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스토리] 역대 대선 마지막 여론조사와 실제 결과는?

2017. 5. 7.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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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이상서 기자 = 이제부터는 안갯속 레이스다. 공직선거법상 3일 이후 하는 여론조사는 공표가 금지된다. 대선까지 6일간 '깜깜이 국면'에 들어서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공표된 여론조사와 최종 대선 결과는 어땠을까. 한국갤럽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와 실제 결과를 정리해 봤다. 범위는 제13대부터 제18대 대선까지다.

◇ 제13대 대선

1987년 12월 18일 치러진 제13대 대선에서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는 지지도 1위를 유지했다. 대선 두달 가량을 앞둔 같은 해 10월 20일 이후 유일하게 30%대의 득표율을 줄곧 유지했다.

노 후보는 마지막으로 여론조사를 공표했던 같은 해 11월 15일에는 38.2%를 기록했다. 선거를 33일 앞둔 시점이다. 당시 득표율 2위인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는 27.7%를 기록했다. 3위는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로 24.0%, 4위는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후보로 10.1%였다.

이런 흐름은 진짜 대선에서도 같았다. 최종 결과는 노 후보가 36.6%, 김영삼 후보가 28.0%, 김대중 후보가 27.1%, 김종필 후보가 8.1%였다. 마지막 공표 여론조사에서 노 후보와 김영삼 후보와의 격차는 10.5%포인트였다. 실제 선거에서 둘의 격차는 8.6%포인트였다.

◇ 제14대 대선

제14대 대선은 1992년 12월 18일에 열렸다. 당시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가 42.0%의 지지를 얻으며 대통령에 당선됐다. 2위는 33.8%를 얻은 민주당 김대중 후보, 3위는 16.3%를 얻은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 4위는 6.4%를 얻은 신정당 박찬종 후보였다.

이런 순위는 마지막으로 공표된 여론조사에도 마찬가지였다. 선거를 31일 앞둔 같은 해 11월 17일, 김영삼 후보는 26.0%의 지지도를 보이며 1위에 올랐다. 선거 52일 전부터 당일까지 줄곧 1위 자리를 지켜온 김 후보였다. 2위는 단 6.4%포인트 뒤진 김대중 후보였다.

3위 역시 9.0%를 기록한 정주영 후보, 4위는 5.0%를 얻은 박찬종 후보였다. 이런 순위는 대선 52일 전부터 유지됐다. 대선을 사흘 앞둔 같은 해 12월 15일,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가 각각 24.6%, 24.1%를 기록(비공표)하며 0.5%포인트의 접전을 이뤘지만 순위가 뒤바뀌진 않았다.

결국 여론조사와 최종 대선결과의 격차는 다소 달랐지만 순위는 같았던 셈이다.

◇ 제15대 대선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대선을 127일 앞둔 1997년 8월 13일부터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제치고 1위로 올라섰다. 이후 김 후보는 1위 자리를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이 후보는 한때 턱밑까지 추격했지만 뒤집지는 못했다. 이런 흐름은 대선 결과로까지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여론조사 결과가 공표됐던 같은 해 11월 22일(D-26), 김대중 후보는 33.1%의 지지도를 기록했다. 김 후보는 대선 82일 전부터 줄곧 30%대를 유지했다. 이회창 후보는 28.9%였다.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는 20.5%로 3위에 올랐다.

최종 결과도 같았다. 김대중 후보는 40.3%를 얻으며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회창 후보는 1.6%포인트 뒤진 38.7%의 표를 얻었다. 이인제 후보는 19.2%로 3위였다.

김 후보와 이회창 후보의 격차는 대선 12일을 남기고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당시 6.8%포인트였던 격차는 대선 나흘 전엔 5.1%포인트, 하루 전엔 2.1%포인트까지 좁혀졌다. 대선에서 1.6%포인트까지 줄어들었다. 여론조사 흐름이 실제 결과로까지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 제16대 대선

제16대 대선을 26일 남긴 2002년 11월 23일까지 당시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25.4%의 지지도를 기록했다. 같은 시기 32.3%를 기록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는 7%포인트 가까이 차이가 났다.

그러나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를 거친 후 양상은 달라졌다. 이튿날 노 후보의 지지도는 43.5%로 뛰어올랐다. 줄곧 2~3위권에 머물다 처음으로 1위에 오른 것이다. 30% 이상을 기록한 것도 처음이다. 공교롭게도 마지막으로 여론조사가 공표된 시기도 노 후보가 단일화를 이룬 시점이었다.

노 후보는 이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늘 40% 이상의 지지율을 보였다. 이회창 후보는 35% 전후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2위를 유지했다. 이 후보는 선거 하루 전 41.4%를 기록(미공표)하며 노 후보와의 격차를 4.7%포인트까지 좁혔다. 그러나 뒤집기엔 역부족이었다.

노 후보는 48.9%로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 후보는 46.6%의 지지도를 받았다.

◇ 제17대 대선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한때 지지도가 60.7%까지 치솟기도 했다. 선거를 116일 앞둔 2007년 8월 25일의 일이었다. 이 후보는 2~3위권 경쟁자를 멀찍이 제치며 일찌감치 낙승을 예상하게 했다.

여론조사가 마지막으로 공표된 같은 해 12월 12일, 이 후보의 지지도는 45.4%였다. 2위인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는 17.5%, 3위인 무소속 이회창 후보는 13.6%였다.

이명박 후보는 이후 한 미공표 여론조사에서도 줄곧 45% 전후의 지지도를 기록했다. 이 후보는 대선에서 48.7%의 표를 얻으며 대통령에 당선됐다. 정 후보는 26.1%로 2위, 이회창 후보는 15.1%로 3위였다.

◇제18대 대선

제18대 대선을 100여일 앞둔 2012년 9월,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40%의 지지도를 기록하며 1위에 올랐다. 무소속 안철수 후보는 25%,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는 15%였다. 박 후보가 1위, 안 후보와 문 후보가 2~3위권을 형성한 양상은 같은 해 11월 말까지 이어졌다.

변화는 대선을 20일가량 앞둔 시점에서 발생했다. 안 후보가 대선을 후보직을 사퇴하고 "아무 조건 없이 제 힘을 보탤 것"이라며 문 후보를 지원했다. 같은 해 11월 28일 실시간 여론조사에서 문 후보의 지지도는 42%를 기록했다. 9월 이후 처음으로 문 후보의 지지율이 30%를 넘어선 것이다. 이전까지 문 후보의 최고 지지율은 10월 1주와 11월 4주에 각각 기록한 24%였다.

마지막으로 여론조사가 공표된 같은 해 12월 12일, 박 후보는 47%, 문 후보는 42%의 지지도를 기록했다. 실제 선거에서 득표율은 어땠을까. 박 후보는 51.6%를 받아 18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문 후보는 48.0%의 표를 받았다.

shlamaze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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