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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도 쉬고 싶다

입력 2017. 02. 26.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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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첫째와 전쟁하고 둘째와 씨름하며
푹 자고 차분히 먹을 기본권마저 잃어

블록으로 무언가를 만든 뒤 블록 통 안에 들어간 큰아이. 아이의 모든 ‘놀이’에 엄마는 자신의 감정과 일거리와 무관하게 열심히 손뼉 치고 응답해야 평화가 유지된다. 박수진 기자

육아휴직 중인 나는 종종 “잘 쉬고 있냐”는 인사를 듣는다. 기분이 좋을 땐(둘째아이가 규칙적으로 먹고 자서 운신의 폭이 넓을 때) “네, 잘 쉬고 있죠”라고 답한다. 하루가 왕창 꼬인 날(큰아이가 어린이집 갈 때부터 ‘밥 싫다’ ‘세수 싫다’ ‘이 옷 싫다’ 등 각종 ‘싫다’를 선보이고 둘째까지 계속 칭얼댈 때)에는 순간 발끈해서 “쉬는 거 아니거든요”라고 답한다.

나도 쉬고 싶다. 둘째가 잠든 때 미처 개지 못 한 빨래더미를 밀어두고 스마트폰 좁은 화면으로 영화 보는 것 말고, ‘첫째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오기 전에 청소하고 설거지도 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을 쌓아둔 채 쪽잠 드는 것 말고, 진짜 쉬는 것.

괜히 싱글일 때 기억을 기웃댄다. 종일 뒹굴다 배고플 때쯤 피자 한 판 주문하고, 맥주나 와인도 한 병 열어서 홀짝대다 만화책이나 소설책 보고, 이불 속에 들어가 아무 프로그램이나 돌려가면서 TV 보다 깜빡 잠들던 어느 토요일. 모자 푹 눌러쓰고 집 앞을 걷다가 근처 영화관에서 영화 보고 밤이슬 맞으며 천천히 걸어서 집에 돌아오던 또 다른 토요일. 페이스북에 지인이 올린 한라산 설경을 보며 ‘등산이 뭐더라’ 혼잣말을 주억거리며 나를 동정한다.

지금 나는 시간을 죽일 권리가 없다. 오후 4시까지의 노동을 촘촘히 짜지 않으면 이후는 엉망이 된다.

첫째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바로 그 시간부터 나는 아이의 ‘놀이친구’가 돼야 한다. 큰아이가 온 집 안의 베개를 모아 ‘이건 까마귀 둥지다’ ‘이건 동생 집이다’ ‘이건 펭귄 집이다’라며 만들어내는 창작물에 내가 쌀 씻고 양파 껍질 까느라 제대로 응대해주지 않으면 아이는 “엄마 이것 좀 봐”에서 시작해 “엄마, 나는 이거 엄마가 봐주면 좋겠는데”를 거쳐 “엄마, 미워” 하며 징징댄다. 이어 놀 상대를 찾아 동생에게 간다. 잘 자고 있는 동생 옆에서 기차 화통 삶아 먹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결국 둘째를 깨워 울린다. ‘빌려준 것’이라 주장하며 동생 베개를 빼 간다. 둘째가 바운서에 앉아 있을 때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재미있어 하며 손에 쥐고 노는 나비를 가져가 울리기도 한다.

그럼 나는 ‘그래, 너 오기 전에 노닥거린 내 탓이다’라고 자책하며 다음 날 스스로 꽉 짠 낮 시간을 보내는 가사노동 인간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오후 4시 이후에도 집안일들이 남아 있는 날엔 첫째와 전쟁하고 둘째와 씨름하며 게으른 나를 자책하고, 왜 이러고 사나 자조하다 피폐해진다.

글 쓰는 사람 은유는 책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에서 “엄마로 사는 건 인격이 물오르는 경험이 아니었다. 외려 내 안의 야만과 마주하는 기회였다. 생명체가 제 앞가림할 때까지 나는 혼자 있을 권리, 차분히 먹을 권리, 푹 잘 권리, 느리게 걸을 권리 같은 기본권을 몽땅 빼앗겼다. 그런 전면적이고 장기적인 실존의 침해를 감내하다 보면 피폐해진다. 성격 삐뚤어지고 교양 허물어진다”고 했다. 애 둘 있는 엄마인 필자가 이 대목을 포함해 한 줄 한 줄 밑줄 긋게 만드는 책을 써냈으니 그 ‘야만의 시간’도 언젠가 끝나겠지.

아무튼 육아휴직 중인 사람들을 만나면 “잘 쉬고 있냐” 대신 “잘 지내고 있냐”고 물어봐주면 좋겠다. 각종 기본권을 상실하고 바깥은 물론 자신과도 단절되는 것 같은 ‘존재 불안’으로 교양이 허물어진 터라 어떻게 대꾸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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