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오월 광주정신은 외면하지 않고 함께하는 것이죠"

광주 | 박홍두 기자 입력 2017. 5. 19. 20:54 수정 2017. 5. 25.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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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노순택 사진작가와 함께한 5·18 광주

노순택 사진작가가 지난 13일 답사단 일행과 함께 국립 광주아시아문화전당 내 5·18민주평화기념관 전시관을 둘러보고 있다. 이날 처음 외부에 개방된 전시관에는 당시 공수부대의 총부리에 맨몸으로 맞섰던 30만명시민들의 모습을 옮겨놓은 조각상들이 전시돼 있다. 광주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노순택 사진작가(46)는 늦게 왔다. 얼마나 뛰었는지 숨을 헐떡이며 멋쩍은 웃음과 함께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곧 답사단을 실은 버스가 서울을 떠났다. 목적지는 광주였다.

2005년부터 6년여간 광주 5·18민주화운동을 주제로 한 사진들로 ‘망각기계’라는 전시를 했던 노 작가였다. 물을 마시고 한숨을 돌린 그는 마이크를 잡았다. “광주를, 5·18묘역을 가본 적 있으신가요?” 별것 아닌 이 짧은 물음이 이상하게도 ‘광주를, 5·18민주화운동을 얼마나 알고,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들렸다. 버스 안은 잠시 조용해졌다.

■ 같은 듯 다른 망월동의 두 묘역, 그리고 ‘님 행진곡’의 부활

지난 13일 ‘70인과의 동행’ 답사단 일행이 탄 버스가 정오쯤 광주 망월동 5·18묘역에 다다랐다. 같은 시각, 서울에선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지만 광주는 5월의 강렬한 햇살이 쨍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답사단을 가장 먼저 맞아준 건 여기저기서 울려 퍼진 노랫소리들이었다. 한쪽에선 40대 남성 대여섯명이 주먹 쥔 손을 위아래로 저으면서 목청껏 부르고 있었고, 주변 곳곳에선 젊은 대학생들이 10명 정도씩 무리를 지어 서서 같은 노래를 경건하게 불렀다. 묘역 전체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이 8~9부쯤 되는 돌림노래로 울려 퍼지는 장관이 펼쳐졌다. 그동안 ‘못 부르고, 안 불려지던’ 세월을 성토라도 하는 듯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은 지난 9년간 5·18기념식에서 제창되지 않았던 노래다. 그때마다 대통령은 기념 화환의 모습으로만 참석했을 뿐 얼굴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런 지난 9년간의 5·18묘역 모습을 노 작가는 “대통령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5·18을 어떤 식으로 축소하려 했는지가 그대로 눈에 보이는 공간이었다”고 회상했다.

답사단은 ‘새 묘역’과 ‘옛 묘역’으로 나뉘는 5·18묘역 중 새 묘역을 먼저 찾았다. 노 작가는 “두 묘역을 보면 호불호가 나뉠 겁니다”라고 미리 귀띔했다.

실제로 두 묘역은 겉모습부터 판이했다. 1997년 완공돼 2003년 국립묘지로 격상된 새 묘역은 현재 765기의 봉분이 안장돼 있다. 웅장한 민중항쟁탑 뒤로 잘 정돈된 묘역은 국립현충원과 비슷했다. 비석에 있는 영정은 돌 부조로 깔끔하게 조각돼 새겨져 있었다.

노 작가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기념하는 공간들이 어쩌면 이렇게 모두 획일적일까 싶다”고 했다. 그는 “광주 영령들이 현충원의 호국 영령들처럼 나라를 지키는 거대한 차원의 저항을 한 걸까?”라고 물었다. ‘전두환 신군부’의 탄압에 대한 공동체 전체의 저항은 “우리 자식들이 다만 행복한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은 소박한 요구이자, 바로 옆에서 쓰러지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야, 이놈들아’ 하고 함께 맞서는 용기 아니었을까”라고 해석했다. 권력이 한 개인과 공동체를 어떻게 파괴했는가를 증언하고 보여주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새 묘역에서 15분쯤 걸어 올라갔을까. 다닥다닥 붙은 수십 기의 봉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옛 묘역이다. 5·18 당시 목숨을 잃은 민주화 투사의 유해 124구가 묻혔던 곳이다. 군부가 쌓여 가는 시신을 수레와 트럭으로 실어 버리다시피 했던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단정하게 정리된 새 묘역과 달리 그저 시신을 누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무덤이 위치해 있는 듯했다. 삐뚤삐뚤한 배치는 얼마나 다급하게 조성됐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현장에서 답사단을 맞은 윤장현 광주시장이 설명을 거들었다. “무참히 살해된 시신들이 거적때기에 쌓여 이곳에 곧바로 매장됐다. 그래서 참혹한 상황과 슬픔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했다.

옛 묘역엔 광주의 진실을 밝히고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숨을 거둔 사람들의 봉분도 함께 있다. 이한열 열사와 김남주 시인, 최근엔 경찰의 물대포를 맞아 숨진 백남기 농민 등이다.

노순택 사진작가가 지난 13일 광주 5·18민주묘지 옆 ‘옛 묘역’을 참배한 뒤 답사단 일행에게 설명하고 있다. 광주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노 작가는 “옛 묘역엔 가묘(假墓)가 많다”는 것도 소개했다. 새 묘역으로 이장하긴 했지만 옛 묘역이 갖는 상징성이 커서 무덤 자체를 없애지 않은 것이다. 옛 묘역을 ‘원 묘역’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특히 눈여겨볼 부분은 영정이었다. 한국의 전통 매장 풍습으로는 묘소에 사진이 거의 없지만 5·18묘역엔 있었다. 사진들은 플라스틱으로 된 작은 관에 들어있기도 하고, 눈·비를 맞은 세월 탓에 갈라지고 녹아내리거나 찢기기도 했다. 사진 한 장 한 장은 그만큼 억울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준비되지 못했던 죽음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촬영 당시엔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찍은 사진이었겠지만, 죽은 뒤엔 ‘죽었지만, 한때는 살았던 사람’이라는 걸 말하는 듯하다. 노 작가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기억하라는 명령인 것 같다”고 했다.

답사단은 묘역을 떠나면서 이제는 참배객의 ‘통과의례’가 된 재미있는 일을 경험했다. 이른바 ‘전두환 밟기’다.

옛 묘역 입구쯤에 ‘전두환 대통령 각하 내외분 민박마을’이라고 쓰여 있는 아스팔트 돌덩이를 참배객들이 밟고 다니게 한 것이다. 이 돌덩이는 1982년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가 전남 담양 민박집을 찾았을 때 기념으로 만든 것인데 5·18유가족이 들고 와 깨버린 뒤 여기에 뒀다. ‘전두환이라는 이름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날의 참상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노 작가는 “사람들이 짓밟는 건 ‘가상의 전두환’일 뿐, 연희동에 사는 ‘현실의 전두환’은 아니다”라고 했다. 답사단 사람들은 최근 자서전까지 써서 1980년 광주를 부인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비판하면서 돌덩이를 두 번, 세 번씩 밟고 지나갔다.

■ “나는 비겁했습니다. 여러분은 절대 비겁해지지 마세요”

오후 들어 날은 더욱 뜨거워졌다. “여러분, 1980년 5월18일은 무슨 요일이었을까요? 날씨는 어땠을까요?” 5·18 최후의 항쟁지로 유명한 옛 전남도청, 지금은 국립 광주아시아문화전당으로 화려하게 탈바꿈한 그곳에서 해설사 김현숙씨는 답사단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무도 답을 하지 못하자 그가 답을 알려줬다.

“일요일이었습니다. 오늘처럼 햇볕이 쨍했고 뜨거운 날이었어요.” 모두가 쉬는 공휴일, 평화로운 일요일에 5·18은 일어났다.

운 좋게도 이날은 광주아시아문화전당 5·18민주평화기념관이 처음으로 전시관을 개방한 날이었다. 답사단은 이제는 5·18 전시관이 된 전남도청 내부에 들어가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전남도청은 시민군이 전두환 신군부가 보낸 공수부대의 억압을 열흘간 버티며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곳이다.

이른 냉방 탓인지는 몰라도 내부는 꽤 서늘했다. 그러나 전시 내용은 뜨거움 그 자체였다. 80년 5월16일 금남로 분수대 앞에서 시작된 횃불시위, 5월18일 공수부대의 ‘화려한 휴가’ 작전 시작, 5월20일 집단 발포 사태와 시가전, 5월21일 ‘공동체’로서의 광주 시민들의 모습까지….

특히 5월20일 오후 1시의 애국가와 함께 집단 발포를 재연한 장면은 답사단을 충격에 빠뜨렸다. 당시 도청을 포위하고 공수부대의 총부리에 맨몸으로 맞섰던 30만명에 이르는 시민들을 마네킹 같은 조각상들로 그대로 옮겨놓은 전시였다. 김씨의 안내를 받아 답사단은 모두 조각상들 사이사이에 직접 섰다. 옆엔 다른 사람들(조각상들)이 서 있었다. 앞과 뒤에도 사람들이 서 있었다. 행렬의 맨 앞에서 자동차 헤드라이트 같은 빛들이 쉴새 없이 쏘아졌다. 소음도 들려왔다.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였다. 무서운 생각이 들어 잔뜩 소름이 끼쳤다. 움츠러들었지만 다시 돌아보니 내 옆과 앞·뒤엔 여전히 사람들이 서 있었다. 든든하면서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전시관을 돌면서 김씨의 설명을 보고 듣고 느끼던 답사단 일부가 어느새 눈물을 보였다. 그러자 김씨가 의연하게 꾸짖듯 말했다. “울지 마세요 여러분, 울지 마세요. 여러분이 울면 나도 울고 싶어집니다. 이 전시를 준비하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자, 잘 보세요. 당시 상황을”.

김씨는 5·18 당시 고교 2학년이었다. 그는 “아직도 그때가 생생하다”고 했다. 수십만명의 시민이 함께 행동했다고 했다. 처음엔 자신도 무서워서 함께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새벽 3시반이었는데, 난 ‘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도와주세요!’라는 말을 듣고도 이불 속에서 나가지 않고 외면했던 사람이다. 그게 일평생 마음에 남는다”고 했다. 그의 말엔 깊은 회한이 배어 있었다.

도청 3층 방송실을 마지막으로 전시관람을 마친 뒤 복도로 나오자 바깥에서 노동자들의 집회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김씨는 당부했다. “지금도 전남도청 광장은 언제나 사람들이 모여 집회를 시작하는 곳입니다. 외면하지 말고 함께하는 것이 광주정신입니다. 저처럼 절대 비겁하지 마십시오.”

5·18 최후의 항쟁지였던 옛 전남도청 3층에서 창밖으로 교통 폐쇄회로(CC)TV 카메라탑이 보인다. 고공농성을 하지 못하도록 쇠사슬로 감아놓았다. 광주 | 김창길 기자

도청을 나오기 전 노 작가가 창문 밖 한 곳을 가리켰다. 도청 앞 광장 옆에 족히 5층 높이가 넘는 교통 폐쇄회로(CC) TV 탑이 서 있었다. 노 작가는 “2009년 해고 노동자 2명이 그곳에 올라가 70일을 고공농성하고 내려왔다. 결국 복직은 되지 않았지만 석달 뒤 탑에는 더 이상 아무도 올라가지 못하도록 쇠사슬이 친친 감겼다”고 했다. ‘고립무원’의 도시였던 광주, 그리고 최후의 항쟁지 전남도청 앞에서 또 다른 5·18은 계속되고 있는 듯했다. 씁쓸한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노 작가에게 아침에 늦은 이유를 물었다. 그는 서울 신길동에서 집 공사를 직접 하다가 늦었다고 했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알리기 위해 거리에서 한뎃잠을 자는 노동자들을 위한 쉼터를 짓는 공사다.

햇수로만 37년, 그때의 광주 시민들처럼 사회 곳곳에선 고립된 채 싸우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은 지금이다. 우리는 과연 죽음을 넘고 시대의 어둠을 넘었던 그 해 5월의 광주를 얼마나,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광주 | 박홍두 기자 ph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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