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정동칼럼]'기레기'를 위한 변명

박원호 | 서울대 교수·정치학 입력 2017.01.24. 20:49 수정 2017.01.24.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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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지인들 중 기자가 있는 사람들은 너무도 잘 알 것이다. 기자들은 대체로 공손하지 않고, 얌전하던 사람도 기자가 되면 제법 대담해진다.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던 어느 후배는 기자가 된 후 갑자기 나를 ‘선배’ 혹은 ‘박 선배’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늦은 밤에도 느닷없이 전화하기를 꺼리지 않는다. 기자들은 민의(民意)에 의해 선출된 적이 없어도 기자증 하나 목에 걸고 정부부처를 출입하고, 고시에 합격한 적이 없어도 정책을 난도질하며, 그 흔한 학위 하나 없이도 세상 만물에 대해 오지랖이 넓음을 자랑할 수 있다. 언론을 입법·사법·행정에 뒤이은 ‘제4부’라 부르는 것도 아마 자신들이 지어낸 말일지 모른다.

그래서 이들을 미워하는 것은 매우 손쉬운 일이다. 사실이야 어찌 됐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자는 관료보다 거들먹거리고, 교수들보다 잘난 체하며, 검찰 못지않게 조직의 보호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자는 응당 건방과 허세가 있어야 한다. ‘장관님’이라 하지 않고 ‘장관!’이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하며, 대통령이건 민정수석이건 레이저 눈총에 끄덕하지 않아야 한다. 적어도 이들이 건방과 허세 때문에 ‘기자’와 ‘쓰레기’를 조합한 ‘기레기’라는 말로 불리는 것은 아니다. 구글 트렌드에 의하면 인터넷에 ‘기레기’라는 말이 처음 출현한 시점은 정확하게 2010년 10월이다.

흥미롭게도 세계 각국의 다양한 민주주의 지표를 평가하는 프리덤하우스는 한국 언론의 자유를 최상급인 ‘자유’에서 ‘부분적 자유’로 2011년 하향 조정했고, 오늘날까지 우리는 아시아에서 동티모르, 몽고, 인도를 근소한 차이로 앞지르고 있다. 요컨대 ‘기레기’는 기자들에 대한 멸칭이 아니라 언론 자유의 후퇴에 대한 서술이며 한국 민주주의 쇠락에 대한 언술이기도 한 것이다.

기자들이 ‘기레기’가 되는 과정은 칼날 같아야 할 이들의 펜대가 사주와 광고주에 의해 무디어지고, 정부가 어떤 형태로든 언론을 길들이는 데 성공하고, 나아가 미디어 환경이 취재와 보도의 질이 아니라 선정적 제목과 클릭 횟수만으로 평가받는 쪽으로 변화한 것과 궤를 같이했던 셈이다.

물론 이곳에서 기자들에게 면죄부를 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들은 물어야 할 질문을 묻지 않았고, 물었더라도 슬며시 이빨에서 힘을 풀었으며, 발걸음은 현장에서 멀어졌다. 이들은 정부와 사주와 데스크에 공손했고 클릭 횟수와 답글에 연연했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부 이래 일관된 흐름이 있다면 그것은 정부가 언론을 적극적인 통제와 장악의 대상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정부는 공영방송 인사과정에 개입했고 편성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세계일보를 압수수색했고, 동아일보 기자를 고소했으며, 심지어 외신기자인 산케이신문 지국장을 기소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가장 주요하게는, 어떤 질문들에도 전혀 응대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탄핵 국면은 ‘기레기의 복수’가 아닌가 생각한다. 언론과 기자의 역할이 없었다면 정부의 철옹성과도 같던 자폐의 벽 너머를 우리가 조금이라도 넘겨다볼 수 있었을 것인가? 박근혜 정부는 언론을 침묵시킴으로써 역설적으로 민주주의에서 언론의 필요불가결성을 우리에게 가르쳐준 셈이다. 기자들이 실낱같이 파쇄된 의료기록, 혹은 자신들의 자존심을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해 낸 것 또한 ‘기레기의 역설’이라 부를 수밖에 없다.

물론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기다리는 것만큼이나 우리 언론과 기자들이 민주제적 과정에서 역할과 책임을 다하고 신뢰를 회복하기까지는 매우 먼 길이 남아 있을 것이다. 느닷없이 피냄새를 맡은 상어떼처럼 권력에 대한 취재와 보도 경쟁을 벌이는 것에 대한 우려도 있으며, 정치권력의 단순한 억압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벗어나기 힘든 자본과 센세이셔널리즘과 권력화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2017년 오늘의 이 장면에서 나는 그 피냄새를 맡은 상어떼를 잠시 환영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아직도 언론이 권력의 통제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며, 정권교체 여부를 막론하고 권력이 언론을 장악할 강한 유인과 여러 제도적 수단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방송통제에 맞섰던 해직기자들이 복직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며, MBC의 ‘막내 기자’들은 여전히 자괴의 ‘반성문’을 올리고 회사는 ‘경위서’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정보도를 요구하는 파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5년 전 MBC에서 해고된 이용마 기자는 1, 2심에서 승소 판결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복직되지 않은 채, 이제는 암이라는 또 다른 병마와 홀로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계속 ‘기레기’로 남겨둘 것인가, 아니면 연대의 손을 뻗어야 할 것인가. 나는 우리 민주주의의 미래가 여기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박원호 | 서울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