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만수 <13> '선진 야구' 전수, 원대한 꿈 안고 SK로

정리=백상현 기자 2017. 3. 15.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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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전 4승.

한국인 코치가 최초로 맞이하는 월드시리즈 우승이었다.

"SK와이번스입니다. 코치님, 저희 팀이 지금 급한 상황입니다. 저희 팀을 맡아 주십시오." "죄송합니다만, 미국에서 조금 더 야구 공부를 하려고 합니다." "코치님." "죄송합니다."

'출애굽기 14장 10∼13절.' 1998년 미국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마이너리그 싱글A팀 3루 작전코치로 미국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2003년 미국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사표를 내고 한국 코치 자리가 돌연 취소됐을 때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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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된 후 정규시즌 6위 초라한 성적.. '이만수 물러나라' 플래카드 나붙어
이만수 감독(맨 오른쪽)이 2005년 10월 29일 미국 시카고 다운타운 거리에서 열린 시카고 화이트삭스 우승 카퍼레이드에서 환호하고 있다.

4전 4승. 한국인 코치가 최초로 맞이하는 월드시리즈 우승이었다. 그동안 미국에서 고생했던 일들이 영화필름처럼 지나갔다.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끼는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극소수의 코치만이 손가락에 낄 수 있는 전설적인 반지였다. 대구중학교 시절 주한미군방송(AFKN) 통해 보던 그 반지를 30여년 만에 끼게 된 것이다.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88년 만에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자 시카고 시내에 170만명의 인파가 몰려나왔다. 카퍼레이드를 하는데 고층 빌딩에서 떨어지는 형형색색의 종이가 꽃가루처럼 느껴졌다. 나와 아내, 두 아들이 리무진 버스 위에서 손을 흔들었다. “이야, 대단하데이. 주님이 우리에게 천국을 보여주시는 갑다.”

2006년 10월 정규 시즌을 마치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 “SK와이번스입니다. 코치님, 저희 팀이 지금 급한 상황입니다. 저희 팀을 맡아 주십시오.” “죄송합니다만, 미국에서 조금 더 야구 공부를 하려고 합니다.” “코치님.” “죄송합니다.”

미국 월드시리즈 우승을 한 데다 이제 미국생활도 익숙해진 상황이었다. 아내가 대화를 엿들었던 모양이다. “당신 미국야구 배운 다음에 한국에 가서 전수하겠다고 안 그랬어요.” 뜨끔했다. “으응. 꼭 지금 한국에 꼭 들어갈 필요가 있나.” “여보, 미국이 아무리 좋아도 이방인일 뿐이에요.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요.”

며칠 후 큰아들이 대화를 하자고 했다. “아빠,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빠가 미국으로 들어오라는 호출에 군말 없이 왔잖아요. 아빠가 맡고 있는 코치 자리는 아빠가 없어도 미국사람이 대신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근데 아빠가 한국에 안 들어가면 선진야구를 누가 가르쳐줘요. 아빠 아니면 한국야구는 최소 30년 이상 기다려야 할 겁니다.” 아들의 말 한마디가 안주하려는 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이 자슥이, 알았다.”

안정적 자리를 박차고 한국에 들어간다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 또다시 아내와 함께 10일간 특별기도에 들어갔다. 설교말씀도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기도 중에 말씀이 떠올랐다. ‘출애굽기 14장 10∼13절.’ 1998년 미국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마이너리그 싱글A팀 3루 작전코치로 미국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2003년 미국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사표를 내고 한국 코치 자리가 돌연 취소됐을 때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알았습니더. 주님이 가라고 하시면 가겠습니더.’ 백기투항을 했다. 그렇게 그해 10월 SK와이번스 수석코치로 들어오게 됐다.

한국에 오니 고난이 시작됐다. 그동안 자유분방하지만 철저한 통계와 분석 중심의 미국야구에 익숙해진 나는 권위적인 일본식 야구와 비슷한 한국야구에 어려움을 겪었다. 한마디로 미국야구와 한국야구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개념이었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떠오르는 생각을 속으로 삭혀야 했다. 집 앞 교회에서 눈물로 새벽기도를 드리는 게 일상이 됐다. ‘주님, 안정적인 미국생활을 뒤로 하고 한국에 들어왔는데 이게 뭡니꺼. 주님, 좀 도와 주이소.’ 주님은 자칫 교만해질 수 있는 나를 그렇게 철저하게 순종 훈련의 자리로 이끌어 주셨다.

2010년엔 SK 와이번스 2군 감독을 거쳐 2011년 8월부터 감독대행을 맡게 됐다. 그해 11월부턴 감독을 맡게 됐다. 그러나 성적이 신통치는 않았다. 2013년 10월이었다. 정규시즌에서 6등이라는 초라한 성적이 나왔다. 내 인생에서 6등은 해본 적이 없다. 야구장에 이런 플래카드가 붙었다. ‘이만수는 물러나라.’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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