을 명확히 한 것이다. 역사인식에 대한 논란이 빚어지자 그제야 “전부터 제가 당시 피해를 입으신 분들께 참 죄송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그 연장에서 같은 이야기입니다”라며 눙치고 지나쳤을 뿐이다. 그해 대통령 선거에서 대구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80.1%의 압도적 지지를 보냈다. 그의 아버지 박정희가 마지막으로 선거에 나선 1971년(박정희 67.0%, 김대중 32.3%)보다 훨씬 더 높은 지지율이었다.

박근혜가 외면하고 싶었던 인혁당 재건위 피해자의 입장은 어떨까. 1차 인혁당 사건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두차례 옥고를 치른 고 정덕진씨는 재심을 통해 ‘공식적으로’ 명예를 회복했다. 그러나 그의 아내 ㅊ씨는 여전히 세상이 무섭다고 말한다. ㅊ씨는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희는 그냥 아무것도 이야기 안 할랍니다. 저희는 세상이 무섭습니다. 재심으로 무죄도 받고 보상금도 조금 받았는데, 그 뒤로 오히려 손가락질을 더 받고요. 저희는 세상 사람들이 그저 무섭습니다. 그냥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정덕진은 1940년 대구 출생으로 영남대의 전신인 대구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사형수 여정남의 절친한 선배였던 정덕진은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됐고, 1975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다. 1982년 형집행정지로 출소한 그는 고문·수감생활의 후유증으로 투병생활을 이어가다 1998년 숨을 거뒀다. 그의 아내 ㅊ씨는 여전히 대구에 살고 있다.

노현웅 기자 golok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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