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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 우리 새끼'..황혼육아에 노부모들 '번아웃 증후군'

박영주 입력 2017. 02. 26.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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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들 장기간 양육 정신적·육체적 고통…찜질방으로 피신도
"손녀 육아 맡느라 이 나이에 주말 부부 신세…홀로 된 남편 짠해"
조부모들 평균 주당 43시간 손자녀 돌봐…법적 근로시간마저 초과
이대로는 손자녀 육아 둘러싼 사회적 갈등 더 심해질 것

【서울=뉴시스】박영주 기자 = 김선영(64·가명)씨는 딸에게 여행을 알리고 캐리어(여행용 가방)를 끌고 집을 나섰다. 고등학교 동창들과 2박3일 일정으로 부산을 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김씨가 찾은 곳은 부산행 기차역이 아닌 '찜질방'이었다. 손녀 양육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한 선택이었다.

김씨는 "매일 오전 집안일을 하고 오후 3시께 어린이집으로 손녀를 데리러 간다"며 "아이 간식을 주고 함께 놀아주다가 저녁까지 챙겨주고 나면 딸과 사위가 집으로 아이를 데리러 온다"고 말했다.

그는 "몇 달 전부터 딸 내외가 평일 저녁까지 집에서 다 해결하고 밤늦게 가더니 최근에는 주말에도 오전 일찍 집에 와서 오후 늦게까지 아이를 맡기고 휴식을 취한다"면서 "고생하는 딸이 안쓰럽기는 하지만 이러다가 내가 쓰러질 것 같아 여행을 간다고 거짓말을 했다"고 토로했다.

맞벌이하는 딸·아들을 대신해 손자녀를 돌보는 조부모들이 '번아웃 증후군'(극도의 신체적·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며 무기력해지는 현상)을 호소하고 있다. 노후생활을 즐겨야 할 나이에 손자녀에게 발이 묶여 정신적·육체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신모(57)씨는 최근 아들이 손자를 봐 달라고 부탁해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뒀다. 그는 "아들과 며느리가 야근이라도 할 때면 밤 10시가 훌쩍 넘어야 집에 갈 수 있다"며 "오전에 아들 집으로 넘어가 빨래, 청소 등을 하고 난 후 밤늦게까지 손자를 돌보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무릎, 허리 안 쑤시는 데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경기 이천에 사는 임모(61)씨는 "서울에 있는 딸이 일주일만 손녀를 봐달라고 부탁해 남편을 두고 딸의 집으로 왔다"면서 "아이를 부탁할 '이모'를 구할 때까지만 봐달라더니 어느덧 한 달째 딸의 집에 머물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젊을 때도 해보지 않은 '주말 부부'를 이 나이 먹고 하고 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서울에서 지내느라 나도 외롭지만 평일에 홀로 밥 챙겨 먹을 남편 생각을 하니 더 짠할 노릇"이라며 헛웃음을 지었다.

육아정책연구소가 부모 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맞벌이 가정의 90.2%(451명)가 자녀 양육에 조부모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외벌이는 7.2%(36명), 한부모 2.6%(13명)로 조사됐다.(2015년 11월 기준)

조부모의 일주일 평균 손자녀 양육시간은 5.25일로 집계됐다. 하지만 10명 중 1명 꼴(11.8%)은 주 7일 동안 손자녀를 돌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부모의 양육시간은 평균 주당 42.53시간으로 근로자의 법적 근로시간인 주당 40시간을 초과했다.

조부모가 영유아 손자녀 양육을 하게 된 동기로는 '자녀가 마음 놓고 직장생활을 하게 도와주려고'가 49.8%로 가장 많았다. '자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서'(28.2%), '자녀가 양육하는 것이 안쓰러워서'(13.6%), '자녀를 경제적으로 도와주지 못해서'(5.6%) 등이 뒤따랐다.

조부모들이 노후의 여유 있는 삶을 포기한 채 손자녀 양육에 나서는 이유는 젊은 부부들이 자립해 아이를 키우기에는 사회적 제도나 문화가 뒷받침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아이를 위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육아에 집중하기에는 경제적인 형편이 넉넉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경력 단절' 현상으로 향후 재취업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자녀의 성공을 최우선으로 여겼던 세대의 조부모들이 다시 한번 희생을 강요당하며 손자녀를 도맡아 키우게 되는 것이다.

장영은 중앙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맞벌이 부부가 늦게 퇴근하면 누군가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와야 하는데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조부모밖에 없다"면서 "과거를 돌아보고 정리해야 할 시기에 생산적인 연령대에서 해야 하는 양육을 조부모가 대신 담당하다 보니 당연히 힘들고 무리가 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장 교수는 "보육시설 확충, 육아 휴직 제도 등 정부의 실효성 있는 대책 마련과 칼퇴근과 같은 사회 문화적 변화가 필요하다"며 "젊은 부부들도 조부모의 희생을 당연시하기보다는 주말에 가사 분담을 해주거나 정기적으로 여행을 보내주는 등의 방식으로 조부모의 짐을 덜어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시대가 흐를수록 손자녀 육아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더 심해질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자녀를 위해 모든 희생을 감내하던 과거 부모와는 달리 자신의 삶과 여유가 우선시되는 세대가 오면 손자녀의 육아 문제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정부나 사회가 실효성 있는 도움을 주지도 않으면서 아기를 많이 낳으라고 하는 건 당사자들과 그들의 부모 세대에게 너무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전 교수는 "요즘 젊은 부부들만 하더라도 자녀들에게 '가능하면 결혼 늦게 하여라'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을 많이 한다"면서 "이 말에는 '손자, 손녀를 위해 내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도 내포됐다"고 해석했다.

그는 "자신의 삶이 더 중요한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면 아이의 육아 문제가 가족의 긴장과 갈등을 높이는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라며 "사회나 국가가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여기에 걸맞은 정책을 펼친다면 가족 내 긴장과 갈등이 줄어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gogogirl@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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