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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대개조작업 성공한 소수림왕 리더십의 실체

임기환 입력 2017. 03. 30.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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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소수림왕 왕릉으로 비정하는 천추묘. 국내지역에 남아있는 가장 규모가 큰 왕릉이다. 계단식 석실무덤으로 왕릉의 무덤 양식도 새롭게 바뀌어서 소수림왕 때 새로운 문풍이 일어났음을 짐작케 한다.
[고구려사 명장면-16] 가정을 하나 해보자. 만약 오늘날 우리가 주변 국가와 전쟁을 여러 차례 치르고 두 번이나 큰 패배를 당하였다고 해보자. 그것도 보통 패배가 아니라 한 번은 서울이 적에게 함락돼 황폐화되고 서울 사는 주민 상당수가 적국으로 끌려갈 정도로 충격적 패배였다. 그 뒤 겨우 힘을 회복해서 다시 또 다른 나라와 전쟁을 벌였는데, 이 나라 또한 강력하게 반격해와 내 땅에서 국가 지도자가 전투에서 전사하는 패배를 당하였다고 치자. 이런 국가적 위기를 맞았을 때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고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국원왕 때 고구려가 딱 그랬다, 지난 회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연의 침공을 받아 수도 국내성이 함락되고 주민 5만명이 끌려갔으며, 백제와의 전쟁에서는 평양으로 쳐들어온 근초고왕의 군대와 전투에서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패배를 당하였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아들 소수림왕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소수림왕에 대해 "키가 크고 웅대한 지략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말은 다소 상투적이기 때문에 그리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지만, 소수림왕이 재위 기간에 성취한 업적을 보면 웅대한 지략을 갖추었다는 말이 그저 상투적 칭송의 말이 아님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고등학교 때까지 한국사 교과서에서 고대국가로 발전하기 위한 조건들로 소수림왕 때 율령 반포, 불교 공인, 태학 성립 등을 언급하고 있다. 학생들은 이를 그냥 고대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으레 갖추어야 할 통과의례 정도로만 외우는 데 그치곤 한다. 필자도 본격적으로 고대사를 공부하기 전까지는 고대국가 만들기의 필수 조건 정도로만 생각했다.

 과연 그럴까? 이런 물음을 던지는 이유는 이런 새로운 정책을 시행하는 데 얼마만 한 사회적 진통과 갈등이 일어났을지, 또 이런 정책들이 당시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그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을지를 잘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수림왕 때의 정책이 어느 정도의 큰 변화를 초래하는 개혁인지 감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잠시 오늘 우리 현실과 대응해서 생각해보자. 요즘 무언가 바뀌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여기저기서 많이 나온다. 시급하게는 개헌 이야기도 나오고, 멀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변화나 4차 산업혁명도 운운된다. 그런데 아직 구체적인 면이 작아서 별로 현안 문제로 실감하지 못한다.

 그러면 이른바 IMF 사태라고 하는 외환위기가 주었던 우리 사회의 충격과 불안을 떠올려 보자. 아마도 근자에 한국 사회가 경험한 가장 큰 변화 중 하나였을 것이다. 나름 잘 대처했다고들 하지만, 한편으로 양극화 등 많은 문제가 그때의 대응 방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이렇게 위기에 대처하는 법은 그리 쉽지 않고, 전혀 새로운 방식에 의해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것은 더더욱이나 어렵다.

 그런데 소수림왕대의 고구려는 달랐다. 즉위 초부터 바로 율령 반포, 불교 공인, 태학 성립 등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그런데 이들 정책이 당시에 어느 정도 새롭고 어느 정도 큰 파장을 불러올 수 있는 것인지 생각해보는 게 중요하다.

 먼저 율령 반포부터 살펴보자. 율(律)은 죄를 정하는 형벌법, 영(令)은 교령법(敎令法), 즉 일반행정규정으로서, 율령은 곧 국가체제를 운영하는 기본 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소수림왕 재위 3년(373년)에 처음으로 율령을 반포하였다는 것이 그때까지 고구려가 율과 영에 해당되는 법제가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고구려 국가 전체에 적용되는 통일되고 일원적인 율과 영을 정비하고 새롭게 만들었다는 뜻이다.

 아쉽게 고구려의 율령을 전하는 자료가 없어서 그 전모를 알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중국 왕조의 선진적인 율령을 고구려에 맞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때의 율령 반포는 전혀 새로운 국가 운영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는 요즘 이야기하는 개헌 수준이 아니다. 국가 운영체제를 통째로 바꾸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헌법, 형법, 민법 등등을 몽땅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해보면, '율령 반포' 네 글자 속에 담겨 있는 엄청난 내용을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불교 공인도 마찬가지다. 재위 2년(372년)에 전진으로부터 승려와 불상, 불경을 받아들이고, 5년에는 처음으로 수도에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워서 외국인 승려 순도(順道)와 아도(阿道)를 머무르게 하였다. 불교의 수용이란 새로운 종교와 사상, 사유체계를 수용하는 것이다. 이는 정신적인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종교 의례 행위나 생활양식의 변화까지도 초래하게 된다. 또 대규모 사찰을 건립하면 도성의 경관도 달라지게 된다. 1898년 서울 명동성동이 처음 지어졌을 때 한양에서 가장 높은 건물의 하나로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사실도 상기해보자. 고구려 국내성에 불교 사찰이 처음 지어졌을 때도 이와 사정이 비슷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불교가 처음 수용되고 공인될 때, 신라 법흥왕 때 이차돈 설화에서 보여주듯이 상당한 갈등이 나타났던 것이다. 가까이는 조선 말에 서학 즉 천주교가 들어왔을 때 일어났던 갈등과 탄압 등을 생각해보면 새로운 종교와 사상의 수용이 어떤 충격을 일으키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왜 고구려라고 그렇지 않았겠는가?

 율령 반포와 불교 공인. 이는 거의 국가 개조의 수준이라고 보면 되겠다. 아마도 이 정도면 정책 시행 과정에서 상당한 진통이 있었을 것임이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런데 소수림왕은 즉위 초 5년 내에 이런 개혁을 모두 밀어붙인 것이다. 그리고 그 개혁이 올바른 방향이었고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음은 소수림왕의 뒤를 이어 광개토왕, 장수왕 때 화려한 전성기가 펼쳐졌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증명된다.

 요즘 한국 사회를 보면 너무 단순하게 보수냐 진보냐로 구분하는 프레임에 갇혀 있다고 생각한다. 본래의 의미에서 보자면 보수와 진보는 사회의 양면이다. 보수만 있으면 정체될 터이고, 진보만 추구한다면 불안할 터이다. 보수나 진보 내에서도 다양한 층위가 있음은 물론이다. 중요한 점은 어느 시점에서 보수의 길을 택해 사회를 단단하게 안정시킬 것인지, 또는 진보의 방향으로 새로운 사회를 향한 개혁과 활력의 바람을 일으킬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길을 선택하고 그 선택이 올바르다고 판단했으면 그 길을 충실히 실천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갈등과 진통을 해결해가는 것이 이른바 리더십이다.

 이렇게 볼 때 소수림왕이나 당시 고구려 지도층이 가졌던 리더십이 결코 가볍지 않았음을 생각해야 한다. 커다란 위기에 대처하고 이를 빠르게 극복해간 좋은 사례로서, 우리가 역사에서 배워야 할 모범이다. 소수림왕 그는 위기의 리더십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인물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아쉽게도 관련 사료가 거의 없이 단지 한두 단어나 한두 줄 문장만 전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몇 가지 작은 단서를 가지고도 그 시대 사람들이 겪었을 생각과 삶의 태도에 대해 깊이 통찰해보고, 이를 오늘 우리의 상황과 연관 지어 상상해 본다면, 사료가 보여주지 않는 역사상도 우리는 넉넉히 그려볼 수 있다. 역사를 공부하는 매력이 여기에 있다.

[임기환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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