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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고리즘을 넘어서]④한국의 일상..휴일도 야밤도 '동원 명령'..맘고리즘 쳇바퀴로 굴러가는 일터

이성희·이영경 기자 입력 2017. 01. 26. 21:07 수정 2017. 01. 26.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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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남성과 사회가 함께하는 육아
ㆍ일·가정 양립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노동시간 단축이 선행돼야 한다

한국의 흔한 휴일 풍경 ‘임직원 산행’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금호아시아나그룹 박삼구 회장은 매년 초 임직원들과 동반 산행을 한다. 대개 1월 한달간 주말마다 그룹 계열사를 돌아가며 산에 오르는 식이다. 올해는 하나금융그룹도, 에쓰오일도 산 정상에서 시무식을 열고 새해 각오를 다졌다. 명분은 소통과 통합이지만, 직원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휴일이나 주말에 이뤄진다. 수많은 직장인들이 또 이렇게 새해벽두를 가족이 아닌 회사에 얽매여 한해를 시작했다.

■ 저녁은커녕 주말도 없는 삶

회사는 수시로 ‘동원 명령’을 내린다. 한 의류업체는 최근 본사 직원들에게 주말 대리점 영업 지원을 지시했다. 그러나 수당도, 대체휴일도 없었다. 공무원 사회에서도 주말 근무는 비일비재하다. 대부분의 정부 부처 국·과장들은 일요일 출근이 불문율이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업무가 많아 평일근무만으론 부족하다”며 “(직급이) 위로 올라갈수록 일요일 출근은 관행적으로 이뤄진다”고 말했다.

야근은 일상이다. 한 취업포털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들은 일주일에 평균 3.6번 야근을 한다. 퇴근시간 이후 초과근무는 평균 3시간42분이나 된다. 정시 퇴근이 오후 6시라고 했을 때, 주 5일 근무를 해도 나흘은 밤 10시나 돼서야 회사를 나설 수 있다. 개인보다 조직, 상생보다 경쟁을 통해 성과를 내온 기업문화 탓이다. 직장인들은 일과 가정의 균형을 맞출 수 없는 구조라고 하소연한다. 양육과 돌봄을 여성에게 전가하는 ‘맘고리즘’은 개인의 선택이 아닌 사회 구조적 문제라는 얘기다.

반강제로 이뤄지는 회식까지 포함하면 회사에 매이는 시간은 더 길다. 퇴근을 해도 카카오톡 메시지를 통해 시시때때로 업무 지시가 내려온다. 자신의 취미생활을 위해 직원을 호출하는 상사들도 있다. 상명하복식 권위주의적 기업문화가 낳은 폐단이다. 이런 상황에서 남성보다 육아 및 가사 부담을 많이 짊어진 여성들은 직장생활을 버티기가 쉽지 않다.

■ 가족친화제도는 생색내기

기업들은 나름대로 가족친화 제도를 펴고 있다고 항변한다. 특정 요일에는 정시 퇴근하는 ‘가정의 날’이 대표적이다. 이날은 회식이나 퇴근시간대 업무지시를 일절 금지한다. 그러나 뜯어보면 정시 퇴근이라는 정당한 권리가 회사의 배려로 포장된 것이다. 직장생활 10년차 주모씨(38)는 “가정의 날(수요일)을 만든 것부터가 월·화·목·금요일에는 칼퇴근하면 안된다는 암묵적 지시 아니겠냐”라고 말했다. 그나마 잘 지켜지지도 않는다. 한 금융업체에서는 사장이 주관하는 송년모임을 가정의 날에 열기도 했다. 직장생활 6년차 김모씨(34)는 “1년에 한두 번 임직원 자녀를 초청하는 행사도 있다”며 “퇴근 시간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이들에게 아빠를 더 많이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제도는 있지만 유명무실하다. 출산휴가와 육아휴직 제도의 시행률은 70%에 못 미친다. 육아휴직자에 대한 불이익도 여전하다. 삼성물산은 육아휴직을 신청한 직원들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감수하겠다는 각서를 받아온 사실이 알려져 도마에 올랐다. 또 아직 많은 기업들이 육아휴직자를 승진에서 제외하거나 연말 인사고과에서 근무 개월수와 상관없이 최하점으로 평가한다. 인력 구조조정을 할 때는 육아휴직자를 1순위에 올리기도 한다.

이보다 인지도가 낮은 임신기 근로시간단축제도(34.9%)나 육아기 근로시간단축제도(27.2%)의 시행률은 더 낮다. 육아휴직 뒤 근로시간을 탄력적으로 쓸 수 있는 유연근무제도 있지만 시행률은 10% 내외다. 하지만 정부조차 기업에 지원금을 제공하고 홍보하는 것 외에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보장하지 않아 사법처리된 기업은 각각 19건과 5건에 불과했다.

■ 출산·육아휴직 안 줘도 처벌 미미

정부가 일·가정 양립 지원을 위해 육아휴직 등 가족친화제도를 모범적으로 운영하는 기업이나 공공기관에 인증을 부여하는 가족친화인증 제도를 시행 중이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총 1828개 기업(기관 포함)이 가족친화인증을 받았다. 공공기관을 제외하고 약 60만개에 이르는 전체 기업 수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수준이다.

일·가정 양립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노동시간 단축이 선행돼야 한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그간 기업은 노동자의 장시간 노동을 쥐어짜서 사회적 부를 축적해왔는데, 더 이상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다”라며 “법정 근로시간을 의무화하고, 포괄임금제를 없애는 대신 초과근무수당을 현실화해 노동시간 단축부터 이뤄야 한다”고 말했다.

<이성희·이영경 기자 mong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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