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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한 며느리 미워했지만.. 이제라도 '엄마' 노릇 하며 잘 살길

입력 2017. 03. 23.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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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다방으로 오세요!]

버둥거리는 손자를 등에 업은 채, 약봉지를 털어 넣는 할머니를 본 적이 있습니다. 진통제와 소화제로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던 그분도 아마 지금쯤은 육아 도우미 신세를 벗어나셨겠지요.

그러나 오늘 만난 손님에게는 세월을 건널 특효약이 없었습니다. 할미 마음 몰라주는 사춘기 손녀, 엄마 품을 그리는 어린 손자를 품어온 그녀에게는 강력한 눈물 진통제와 한숨 소화제가 절실했을 텐데요. 그녀가 흘린 눈물과 한숨은 이제 그리움과 축원으로 그녀 곁에 남기를….

홍 여사 드림

요즘은 어딜 가도 손주 돌본다는 할머니가 많지요. 며칠 전 친정 조카 결혼식에서도, 사촌 여동생 둘이 하소연을 주고받고 있더군요. 돌쟁이 손녀와 네 살 먹은 손자 중 어느 쪽이 더 힘든가 경쟁이라도 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휴대폰 사진을 보여주며 손주 자랑입니다.

실은 저도 얼마 전까지 아이들을 맡아 있었습니다. 나이 먹어서 아이들을 거두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잘 알지요. 하지만 저는 그런 뿌듯한 하소연에 끼어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맞벌이하는 자식들을 위해 봉사하는 할머니들과는 사정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뿐인 아들이 낳은 두 점 혈육이 저의 손에 맡겨진 이유는 '가정불화' 때문이었습니다. 일찌감치 짝을 찾아 가정을 꾸린 아들이 해도 넘기기 전에 천사 같은 손녀를 낳아 제 품에 안겨주더니, 불과 삼 년도 못 되어 이혼 소리를 하기 시작하더군요. 그 와중에도 아들을 또 낳아 잠시나마 희망의 불씨를 뒤적이는가 싶더니, 결국 갈라서고 말았습니다. 손녀가 일곱 살, 손자가 세 살 때 일입니다.

물론 저는 이혼을 말렸습니다. 며느리가 못 살겠다고 할 때마다 저는 말했지요. 내 아들한테 문제가 있고, 아들을 더 훌륭하게 키우지 못한 나한테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테니, 이혼만은 하지 말고 참으라 했습니다. 한참 엄마의 손길과 아빠의 울타리가 필요한 아이들이 있지 않으냐고, 낳을 때는 너희 마음대로 낳았을지언정, 거두는 건 누구에게도 미룰 수 없는 부모의 책임이지 않으냐고요?

하지만 아들과 며느리는 제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이 둘을 팽개치다시피 하고 며느리가 집을 떠났습니다. 아이들에게만은 지극정성이던 며느리였기에, 돌아설 때의 그 매몰찬 모습이 저는 충격이었습니다. 양육권이고 뭐고 다 필요없으니, 이혼만 해달라고 한다니.

그렇게 며느리가 떠나고 아이들을 제가 맡았습니다. 젊지 않은 나이에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 심신이 지쳐갔지만, 그보다 더 힘든 것은 슬픔과 배신감이었습니다. 기어이 자식을 두고 제 살 길만 찾아 떠난 며느리를 같은 여자로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아들은 아들대로 이혼 후 엇나가기 시작했죠. 정신을 바짝 차려도 모자랄 판에, 술이 늘고, 외박이 늘고, 직장을 자꾸 관두더군요. 저도 마찬가집니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아이들 앞에서 아들과 며느리를 원망했더랬습니다. 못난 놈, 지독한 것, 부모복도 지지리 없는 우리 불쌍한 새끼들….

그렇게 육칠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이들은 자라서, 점점 손이 덜 갔지만 그 사이에 제 몸이 늙어버렸지요. 전보다 덜 움직이는데, 힘은 더 들더군요. 게다가 아들은 아예 따로 나가 살며 어쩌다 한 번씩만 찾아왔고, 애들은 점점 더 부모 없는 티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덩치만 크지 아직 아기나 다름없는 손자를 보면 눈물이 났습니다. 그 아이는 제 누나와 달리 엄마 아빠를 자주 찾았거든요. 또래의 다른 아이들보다 발달이 늦고 사회성이 떨어지는 것이 제가 응석을 받아준 탓인가 싶어 걱정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힘든 것은 사춘기를 맞은 손녀와의 관계였습니다. 저는 그래도 나름 최선을 다해서 키웠는데, 손녀에겐 많이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엄마가 없다는 걸 힘들어하더군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할머니 때문이라는 듯 저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가 엄마를 미워해서 엄마가 도망갔다는 겁니다.

애들 때문에 속을 썩다 보니 며느리 생각이 절로 나더군요. 제 새끼 둘을 늙은 시어미한테 맡겨놓고 어디 가서 잘 사는가 싶고, 저도 사람이니 밤마다 베갯머리에 눈물로 수를 놓겠지 싶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제 마음에 미움과 가련함으로 남아 있는 며느리가 어느 날 저를 불쑥 찾아왔더군요. 실은 얼마 전부터 아이들과 만나 왔다는 겁니다. 어머님이 그동안 애쓰신 것, 요즘 부쩍 더 힘에 부쳐 하신다는 것도 다 안다며 아이들을 제가 데려가겠다 하더군요. 저는 이혼 후 친정아버지 사업을 도우며 살고 있다고요.

저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떠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왜 데려가느냐고 했죠. 하지만 며느리는 포기하지 않고 우리 집을 드나들기 시작했습니다. 장을 봐 오고, 말없이 청소를 하고, 밤늦도록 공부도 봐주곤 했죠. 엄마의 손길이 닿자마자 애들은 대번에 표정이 밝아지더군요.

결국 저는 애들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아들한테는 의견을 묻지도 않았습니다. 그 녀석은 뭐라 말할 자격이 없거든요. 만약 무어라 토를 달면, 너 죽고 나 죽자 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애들과 애들 짐을 다 보내고 나니 집이 텅 빈 것 같습니다. 몸은 편해졌는데, 하루 종일 웃을 일이 없네요.

그리고 저는 며느리를 생각합니다. 마지막까지 우리는 서로 마음 속 말을 다 하지 못했습니다. 저도 나에게 고맙단 말 안 했고, 나도 저에게 미안하다는 말 안 했네요. 어머님 건강하세요라는 말만 남기고 돌아서는 며느리에게 저는 덕담인지 악담인지 모를 말을 했을 뿐입니다. 가서 셋이 한번 잘 살아보거라.

하필이면 고부로 만나, 우리는 서로 못할 짓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앞길을 축원할 뿐입니다. 자식 키우는 어미의 행복을 만끽하면서, 재미나게 살라고. 하루하루 재미나게 살다 보면 먼 훗날 더 좋은 인연, 더 좋은 인생이 찾아올 거라고요.

이메일 투고 mrsho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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