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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매년 유행색 예고하는 팬톤, '색상계의 구글'로.. 패션계, 상징색 놓고 법정 싸움도

김미리 기자 입력 2017.01.25.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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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마음을 움직이고, 세상을 바꾸는 색깔 속으로
色.. 세상을 움직이는 파워
팬톤 올해의 색 '그리너리'.. 디자이너들의 유행색 예측 부담 덜어주기도
영어는 명사, 한국어는 형용사로 색 표현.. 색깔 조합할 수 있는 잠재력 커
300만가지 색 식별하는 인간의 눈.. 최고의 색채 전문가는 바로 본능

소비를 뒤흔드는 '색깔 권력'… '팬톤이 뭐기에'

최근 컬러와 관련해 일반인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름이 있다. 미국 색채 전문 회사 '팬톤(Pantone)'이다. 매년 '올해의 색'을 발표하면서 색 유행을 주도하는 회사다. 올해의 경우 지난 12월 8일 '2017 올해의 색'으로 '그리너리(Greenery·노란 빛이 도는 녹색)'가 발표된 직후부터 지금까지 수천 건의 관련 기사가 쏟아졌고, 화장품·패션 같은 색깔에 민감한 소비재엔 바로 이 색이 적용됐다.

유행 풍향계의 큰 축인 만큼 기업들은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LG생활건강의 메이크업 브랜드 VDL은 지난 2012년 론칭하면서 아예 팬톤과 협업했다. 지난해엔 '팬톤 2016 올해의 색'이었던 옅은 분홍빛의 '로즈쿼츠'와 연한 하늘색의 '세레니티'를 메인 색상으로 10여종의 메이크업 제품을 출시했다. 3일 만에 일부 품목 초도 물량 2개월치가 완판되는 '대박'을 터트렸다. 올해도 팬톤 색상이 정해지면서 바로 '그리너리' 라인을 출시했다. VDL 측은 "팬톤 이름 하나에 인지도 상승은 물론 매출까지 급상승하게 됐다"고 했다.

1962년 미국 뉴저지에서 화장품 색견본 제조 회사로 출발한 팬톤은 스스로 '세계적인 권위의 컬러 당국(the global authority on color)'이라고 규정한다. 소규모 화학회사에서 전 세계 색상의 '표준'을 점유하게 된 건 창업자 로렌스 허버트가 팬톤의 색상 매칭 시스템 'PMS(Pantone matching system)'을 만들면서부터다. 10개의 기본색으로 1만개 이상의 색상 조합을 만들 수 있었다. 숫자·문자 등으로 색상을 표준화했고, 거기에 맞는 이름까지 만들었다.

팬톤이 지금같이 대중적인 힘을 갖게 된 건 2000년부터 '올해의 색'을 발표한 이후다. 이전까지 확보한 1751개의 컬러 팔레트를 중심으로 유행 컬러에 다양한 심리·사회학적 해석을 곁들인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들이 택한 유통 방식이다. 세계적인 권위의 일간지 '뉴욕타임스'를 통해 '올해의 색'을 가장 먼저 발표한다. 팬톤 홈페이지에 올리는 건 그다음 일이다. 노루팬톤색채연구소(NPCI)의 현정오 수석 연구원은 "그전까지는 전문 회사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컬러 트렌드였지만 팬톤이 뉴욕타임스를 전략적인 파트너로 택하면서 대중에게 빠르게 확산했다"며 "세계적인 지배력에 선점 효과까지 누리면서 색상계의 '구글'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디자이너 여미영씨는 "유행 색상을 점쳐야 하는 디자인 담당자에겐 예측을 잘못했다간 손실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리스크가 있다. 팬톤 같은 큰 글로벌 회사가 유행색을 제시해주면 그만큼 설득력을 갖게 되기 때문에 안전장치가 되는 것이다. 팬톤과 기업이 서로 윈윈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팬톤이 실질적으로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색의 놀라운 힘'의 저자인 색채 전문가 장 가브리엘 코스는 "팬톤이 2015년 갈색 계열의 적포도주 색 '마르살라'를 올해의 색으로 추천하자 진열장에는 마르살라 색 옷이 넘쳤지만 정작 거리에선 찾아보기 힘들었다"며 "매니큐어처럼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 결국 판매가 잘되는 색은 검정, 회색, 흰색"이라고 지적했다. '상술'일 수도 있단 얘기다.

문화계에서도 '컬러 전쟁'

색의 힘은 예술계와 패션계에 '소유권 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지난해 영국 작가 스튜어트 셈플(36)은 10년간 연구 끝에 'The world's pinkest PINK(세상에서 가장 핑크 같은 핑크)'라는 고유색을 만들어 출시하면서 단서를 달았다. 현대미술의 거장 애니시 카푸어(63)에겐 공개적으로 사용 금지를 선포한 것이다. 애니시 카푸어가 영국 안료 회사 나노시스템으로부터 '세상에서 가장 검은 검은색'인 '반타블랙'의 독점 사용권을 사들인 데에 대한 반발이었다. 카푸어는 인스타그램에 핑크색을 바른 가운뎃손가락을 올리며 셈플을 조롱하는 듯한 동작을 취하며 논란에 불을 붙였다. 셈플은 핑크뿐만 아니라 '가장 노랑 같은 노랑' '가장 초록 같은 녹색' 등을 선보이며 카푸어와 그를 지지하는 이들에게 사용을 금지했다. 과거 파란색으로만 그렸던 이브 클라인은 자신의 파랑을 '인터내셔널 클라인 블루(IKB)'라 이름 붙이고 특허까지 냈다.

패션계에선 구두 브랜드 크리스티앙 루부탱과 입생로랑이 벌인 '빨강 혈투'가 대표적이다. 빨간색 밑창 컬러로 유명한 루부탱은 2011년 입생로랑이 신발 밑창과 깔창에 빨간색을 넣자 상표권 침해로 소송했다. 법원은 루부탱의 손을 들어줬고, 이 사건은 색이 브랜드의 로고처럼 상징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린 판결이 됐다. 국내에서도 토종 패션 브랜드인 '세정'과 '형지'가 간판색인 보랏빛이 비슷하다며 법정 다툼을 이어오다 2012년 화해한 바 있다.

영어는 명사로, 한글은 형용사로 색 표현

색을 표현하는 단어를 보면 영어는 주로 명사나 사물에서 온 이름이다. 반면 한글엔 명사가 적고 형용사가 많다. 예컨대 'red(빨강)'와 관련된 영어 단어는 'indian red(인디언 붉은색)', 'cardinal(추기경 빨간색)' 등이지만 한글에선 '불그죽죽한' '검붉은' '불그스름한' '핏빛의' 같은 표현으로 말한다. NPCI 현정오 수석 연구원은 "한국의 색 표현은 '대화를 위한 색'"이라고 했다. "사물을 직관적으로 따다 사용한 서양과 달리 한국은 다양한 형용사를 변주해 만들기 때문에 풍부한 상상력으로 조합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객관화시키긴 어려워도 표현할 수 있는 가짓수는 서양보다 훨씬 많다는 설명이다.

소비 트렌드도 반영되고 있다. 현대자동차의 경우 새로운 차종이 나올 때 '커뮤니케이션 컬러(광고 등 고객과 소통하는 상징 컬러)'가 될 만한 대표 색상을 정하기 위해 2년 정도 각종 시장 조사를 통해 유행색을 예측한다. 현대자동차 디자인연구소 김지희 책임(그룹장)은 "잘 팔리는 자동차 색은 검정, 흰색 같은 무채색과 중성 색이지만 '신선한' 느낌을 주기 위해 새로운 색상을 선보인다"며 "국내 소비자들이 색상에 점점 예민해지고 있어 내년부터는 차를 살 때 '색상 커스터마이징 시스템'을 도입할 예정"이라고 했다. 처음부터 고객이 원하는 차량 색을 맞춤식으로 하는 방식이다.

현재 팬톤 색상표엔 2100가지 색이 있다. 색채 전문가들은 연구 결과 인간의 눈이 최대 300만 가지의 색을 식별할 수 있다고 한다. 새로운 색이 계속 등장하고, 우리의 컬러 선택 폭은 더 넓어진다. 장 가르비엘 코스는 말한다. "이 세상 최고의 색채 전문가가 자기 머릿속에 들어 있음을 잊지 마라. 그의 이름은 본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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