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한국 촛불집회처럼 하자" 러시아 시위대

하준수 입력 2017. 3. 28.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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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꾼, 훔치지 마라!" "푸틴 없는 러시아!" "푸틴을 탄핵하라!"

지난 26일 일요일. 러시아 전역에서 울려 퍼진 구호이다. 극동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예카테린부르크, 노보시비르스크, 옴스크 등을 거쳐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공직자 부패 척결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모스크바에서만 만여 명,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5천여 명, 다른 도시에서도 수백여 명씩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평화적인 거리 행진을 시도했으나 이를 불법집회로 규정해 가로막은 경찰과 곳곳에서 크고 작은 몸싸움을 벌였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위


모스크바에서만 5백 명 넘게 경찰에 연행됐고, 다른 도시들에서도 수십 명, 수백 명씩 체포됐다. 이번 시위를 주동한 대표적 야권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도 체포됐고, 그가 이끄는 '반부패 펀드' 사무실도 경찰이 급습해 직원 17명을 연행했다. 27일 열린 재판에서 나발니는 체포 당시 경찰에 불응하고 저항했다는 이유로 15일의 구류를 선고받았다.

이번 시위는 지난 2012년 부정 선거 규탄 대규모 시위 이후 최대 규모로 기록됐다. 일부 언론은 이번 시위에서 연행된 참가자 숫자가 지난 2012년 시위 때의 연행자 숫자와 비슷한 규모라고 평가했다.

야권 운동가 나발니


이번 시위의 발단은, 내년 대선 출마를 선언한 나발니가 최근 발표한 메드베데프 총리의 부정 축재 보고서, 이른바 '나발니 보고서'이다.

유투브에 공개된 49분 분량의 동영상인 '나발니 보고서'는, 메드베데프 총리가 국내 외에 대규모 땅, 고급 저택, 포도원, 요트 등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폭로했다.

메드베데프의 대학동창인 엘리세예프(현재 가스프롬방크 이사회 부의장)를 중심으로 그의 부인과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동창 인맥들이 동원돼, 러시아 신흥재벌인 올리가르히들, 특히 석유재벌인 우스만노프의 뇌물을 받아 재산을 축적했다고 비판했다.

나발니 보고서에 따르면, 메드베데프는 지난 대통령 시절과 현 총리직을 이용해, 자신의 최측근을 통해 공기업의 자금과 러시아 재벌들의 뇌물을 받아 각종 회사와 펀드를 설립, 조성했다. 엘리세예프가 설립한 회사 이름으로, 모스크바와 소치, 그리고 메드베데프 총리의 할아버지 고향에까지 대저택들을 구입하고, 와인생산을 위한 포도농장들을 국내와 해외에 구입했으며, 최고급 요트도 2대나 사들였다. 모든 구입은 회사명의로 되어 있으나, 이 회사들의 실질적인 소유주는 메드베데프 총리라고 비판했다.

나발니는 공직자 월급으로서는 도저히 구매할 수 없는 이 같은 고가의 자산들을 축적한 배경을 조사할 것을 당국에 촉구했다. 또 메드베데프를 고발하면서 푸틴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라며 내년 대선에서 이 같은 부정부패를 척결하자고 촉구했다.

동영상 속 나발니


'나발니 보고서'는 유튜브에서 1천100만 회 이상의 조회 수를 기록했으나 당사자인 메드베데프 총리는 이에 대해 적절한 해명을 하지 않았고, 당국도 조사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에 나발니는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부패 조사를 촉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일 것을 촉구했고 그를 따르는 지지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푸틴을 탄핵하라며 반정부 시위로까지 확산됐다.

“한국 촛불집회처럼 하자”

시위를 “한국의 촛불집회처럼 하자”고 언급한 팟캐스트 방송 진행자 볼코프


이번 시위에서 관심이 쏠리는 것은, 러시아 야권이 한국의 촛불집회에서 깊은 영향을 받지 않았겠느냐 하는 점이다. 실제로 집회 과정에서 한국의 촛불집회를 언급한 발언이 나왔기 때문이다.

집회 주최 측은 26일 시위 과정에서 '디몬(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총리의 약자)'이라고 불리는 팟캐스트 방송을 생중계로 진행했다. 방송 진행자인 레오니드 볼코프의 발언을 보자.

"모스크바 중심가 집회가 14시부터 시작되는데 한국의 촛불집회처럼 평화적이고 자유롭게 진행하자. 한군데 모여 있지 말고 산책하듯이 인도를 따라 계속 네모를 그리며 돌라. 한국에서도 유모차 끌고 아이들 손잡고 피크닉처럼 했다."

볼코프는 집회 직후 경찰에 연행돼서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 같은 발언을 했는지 당장은 물어볼 길이 없다. 다만, 주최 측이 집회 신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당국이 허가를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시위를 강행했을 경우 발생할 불상사를 예방하기 위해 최대한 평화적인 시위를 종용했으며, 이 과정에서 한국의 촛불집회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번 시위의 주최 측이 한국의 평화적인 시위 방법을 벤치마킹한 것으로 풀이된다.

또 대다수 시위 참가자들이 "그동안 오랫동안 말하지 못했던 부패 척결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이 자리에 나왔다"라고 말한 점이나, 심지어는 "한국에서는 부패한 대통령을 탄핵했는데 우리라고 못 할 게 있나"라고 말한 참가자도 있다고 전해지는 점으로 미뤄볼 때 한국의 촛불집회에 러시아 사람들이 고무돼 있었다고 표현해도 지나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번 시위가 1년 앞으로 다가온 러시아 대선 과정에 어떤 파급효과를 몰고 올지 아직은 예측하기 어렵다. 푸틴 대통령은 여전히 80% 이상의 높은 지지도를 누리고 있다.

러시아 당국은 이번 시위를 내년 대선을 앞두고 지지자들을 결집하려는 야권의 도발이라고 규정했다. 러시아 주요 언론들도 이번 시위가 불법집회였다는 점만 전달할 뿐,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하준수기자 (ha6666js@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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